아르헨티나서 홍보대사로 위촉 “8가지 스텝만 배워두면 충분”
입력 : 2007.06.08 00:15
- 태권도 7단, 쿵후 7단의 무술인 겸 프로골퍼로 뛰다가 탱고에 빠진 끝에 도복을 벗어던지고 프로 탱고 댄서가 된 남자. 탱고 본고장 아르헨티나로부터 ‘탱고 홍보대사’로 위촉까지 받은 공명규(50)씨가 올가을 아르헨티나 현지 무용수 다섯 팀을 초청해 ‘피버 탱고(Fever Tango·9월 4~9일 고양 아람극장) 공연을 한다. 자신이 우리나라에 탱고를 소개한 지 올해로 10년을 맞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공씨는 1980년 태권도 사범으로 아르헨티나에 건너갔다가 탱고를 만나 배우기 시작했고 97년 귀국해 탱고 보급을 시작했다. 지난 17년을 탱고에 쏟은 셈이다. 그런데도 공씨의 ‘춤바람’을 아내는 10년이 넘도록 몰랐단다. “반대할 것이 뻔해서 내가 말 안 했어요. 아내가 ‘향수 냄새가 매일 바뀐다’고 해도 ‘여러 사람 만나니까 그렇다’고 둘러댔어요. 그런데 내가 무대에서 공연한 게 소문나 결국 아내가 알게 됐어요. 그래도 나는 ‘뭐든 시작하면 끝을 봐야 된다’고 설득했어요.”
- ▲“탱고는 단순한 동작 하나에도 힘이 많이 실립니다.”그저 손과 발을 이리저리 바꾼 동작이었는데도, 사진 촬영 40여분간 공명규씨는 땀을 뻘뻘 흘렸다. /이명원기자 mwlee@chosun.com
공씨가 그토록 “끝을 보겠다”고 했던 건 배울 때 너무나 서러움을 받고 어렵게 배웠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르헨티나에서 탱고를 배웠던 6년간 공씨는 남몰래 눈물을 삼킨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탱고를 배우겠다고 나서니 알게 모르게 견제가 심했어요. 한번은 발표회 전날, 저랑 연습해야 할 여성 파트너가 갑자기 없어지는 바람에 저녁에 공원에 가서 나무 붙잡고 돈 적도 있어요. 나중에 보자, 하고 이를 악물었지요.”
그러나 1997년 정통 탱고를 소개하겠다는 야심으로 귀국했지만,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귀국하자마자 IMF를 만나 ‘거지가 됐다’. 그래도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 탱고만 가르친 공씨는 2003년 주한 아르헨티나 대사관이 위촉한 ‘탱고 홍보대사’가 됐다. 그러나 그는 “지난 10년간 한국에서 겪은 어려움이 아르헨티나에서 당한 설움보다 아팠다”고 말했다.
그런 설움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공씨가 탱고를 계속 추는 이유는 무엇일까. “골프나 태권도 실력을 남미 사람들한테 보여줘도 콧방귀도 안 뀌지요. 그러나 내가 탱고 실력을 보여주면 다들 존경해요. 남미 사람들도 어려워하는 걸 동양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거죠.”
공씨는 탱고를 ‘발의 전쟁’이라고 말한다. “다른 춤은 형식적인 스텝을 많이 강조하지요. 하지만 탱고는 더 풍부하게 응용할 수 있어요. 걸음마 격인 8개 스텝을 배워두면 세계 어느 나라에 가서도 어울릴 수 있어요.”
공씨는 이번 무대에서 ‘아리랑’과 ‘목포의 눈물’을 탱고로 변주해 선보일 예정이다. “다음달부터는 제가 아르헨티나에 가서 합숙하면서 연습할 겁니다. 사람들은 남들이 ‘골프하러 간다’고 하면 부러워하잖아요. 이 다음에 ‘탱고 배우러 간다’고 할 때도 그런 시선으로 볼 수 있는 날이 올 때까지 탱고를 가르칠 겁니다. 그날이 내가 성공한 날이 되겠지요.”
사회편견에 한때 폐가서 홀로 춤춰
“제비냐고요? 카바레 근처도 안가요”
입력 : 2006.04.14 00:12 / 수정 : 2006.04.14 00:12
- 금요일 밤 서초구의 아르헨티나 와인바 ‘부에노스 아이레스’. 9시가 되자 지하 2층 와인창고에 잔을 든 손님들이 하나둘 내려왔다. 젊은 커플부터 중년 신사까지 30여명이 여기저기 걸터앉자, 빨간·노란 조명이 비추는 20여 평 마루에 공명규(49)씨가 섰다. ‘라 쿰파르시타(La Cumparsita)’의 열정적인 반도네온(Bandoneon·아코디언을 변형한 악기) 리듬에 맞춰 공씨 혼자 추는 ‘솔로 탱고’가 시작되자, 현란하고 정교한 발놀림에 눈길이 집중됐다. 춤이 끝나자 일제히 “브라보”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탱고는 귀로 듣고, 마음으로 느끼며, ‘발로 말하는’ 춤이에요. 탱고의 발놀림을 ‘보카(Boca)’라 하는데 이는 ‘입’이란 뜻입니다.”
20여 년간 탱고를 춘 끝에 2003년 아르헨티나 정부로부터 ‘탱고 홍보대사’로까지 공식임명된 공명규씨가 한동안의 침묵을 깨고 최근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2004년 아르헨티나 국립극장 ‘세르반테스’ 탱고 공연 이후 2년 만이다. 이번엔 무료공연·강습 등으로 사회 곳곳에 탱고를 보급하겠다며 나섰다.
공씨는 지난 1월부터 매주 금요일 밤 와인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무료공연을 열고 있다. 오는 29일엔 한 독지가의 도움으로 노원구 중계동에 150평 규모의 ‘공명규의 탱고아리랑 스튜디오’(02-935-8883)도 연다. 그의 꿈은 여러 사람들을 하나로 화합시키는 탱고파티를 매일 여는 것이다. 파고다 공원의 ‘어르신들’을 위한 무료 탱고 교습도 마음에 두고 있다.
- 서초동 와인바의 지하창고 겸 간이공연장에서 지난날을 회상하는 공명규씨. 그의 뒤에서 수제자 우성필씨가 탱고를 추고 있다.
- “말로는 표현 못할 그분들의 지난날을 탱고로 아름답게 세상에 보여줄 수 있을 텐데….”
공씨의 지난날 역시 파란만장했다. 그는 태권도사범으로 1980년 아르헨티나로 건너갔다가 탱고에 빠졌다. 아내에겐 무려 12년간 탱고 한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공씨는 프로골퍼로서도 성공해 아르헨티나 프로골프 상금 6위까지 올라갔다. 그땐 60평 아파트에 살면서 벤츠를 타고 다녔다. 하지만 지금은 노량진에서 월세35만원짜리 하숙방에 산다.
그래도 1996년 귀국 직후의 일을 떠올려보면 지금은 상황이 나아진 편이라고 그는 말한다. 귀국 당시 가지고 온 5만달러를 다 날리고, 남은 20달러로 김포공항 옆 쓰러져가는 폐가를 수리한 뒤 막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프로골퍼 명함을 내밀면 환대하던 사람들도 탱고 얘기를 꺼내면 눈빛이 달라졌다.
“친구의 아내들을 꼬이려 한다는 말이 듣기 싫어 동창회에도 나가지 못했어요.”
힘들 때도 그를 위로한 건 탱고밖에 없었다. 친구에게 얻은 중고 카세트로 탱고를 들으면서 홀로 연습했다. 그렇게 해서 그만의 ‘솔로 탱고’가 탄생하기도 했다. 흔한 오해와 달리 공씨는 지금까지 한 번도 카바레에 가지 않았으며, 밤무대에 서지 않겠느냐는 수많은 제의도 다 뿌리쳤다. 대신 그는 탱고 제자 400명을 길러냈다. 현재 전경련 국제경영원 글로벌최고경영자과정에서 문화분과위원장으로 초청돼 CEO들을 상대로 탱고와 아르헨티나 문화를 알리고 있다.
“탱고엔 19세기 아르헨티나에 이민 와서 힘겹게 삶을 개척했던 사람들의 애환이 서려 있습니다. 올해 무료전국투어를 통해서는 한국의 한(恨)이 접목된 탱고를 한번 보여드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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