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산의역사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7권 한산군(韓山郡)

천하한량 2006. 12. 8. 02:34

충청도(忠淸道)
 
 
한산군(韓山郡)
 


동쪽으로는 임천군(林川郡) 경계까지 15리이고, 남쪽으로는 전라도 임피현(臨陂縣) 경계까지 14리, 같은 도의 함열현(咸悅縣) 경계까지 13리이고, 서쪽으로는 서천군(舒川郡) 경계까지 19리이고, 북쪽으로는 홍산현(鴻山縣) 경계까지 29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4백 59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마산현(馬山縣)이었는데, 신라에서는 그대로 이름하여 가림군(嘉林郡)의 속현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그대로 예속시켰다. 명종(明宗) 때에 감무(監務)를 두어 홍산(鴻山)을 겸임하게 하였다가, 뒤에 이를 지한주사(知韓州事)로 승격시켰다. 본조 태종 13년에 예(例)에 따라 한산군으로 고쳤다.
【관원】 군수ㆍ훈도 각 1인.
【군명】 마산(馬山)ㆍ마읍(馬邑)ㆍ한주(韓州)ㆍ아주(鵝州).
【성씨】 본군 이(李)ㆍ김(金)이 있으며, 단(端)ㆍ유(柳) 모두 촌성(村姓)이다. 전(田) 내성(來姓)이다. 최(崔) 속성(續姓)이다.
【형승】 산이 기이하고 물이 곱다 이파(李坡)의 취읍정(翠挹亭) 기문에, “산이 기이하고 물이 고와 기린봉(麒鱗峯)은 북쪽에 진산(鎭山)이 되어 있고, 웅포(熊浦)는 그 남쪽을 감싸고 흐른다.” 하였다.
【산천】 건지산(乾至山) 군 서쪽 1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취봉산(鷲峯山) 군 남쪽 5리에 있다. 기린산(麒麟山) 군 서쪽 5리에 있다. 월명산(月明山) 군 북쪽 11리에 있다. 원산(圓山) 와포(瓦浦)와 아포(芽浦) 사이에 있다. 계점산(鷄岾山) 군 남쪽 5리에 있다. 기현(箕峴) 군 서쪽 5리에 있다. 적현(赤峴) 군 서쪽 6리에 있다. 곡현(曲峴) 군 북쪽 25리에 있다. 상지포(上之浦) 군 동쪽 18리에 있으니, 곧 임천군(林川郡) 남당진(南堂津)의 하류이다. 우포(杇浦) 군 동쪽 11리에 있다. 월명산(月明山)에서 발원하여 진포(鎭浦)로 들어간다. 기포(岐浦) 군 동쪽 12리에 있다. 와포(瓦浦) 군 남쪽 14리에 있으니, 곧 바다의 별포(別浦)이다. 아포(芽浦) 군 남쪽 20리에 있는데 서천군(舒川郡)과의 경계이며, 진포(鎭浦)의 하류이다. 또 곡현(曲峴)에서 나오는 물과 서천군 금부현(金富峴)과 비인현(庇仁縣) 모동(茅洞)의 물이 이곳에서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진포(鎭浦) 군 서쪽 21리에 있다. 임천군(林川郡) 조에 자세히 나와 있고, 또 서천군과 임피현(臨陂縣) 조에도 나와 있다.
【토산】 모시[苧]ㆍ옻[漆]ㆍ뱅어[白魚]ㆍ홍어(洪魚)ㆍ상어[鯊魚]ㆍ감[시(枾)]ㆍ산무애뱀[白花蛇]ㆍ대[竹]ㆍ조기[石首魚]ㆍ숭어[秀魚]ㆍ웅어[葦魚]ㆍ농어[鱸魚].
【성곽】 건지산성(乾至山城) 흙으로 쌓았으며 주위가 3천 61척이다. 그 안에 일곱 개의 우물과 한 개의 못이 있으며 군창(軍倉)이 있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신증』 읍성(邑城)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4천 70척에 높이가 11척이며, 안에 도랑 하나와 우물 넷이 있다.
【궁실】 객관(客館) 이곡(李穀)의 기문에, “지정(至正) 기축년 가을에 비가 몹시 와서 마산(馬山) 객관(客館)의 남쪽 낭사(廊舍)가 무너졌다. 비가 이미 개고 농사 또한 틈이 나니, 고을 사람들이 이를 수리하려고 하였다. 군수 박군(朴君)이 말하기를, ‘남쪽 낭사뿐 아니라 본 청사도 거의 무너졌으니, 어찌 한꺼번에 새로 짓지 않으랴.’ 하니, 고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지방에는 재목이 나지 않아서 한 길 정도의 목재도 백리 밖의 다른 산에서 취해 오며, 또 우리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 권세 있는 자들에게 매어 있으니, 누가 즐겨 우리 역사를 하여 주겠는가.’ 하였다. 박군이 말하기를, ‘다만 해보자. 무슨 어려울 것이 있으랴.’ 하고, 또 말하기를, ‘묵은 집을 헐지 않으면 사람들이 힘쓰지 않으려 할 것이다.’ 하고는, 하루아침에 다 철거해 버렸다. 고을 사람들이 처음에 의심도 하고 걱정도 하자, 군이 이에 아전들의 재능을 헤아려 익숙한 자에게는 큰 집을 맡기고 인부를 많이 주고, 미숙한 자에게는 적게 하여 이미 일을 나누어 맡게 하였다. 또 명령하기를, ‘옛사람[孟子]이 이르기를, 「백성을 편케 하기 위하는 도리로 백성을 부리면, 비록 수고롭더라도 원망하지 않는다.」하였다. 이제 너희들이 이 고장에서 옷 입고 밥 먹으면서 못살겠다는 한탄이 없는 것은 모두가 임금의 은혜인 것이다. 여기에 오는 빈객(賓客)은 크게는 천자(天子)의 은혜로운 윤음(綸音)을 펴고, 작게는 국가의 명령을 반포하여 백성을 보살피는 것인즉, 이 객관을 짓는 것도 필경은 백성을 위한 일이다. 그러니 이번 역사가 너희들을 편하게 하기 위하는 도리가 아니겠는가. 더구나 객관의 옛 제도가 거칠고 소박한데다가 또 장차 무너지게 되어, 사신을 맞이하여 조서(詔書)와 명령[令]을 받들 수가 없으므로 군수는 오직 공경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데 어찌 감히 태만하랴. 감히 어기는 자는 벌하리라.’ 하였다. 이에 호적에 의하여 인부를 내게 하고 늙은이와 어린이만을 면제하였다. 바닷길로 재목을 가져와서 멀고 험한 것을 꺼리지 않으니, 돈을 거두어 돕는 자와 밥을 싸다가 먹이는 자가 잇따라 끊이지 않았다. 그해 윤달에 역사를 시작하여 겨우 두어 달만에 청방(廳房)과 낭무(廊廡)가 다 얽어졌으나, 때가 바야흐로 추워 얼어붙는 시기인지라 흙을 바를 수 없어 잠시 공사를 멈추었었다. 다음해 2월에 이르러 준공을 하게 되었는데,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아서 면세(面勢)에 맞고, 사치스럽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아서 시의(時宜)에 적합하였다. 처음에 의심하고 걱정하던 자들도 마침내 기뻐하여 감복하고, 전일에 세력을 믿고 대항하던 자들도 이제는 시키는 대로 복종하였다. 또 주관(州官)이 사무를 보는 청사와 서적을 두는 시렁, 물건을 저장하는 창고도 짓지 않을 수 없다 하여 그 계획을 이미 정하여 놓았는데, 군이 마침 갈려 가게 되자 고을 사람들이 부모를 잃은 것같이 여기니, 군은 역시 유능한 관원이로다. 내가 젊었을 적에 시골에서 자라 백성의 화복(禍福)이 실로 수령에게 달려 있음을 알았고, 우리 고을에서 더욱 그러함을 보았는데, 중간에 서울에 있으면서 우리 고장의 아전과 백성들이 가끔 도망해 숨곤 하여 읍(邑)의 길이 가시밭을 이루어 빈객들이 들어갈 곳이 없으매, 군수가 어찌할 바를 몰라 인(印)을 품고 가버린다는 말을 듣고는 내가 한숨 짓고 말하기를, ‘이것은 아전과 백성들의 죄만이 아니라, 고을을 다스리는 자도 또한 그 책임을 회피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병술년 봄에 원 나라에서 조서를 받들고 돌아오니, 이자(李資)가 이 고을에서 정사를 시작하자 아전을 통솔하고 백성에게 임하는 것이 모두 법도가 있어 한 고을 사람들이 모두 그의 치적을 눈을 닦고 대하였다. 반년이 못 되어 내직(內職)으로 불려가자, 이자장(李自長)이 그의 정사를 이어 더욱 부지런히 하여 아는 것은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말하기를, ‘국가 제도에 수령이 거처하는 곳을 공아(公衙)라 하는데, 이 고을 수령은 몸 붙일 곳이 없어서 백성의 집에 우거하고 있으니, 어떻게 고을을 다스려 가겠는가.’ 하고는 고을 아전에게 명하여 부서를 나누어 역사를 담당시켰더니, 기일도 안 되어서 이루어졌다. 또 객관을 차례로 수리하려 하였는데 갑자기 상사(喪事)를 당하여 고을을 떠났다. 박군이 이르자, 두 이군(李君)의 재능을 겸하여 수년 사이에 이익되는 일은 일어나고 해독을 제거되어, 일이 잘 되고 백성들이 화평하여 실로 전일의 한산(韓山)이 아니었다. 또 사람을 성의로 대하고, 빈객을 접대하는 데에 게으른 빛이 없었으며, 공급하는 물건인 상(床)ㆍ요[褥]ㆍ집기(什器) 등의 미세한 데 이르기까지 모두 깨끗이 완비하여 놓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관청 창고의 재물로 충당한 것이요, 털끝만큼이라도 백성에게서 거둔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 명성이 대단하여 한 도(道)에 으뜸이 되었다. 나는 이 고을 사람이다. 어머니를 모시는 여가에 다행히 듣고 본 바가 있었는데, 이제 관사(館舍)의 이루어짐으로 인하여 그 사실의 대략을 쓰는 바이다. 아, 이 뒤에 군의 후임으로 오는 자가 한결같이 군을 본받아서 공적의 완성하지 못한 것과 일을 마치지 못한 것을 마침내 성취한다면, 훌륭한 관리가 되지 못할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군의 이름은 시용(時庸) 이요, 자(字)는 도부(道夫)이며, 밀성(密城)은 그의 본관이다. 과거에 올라 문한(文翰)의 직을 맡았고, 감찰규정(監察糾正)에 임명되었다가 예(例)에 따라 수령으로 나왔던 것이다.” 하였다.
【누정】 취읍정(翠挹亭) 군 남쪽에 있다. 이파(李坡)의 기문이 있다.
【학교】 향교(鄕校) 군 서쪽 2리에 있다.
【역원】 신곡역(新谷驛) 군 서쪽 11리에 있다. 간법암원(看法巖院) 군 동쪽 14리에 있다. 숭정원(崇井院) 군 서쪽 7리에 있다. 곡화원(曲火院) 군 북쪽 25리에 있다. 길산원(吉山院) 군 서쪽 13리에 있다.
『신증』【교량】 길산포 석교(吉山浦石橋) 군 서쪽 22리에 있다.
【불우】 일광사(日光寺) 취봉산(鷲峯山)에 있다. 숭정사(崇井寺) 기린산(麒麟山)에 있다. 고석사(孤石寺) 월명산(月明山)에 있다. 회사(回寺) 건지산(乾至山) 북쪽에 있다. 영모암(永慕庵) 건지산 북쪽에 있는데, 이색(李穡)의 화상(畫像)이 있다. ○ 권근(權近)이 지은 화상 찬(贊)에 이르기를, “천품은 순수한 아름다움을 타고났고, 성학(聖學)의 정미(精微)한 것을 궁구(窮究)하였네. 흉금(胸襟)이 맑고 빛나도다. 실천은 극히 독실하였고, 문장을 묘하게 발휘하였다. 증점(曾點)의 광(狂)은 아니면서도 ‘읊으며 돌아가리라’는 흥취가 있으며,유하혜(柳下惠)의 화(和) 같으면서도 불공(不恭)하다는 기롱은 없었다. 학자들은 태산북두(泰山北斗)와 같이 우러러 보았고, 국가에서는 시귀(耆龜)처럼 믿고 의지하였다. 대신에 임명되어서도 그 현달하지 않을 때의 지조를 변하지 않았고, 큰 환란을 당하여서도 위엄에 겁내지 않았다. 붉은 마음이 더욱 정성되고 본래의 절조를 옮기지 않았다 함은 참으로 공이 스스로 자신을 이른 말이다. 그 강수[江漢]는 도도(滔滔)히 흐르고 구름 연기 부슬부슬 내린다. 구양수(歐陽脩)ㆍ한유(韓愈)를 뒤따라 나란히 몰고 가지런히 달렸다. 뒤에 보는 자는 내 말의 속임이 없는 것을 알지어다.” 하였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군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군 서쪽에 있다. 여단(厲壇) 군 북쪽에 있다.
【총묘】 이곡(李穀)의 묘 군 남쪽 4리 기현(箕峴)에 있다. 이색(李穡)의 묘 군 서쪽 5리 가지현(加知峴)에 있으며, 하륜(河崙)이 지은 비문이 있다.
【고적】 안보향(安保鄕) 군 남쪽 15리에 있다. 안곡소(鷃谷所) 군 북쪽 13리에 있다.
【명환】본조 이심(李審) 온량(溫良)하고 청렴 근신하였다. 권옹(權雍) 청백 근신하고 지조가 있었다.
【인물】고려 이지명(李知命) 널리 많은 서적을 보았으며, 사부(詞賦)에 능하고, 초서(草書)와 예서(隸書)를 잘 썼다. 과거에 급제하여 황주 서기(黃州書記)로 나갔는데 청렴 정직하였고, 흉년을 당하여 심력을 기울여 백성을 구제하였다. 뒤에 충주 판관(忠州判官)이 되어서도 그 정사가 황주와 같으니, 사람들이 은혜로운 행정에 감동하였다. 정중부(鄭仲夫)의 난을 면하고 벼슬이 정당문학 태자소부(政堂文學太子少傅)에 이르고, 시호는 문평(文平)이며, 정승이 되어서는 옛 대신의 풍도가 있었다. 이당모(李唐髦) 이지명(李知命)의 아들로서 문장에 아버지의 기풍이 있었으며,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국자 사업(國子司業)에 이르렀다. 이곡(李穀) 충숙왕(忠肅王)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예문 검열(藝文檢閱)을 지내고, 충숙왕 후원년(後元年)에 정동성 향시(征東省鄕試)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드디어 제과(制科)에 올랐다. 앞서 본국 사람은 비록 제과(制科)에 합격하여도 거의가 하열(下列)에 참여했는데, 이곡의 대책(對策)이 크게 독권관(讀券官)의 칭찬을 받아 제이갑(第二甲)에 발탁되고, 한림국사원 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에 임명되어 중국의 문사들과 교유하게 되었다. 학교를 일으키라는 황제의 조서(詔書)를 받들고 본국으로 돌아왔다가 얼마 후에 다시 원 나라로 가서 중서성 좌우사 원외랑(中書省左右司員外郞)에 제수되었다. 원 나라에서 자주 본국에 동녀(童女)를 요구해 왔었는데, 이곡이 글을 올려 이를 혁파하게 하였다. 충혜왕(忠惠王) 후 2년에 표문[表]을 받들고 원 나라로 가서 이내 머물러 있다가, 충목왕(忠穆王) 때에 본국으로 돌아와서 누차 벼슬을 옮겨 정당문학 한산군 도첨의찬성사(政堂文學韓山君都僉議贊成事)에 이르렀다. 충정왕(忠定王)이 즉위하자, 이곡이 일찍이 공민왕(恭愍王)을 세울 것을 청한 적이 있었던 관계를 스스로 불안을 느껴 나가서 관동(關東) 지방을 유람하였는데, 원 나라에서 또 봉의대부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낭중(奉議大夫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에 임명하였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며, 저술로는 《가정집(稼亭集)》이 있다. 이순효(李純孝) 사람됨이 청백하였고, 일 처결하기를 민첩하게 하였다. 일찍이 사명을 받들고 몽고(蒙古)로 가서 한 가지의 물건도 안 가지고 돌아오니 행탁(行橐)이 모두 비었는지라, 여염의 부녀자와 역졸(驛卒)들이 모두 그 청백한 절조에 탄복하여 말하기를, “참 관인(官人)이다.” 하였다. 이색(李穡) 이곡(李穀)의 아들로서 타고난 자품이 총명 민첩하고 널리 많은 서적을 보았으며, 시문(詩文)을 지을 때에는 붓을 잡고 곧 내려썼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또 정동행성 향시(征東行省鄕試)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서장관(書狀官)으로 원 나라에 가서 정시(廷試)에 응시하였는데, 구양현(歐陽玄)이 이색의 대책문(對策文)을 보고 크게 칭찬하여 드디어 제이갑 제이명(第二甲第二名)에 발탁되었다. 본국으로 돌아와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으며, 국가의 문한(文翰)을 수십 년 동안 맡아 보았는데, 여러 차례 중국 사람들에게 격찬을 받았다. 후학(後學)을 끌어 등용하기에 힘썼으며, 유학(儒學)을 일으키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으니, 학자들이 모두 우러러 사모하였다. 본조에 들어와서 한산백(韓山伯)에 봉해졌고,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목은집(牧隱集)》 50여 권이 세상에 간행되었다. 이종덕(李種德) 이색(李穡)의 아들이며, 벼슬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이르렀다. 이종학(李種學) 이종덕(李種德)의 아우이며, 벼슬이 첨서 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에 이르렀다.
본조 이종선(李種善) 이종학(李種學)의 아우이며, 나이 15세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벼슬이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양경(良景)이다. 이계린(李季疄) 이종선(李種善)의 아들로서, 세조(世祖) 때에 좌익공신(佐翼功臣)으로 벼슬이 좌찬성(左贊成) 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공무(恭武)이다. 이계전(李季甸) 이계린(李季疄)의 아우로서, 세조(世祖) 때에 정난 좌익공신(靖難佐翼功臣)에 봉해졌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한성부원군(韓城府院君)에 이르고, 문형(文衡)을 맡았으며,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이맹균(李孟畇) 나이 15세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벼슬이 우찬성(右贊成)에 이르렀다. 이숙치(李叔畤) 청백하고 정직하다는 명성이 있었다. 세종(世宗) 때에 대사헌(大司憲)이 되었고, 여러 관직을 거쳐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에 이르렀다. 이숙묘(李叔畝) 벼슬이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 이르렀고, 시호는 양도(良度)이다. 이축(李蓄) 벼슬이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에 이르렀다. 이훈(李塤) 이축(李蓄)의 아들이며, 성종(成宗) 때에 좌리공신(佐理功臣)이 되어 벼슬이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에 이르렀고, 한성군(韓城君)에 봉해졌다. 이우(李堣) 이계전(李季甸)의 아들이며, 두 번 문과에 올랐고 벼슬이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이르렀는데 일찍 죽었다. 이파(李坡) 이우(李堣)의 아우이며, 나이 18세에 문과에 올라 집현전(集賢殿)에 뽑혀 들어갔으며, 여러 벼슬을 거쳐 의정부 좌찬성에 이르렀다. 시호는 명헌(明憲)이다. 사람됨이 총명하였으며, 전고(典故)를 많이 알았다. 이봉(李封) 이파(李坡)의 아우이며, 을유년 과거에 장원으로 뽑혔고, 벼슬이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이르고, 문장에 명성이 있었다.
『신증』 이언호(李彦浩) 이색(李穡)의 후손으로 과거에 급제하였고, 벼슬이 관찰사(觀察使)에 이르렀다.
【효자】본조 이하(李夏)ㆍ이렴(李廉)ㆍ박지(朴地) 모두 효행이 있어 정문(旌門)되었다.
【열녀】본조 윤씨(尹氏) 사성(司成) 윤기(尹耆)의 누이로서 자못 글을 잘하였다. 그 남편 나계문(羅繼門)이 재상 홍윤성(洪允成)의 집종에게 피살되었는데, 세조(世祖)가 온양(溫陽)에 거둥하였을 때, 윤씨가 스스로 소장을 지어 원통한 정상을 호소하니, 그 사연이 애절하고 이치가 발랐다. 임금이 이를 민망하게 여겨, 명하여 홍윤성의 종을 저자에서 찢어 죽이고, 해마다 미곡(米穀)을 내리고, 부역을 면제하였다.
【제영】 산천잉수금유고(山川孕秀今猶古) 고려 김자수(金子粹)의 시에, “동국의 문장을 집대성(集大成)하였으니, 가정(稼亭)의 그 부자가 모든 문인에 으뜸이었네. 산천의 품은 정기 지금도 예같으리니, 묻노니 어느 사람 그 이름을 이을꼬.” 하였다. 산방웅진첩장성(山傍熊津疊障成) 조계생(趙啓生)의 시에, “산은 웅진강 끼고 첩첩 병장 이루어, 마침내 이씨 일문 그 영기(英氣) 타고 났다. 저 멀리 원 나라서 부자가 과거에 합격한 후, 온 천하가 이 고을을 알게 되었네.” 하였다. 진강연우심유적(鎭江煙雨尋遺跡)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목은 노야(牧隱老爺) 높은 명성 이 고을에서 비롯하여, 청년에 북경 유학[北學]하여 과거에 올랐네. 대대로 잠영(簪纓)인데 시서(詩書)가 있고, 역사에 빛나는 사업은 상세하다. 두자미(杜子美) 웅(雄)한 시(詩)는 우주에 훤전(喧傳)되고, 사씨(謝氏) 집 꽃다운 풀 지당(池塘)에 가득하다. 진강(鎭江) 연우(煙雨) 속에 남긴 자취 찾으니, 다만 저 고깃배가 나루 곁에 떠있구나.” 하였다.팔경(八景)이색(李穡)의 시. 숭정암송(崇井巖松) “봉우리 위엔 푸른 돌 솟아났고, 소나무 이마 언저리엔 흰구름 연하였네. 나한당(羅漢堂) 적적도 한데, 거주하는 중들은 교와 선이 섞였네.” 하였다. 일광석벽(日光石壁) “우뚝히 평야에 서서, 저 까마득히 긴 하늘 굽어보네. 푸른 석벽 작은 승방(僧房)에, 불등(佛燈)이 반공(半空)에 걸렸네.” 하였다. 고석심동(孤石深洞) “평평한 들판이 장차 다하려는데, 회봉(回峯) 바라보니 다시금 높구나. 한 구역 궁벽한 곳에, 절간이란 본래 외롭네.” 하였다. 회사고봉(回寺高峯) “뒷고개는 삼각을 이루었고, 앞 봉우리 반공에 치솟았다. 가는 배 쇠 닻줄 내리니, 혹시 광풍(狂風)이나 있을런가.” 하였다. 원산수고(圓山戍鼓) “바다 위 높은 산에 봉화(烽火) 전하고, 여염(閭閻)은 바다를 눌렀네. 백년 간 난리 없는 이 땅에, 수자리 북소리 석양이 짙다.” 하였다. 진포귀범(鎭浦歸帆) “가는 비 복사꽃 물결과, 찬 서리 갈대잎 가을, 돌아가는 저 돛대는 어느 곳에 떨어지려나. 아득한 한 조각배.” 하였다. 압야권농(鴨野勸農) 압야는 군 북쪽 3리에 있다. ○ “냇가의 들판은 반반하기 숫돌 같고, 가득히 심은 벼 질펀하기 구름 같네. 권농하는 원님은 행차를 재촉하고, 들판을 돌아다보니 땅거미 지려 한다.” 하였다. 웅진관조(熊津觀釣) “마읍(馬邑) 산봉우리 병풍 비껴 쳤고, 웅진 강물은 이끼빛으로 물들었다. 물에 드리운 낚시 실바람 받아 간들간들, 때마침 달밤에야 돌아오네.”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본래 백제의 우두성(牛頭城)이었는데, 신라 신문왕(神文王) 6년에 마산현(馬山縣)으로 되었다.
【방면】 동상(東上) 처음은 5리, 끝은 10리이다. 동하(東下) 위와 같다. 남하(南下) 위와 같다. 남상(南上) 처음은 10리, 끝은 20리이다. 서상(西上) 위와 같다. 서하(西下) 처음은 5리, 끝은 29리이다. 상북(上北) 처음은 20리, 끝은 30리이다. 하북(下北) 처음은 5리, 끝은 30리이다. 북부(北部) 끝이 5리이다.
【진도】 죽산진(竹山津) 남쪽 15리에 있는데, 임파(臨坡)로 통한다. 길산포소진(吉山浦小津) 서쪽으로 20리이며, 서천(舒川)과 경계인 석교(石橋) 아래에 있다.
【사원】 문헌서원(文獻書院) 선조(宣祖) 갑술년(甲戌年)에 세웠고, 광해주(光海主) 신해년(辛亥年)에 사액하였다. 이곡(李穀) 자는 중문(仲文)이고, 초명은 예백(藝伯)이며, 호는 가정(稼亭)이다.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충숙왕 계유년에 원(元)에 들어가 제과(制科 임금이 친히 문제를 내어 시험보이던 중국 과거제도의 하나)에 응시하였고, 벼슬은 첨의찬성 우문관 대제학(僉議贊成右文館大提學)이었으며, 시호는 문효(文孝)이고, 본조에서 한산군(韓山君)으로 추증되었다. 이색(李穡) 장단(長湍) 조에 있다. 이종학(李種學) 개성(開城) 조에 있다. 이개(李塏) 과천(果川) 조에 있다. 이자(李耔) 충주(忠州) 조에 있다.

 

[주D-001]증점(曾點)의……있으며 : 증점이 읊으며 돌아간다는 고사는 전에 주석되었다. 광(狂)이란 것은 뜻은 매우 높으나 행실은 따르지 못한다 하여 증점(曾點)을 광자(狂者)라 하였다.
[주D-002]유하혜(柳下惠)의……없었다 : 《맹자》에 “유하혜(柳下惠)는 성(聖)의 화(和)한 이라.” 하였고, 또 “유하혜는 불공하다.” 하였다. 화(和)는 장점이요 불공(不恭)은 단점이다.
[주D-003]국가에서는 시귀(蓍龜) : 이 일절(一節)은 목은(牧隱)이 지은 글에 있는 말인데, 작자가 그 말을 인용하여 목은에게 전용하였다.
[주D-004]대책(對策) : 과거문(科擧文)의 일종(一種)인데, 임금이 책문(策問)을 내면 응시자(應試者)는 그 문제에 대답하는 글[策]을 지어 바친다.
[주D-005]독권관(讀券官) : 과거 응시자(應試者)의 답안(答案)을 읽는 고시관(考試官)이다.
[주D-006]사씨(謝氏) 집……가득하다 : 사영운(謝靈運)과 사혜련(謝惠連)은 종형제간으로 모두 시를 잘하였는데, 영운이 혜련을 꿈에 보고, “지당에 봄풀이 났다[池塘生春草]”라는 아름다운 시구(詩句)를 얻었다 한다.
[주D-007]거주하는……섞였네 : 불교가 중세(中世)에 와서 교(敎)와 선(禪)으로 나누어졌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경(經)을 배우는 것을 교(敎)라 하고, 참선(參禪)하는 것을 선(禪)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