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혼상제집 ▒

관례(冠禮)의凡節.

천하한량 2007. 5. 30. 00:48
 

관례(冠禮)의凡節.


  《 관례/冠禮 / 계례/戒禮

관례는 어린이에게 성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형식화하기 위해서 관건(冠巾)을 씌우는 의식이다. 여자의 경우는 비녀를 꽂기 때문에 계례(戒禮)라고 한다. 남녀가 지금까지 땋아 내렸던 머리를 올려서 남자는 상투를, 여자는 낭자를 틀어 올린다.

이 의식은 중국에서 전래된 것인데 중국에서도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확실한 기록이 없다. 주자(朱子)도 관례 · 혼례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모른다고 했고 예기소(禮記疏)에서도 관례의 기원에 관한 정문(正文)은 없고, 전하는 말로는 황제(黃帝)가 유면(旒冕)을 처음 만들었는데 황제 이전까지는 깃(羽)이나 가죽(皮)으로 관을 만들었고 포백의 관은 그 이후부터라고 한다. 관례에서 관건을 쓰는 것이 가장 중요한 형식이기 때문에 황제가 면류관을 만들었으니 그 후부터라고 추정하는 것이다.

중국의 예서(禮書)에서는 관례를 사례(四禮)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의식으로 여겼었다. '부례시어관(夫禮始於冠) 본어혼(本於昏) 중어상제운운(重於喪祭云云)'은 이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러나 혼례의 경우는 양가의 행사이지만 관례는 '자가의 이사(裏事)'이기 때문에 간이(簡易)하게 치룰 수 있는 의식이라고 해서 소홀히 여기는 경향도 있었다. 사례중에서 관례가 소멸되어 삼례만이 남게 된 연유는 그 발상지인 중국에서 이미 싹터 온 것이라고 생각된다.

관례(冠禮) 는 인생 일대에서 정녕 중요한 의식임엔 틀림없다. 무당의 경우 입무(入巫) 전엔 보통의 인간에 지나지 않으나 입무 후엔 신과 교섭할 수 있는 비상인이 되어 입무 전과 그 후의 인간이 확연히 달라지는 것이다. 왕위에 오르기 전의 사람과 즉위한 후의 사람이 다르다. 요사이의 신부나 목사가 되기 위해서 거치는 의식(서품 혹은 목사 안수)도 역시 그렇다.

이와 같은 의식을 거친 후에 갖고 누리게 되는 권한 · 위엄 · 사명 등이 의식 이전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관례도 그 축사의 '기이유지(棄爾幼志) 순이성덕(順爾成德)'과 같이 젖비린내나는 어린이에게 어엿한 성인이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관례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성인이 되는 시기, 곧 생리적인 전환기에 베푸는 것이 상례이다. 그 시기가 15세 전후가 된다. 중국에서도 '남자년십오지이십개가관(男子年十五至二十皆可冠)'이라고 했다. 열 다섯 살이 지나야 효경 · 논어 등에 능통하고, 예의를 알게 된 연후에 관례를 하는 것이 가하다는 것이었다. 여자도 15세가 되면 허혼이 안되었더라도계례(戒禮) 를 해야 한다. 그런데 조선조 후반기부터는 조혼의 풍조가 일면서 10세 전후에 관례를 행한 경우가 많았다.

조선조에서도 관례가 사례 중의 가장 중요한 행사로 인식되었고 왕실이나 사대부층에서는 엄숙 · 복잡한 의식을 거행했었다. 관례는 우선 덕망과 학식이 높은 분을 빈으로 모시고 거행하는 데 본격적인 의식은 삼가례(三加禮)이다. 즉 초가(初加) · 재가(再加) · 삼가(三加)의 절차를 밟는다. 초가에서는 수관자(受冠者)가 머리를 틀어 올린 쌍계(雙**, 쌍상투)을 합해서 하나로 쪽지고 망건에 관을 씌운다. 옷은 입고 있던 삼규삼을 벗기고 심의(深依)를 입힌다. 재가에서는 초가에서 쓴 관건을 벗기고 사모(紗帽)를 씌우고 심의 대신에 조삼(**衫)을 입히고 가죽띠를 띠고 계혜(繫鞋)를 신긴다. 삼가에서는 복두(**頭)를 씌우고 난삼(**衫)에 띠를 띠고 신을 신긴다.

이 삼가의 의식은 일정한 격식에 따라 엄숙하게 진행된다. 세 번 다 빈이 '금월길일(今月吉日)에 시가원복(始加元服) 하나니 기이유지(棄爾幼志)하고 순이성덕(順爾成德)하라'는 축사를 낭독한다. 삼가례가 끝나면 사당에 고하고 어른들에게 차례로 인사한다. 그리고 잔치가 벌어지는 것이다.

여자의 계례도 대개 관례와 대동하나 주인이나 빈을 모두 여자가 맡아서 한다. 여자 15세가 되면 약혼을 하지 않았어도 계례는 받았으나 대개는 결혼 직전에 약식으로 머리를 올렸던 것이다.

관례의 의식이 복잡하고 또 삼가시의 복식의 삼중적인 부담―경제적으로 큰 부담이다―은 현실적으로 이행하기 힘든 데가 많다. 그래서 약식이 유행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관건의 경우는 망건 · 복건 · 초립을 한꺼번에 중대(重戴)함으로써 삼가를 대신했고 예복은 관복이나 도포 · 심의 그렇지 않으면 두루마기든지 있는 대로 하나만 착용했었다. 그리고 삼가의 예도 당색(黨色) · 지방 · 개인의 고집 등으로 다양했던 것으로 전한다. 고로(70세 이상)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초가에 복건 · 심의, 재가에 사모 · 관대, 삼가에 초립 · 도포를 착용했다고 하는가 하면 어떤 노인은 초가에 복건 · 심의, 재가에 복두 · 난삼, 삼가에 사모 · 관대를 착용했다고 하고 부언하기를 초가는 성인을, 재가는 진사를, 삼가는 벼슬(3품 이상)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했다.

관례는 '자가의 이사(裏事)'이기에 간이화의 가능성이 있고, 복잡하기 때문에 약식화하기 쉽다. 또 왕실에서는 세자책봉으로 일반가정에서는 결혼의 전제적 행사로서 행하게 되면서 독립적 의식에서 종속적 의식으로 전환될 가능성도 많았다. 또 사실이 그러했다.

본고의 시기제한은 1592∼1863년까지이다. 이제 『조선왕조실록』을 중심으로 관례의 변모과정을 조감하려 한다. 이 시기는 임진 · 병자의 양란과 숙 · 영 · 정의 태평연월이 계속된 때이므로 난시에는 약식, 태평시에는 사치(특히 혼례)가 유행하여 식자들의 비판을 많이 받았었다. 그러나 관례에서는 그다지 시끄럽지 않았던 것 같다. 다음에서 시대순으로 그 자료를 정리해 보겠다.

① 광해군조에서는 관례에 관한 기록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예조에서 '세자책봉에는 관례를 행할 것 없이 오직 동계(童**)에 편복(便服)을 입는 것이 좋겠다'고 계청하고 이에 관해 논의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인조조에 와서는 이와 반대로 왕세자 책봉 전에는 반드시 관례를 행해야 한다고 예조에서 계청했던 것이다.

② '왕은 원자의 관례를 경현당(景賢堂)에서 행했다'고 기록되었다. 『왕조실록』을 보면 관례의 의식은 보통 인정전에서 행하고 왕이 하례를 받게 되어 있다. 그런데 효종은 선정당에서 왕세자의 관례를 받았고 관례 후에는 왕세자가 왕대비와 왕비를 뵈었다는 기록이 있다.

왕실의 관례가 논의와 실천에서 꾸준히 거론된 것은 현종조이다. 현종 10년(1669) 정월에 좌참찬이 '왕세자의 관례는 복길원월(卜吉元月)에 행할 것'을 계청했으나 왕은 이를 불허했고, 또 왕세자의 입학 · 관례는 반드시 봄, 가을에 해야할 필요는 없다. 이는 조종조에도 그런 예가 있다고 하여 왕은 가을은 음이니 명춘(明春)에 행하도록 하라고 명한 일이 있다. 그래서 과연 이 익년 봄에 관례를 행했던 것이다. '왕은 인정전에 나가 왕자의 관례를 행했는데 빈(賓)은 좌의정, 찬(贊)은 예조판서, 사(師)엔 영의정을 각각 임명했다'(중국의 예서(禮書)에는 보통 정월에서 택일하여 관례의 의식을 거행한다고 했다).

다음은 관례의 연령이 문제가 되었다. 왕자를 세자로 책봉하려면 관례를 먼저 거쳐야 하겠기에 15세 미달일 때에도 관례를 해야할 경우가 있게 되었다. 그래서 예조에서는 왕세자 관례는 12∼15세에 행할 것을 계청했으나 왕은 8세의 옛 예가 있다고 불허한 일이 있다. 현종 11년 3월에 행한 왕세자도 당시 13세였었다. 이와 같이 관례의 연령이 자주 문제가 되자 영조는 왕세자는 10세에 관례를 행한다는 것을 제도로 정했던 것이다.

왕실에서의 이 조기 관례가 사대부나 일반 백성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15세 이전인 7∼8세에 관례를 행하고 곧 결혼하는 조혼이 유행하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사대부층에서도 아예 관례를 폐해 버리는 일도 많았었다. 영조는 '요새 사대부들이 혼일에 납폐하고 친영은 하지도 않고 관례도 역시 많이 폐하여 행하지 않는 것은 불가하다. 그래서 특히 하교하여 신칙한 일이 있었다.

사실 병자호란 이후부터 차츰 청(淸)의 풍속이 유입하였으리라고 생각되는데 그 중 관례에 큰 동요를 일으키게 한 것은 청인들의 변발속(髮俗)이다. 이 외인들의 풍속이 조선인에게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관례란 땋아 늘어뜨린 머리를 말아서 올리는 형식이 가장 중요한데 변발로도 행세할 수 있다면 구태여 까다로운 절차를 거켜서 관례를 행할 필요가 없겠기 때문이다. '반백의 노총각이 머리를 땋아 느린채 돌아다니며 인심을 광혹하는 자가 많다니 한심합니다. 왕은 명을 내려 수발(收髮)하지 않은 자를 중히 다스리십시오'라고 한 것은 변발속의 유행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관례가 왕실에서는 왕자 책봉이나 가례의 선행적인 행사로 인식되고 일반 민가에서도 결혼시키기 위해 약식으로나마 관례를 해야한다는 풍조는 조만간에 의식이 소멸될 운명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개화기에 접어들면서 차츰 쇠퇴해 가는 관례는 이미 영조 때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여 그 전조를 보여 주고 있다. 약혼식의 유행은 관례나 계례를 밀어버렸고 삭발속(削髮俗)은 관례의 형식을 송두리채 뽑아버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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