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秋夕)
- 음력 팔월 보름을 추석(秋夕), 한가위, 가배일(嘉俳日), 가윗날, 중추절이라 한다. 설날과 함께 큰 명절로 친다.
- 가윗날은 한국의 고유한 명절로 신라시대부터 인식되어 왔다. 고려시대에는 9대 명절 중에 하나였고 조선시대에는 설날[正朝], 한식(寒食), 단오(端午), 추석(秋夕), 이에 동지(冬至)를 더하여 오대 명절 중에 하나였지만 오늘날에는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 할 만하다.
- 설날과 정월 대보름날이 한해의 풍년과 평강을 기원하는 예축적(豫祝的)의례라면 추석은 한 해 농사와 추수에 감사드리는 경축적(慶祝的) 의례라 하겠다.
- 추석 - 추석이라는 말은《예기(禮記)》의 '조춘일(朝春日) 추석월(秋夕月)'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중추절(仲秋節)이라 하는 것도 가을을 초추·중추·종추 3달로 나누어 음력 8월이 중간에 들었으므로 붙은 이름이다.
- 가윗날 - 우리의 고유명절로 추석은 '가윗날'이라 부르는데 이는 신라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三國史記)》유리이사금 조에 의하면, 왕이 신라를 6부로 나누었는데 왕녀 2인이 각 부의 여자들을 통솔하여 무리를 만들고 7월 16일부터 매일 일찍 모여서 길쌈, 적마(積麻)를 늦도록 하였다. 8월 15일에 이르러서는 그 성과의 많고 적음을 살펴 진 쪽에서 술과 음식을 내놓아 승자를 축하하고 가무를 하며 각종 놀이를 하였는데 이것을 가배(嘉俳)라 하였다. 이 때 부른 노래가 슬프고 아름다워 회소곡(會蘇曲)이라 하였는데, 이 행사를 가배라 부른 것은 여러 의미가 있다. 가배의 어원은 '가운데'라는 뜻을 지닌 것으로 본다. 즉 음력 8월 15일은 대표적인 우리의 만월 명절이므로 이것을 뜻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다음은 진 편에서 이긴 편에게 잔치를 베풀게 되므로 '갚는다'는 뜻에서 나왔을 것으로도 유추된다.
- 아직 모계 사회에서의 다수의 여인들 모임은 떠났던 남자들이 여자를 되찾는 계기도 되었을 것이므로 놀이는 단순한 것이 아닐 수도 있었다고 해석해 볼 수도 있다.
- 고려시대에 나온 노래인 《동동》에도 이 날을 가배라 적었음을 보아 이 명칭은 지속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가윗날이 신라 이래 국속으로 지속되었음은 중국에서 나온 《수서(隋書)》 동이전 신라 조에 임금이 이 날 음악을 베풀고 신하들로 하여금 활을 쏘게 하여 상으로 말과 천을 내렸다고 하였으며, 《구당서(舊唐書)》 동이전에도 신라국에서는 8월 15일을 중히 여겨 음악을 베풀고 잔치를 열었으며 신하들이 활쏘기 대회를 하였다고 쓰여 있다.
- 추석 때가 되면 농사일도 거의 끝나 갈 무렵이고 남쪽에서는 햇곡식을 먹을 수 있으니 풍년을 넉넉하게 즐길 수 있으며 과일도 풍성하고 덥고 춥지도 않아 즐길 만하다.
- 객지에 나돌던 식구들도 다 고향에 모인다. 온 식구가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한다. 막혔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이고 아이들이 가족 전체를 상봉(相逢)하며 가풍을 익히는 계기이기도 하다.
- 《농가월령가》에는 신도주(新稻酒)·오려송편·박나물·토란국 등을 이 때의 시식이라 노래했으며, 송이국·고지국도 영동 지방에서는 별식으로 먹는다. 이 때는 무엇보다 오곡이 풍성하므로 다양한 음식이 시절에 맞게 나온다.
- 반월 송편 - 《동국세시기》에는 송편·시루떡·인절미·밤단자를 시절음식으로 꼽았는데, 송편은 대표적인 추석음식이다. 전하는 말로는 송편을 예쁘게 잘 빚어야 시집을 잘 간다고 하여, 여성들은 예쁜 손자욱을 내며 반월형의 송편에 꿀·밤·깨·콩 등을 넣어 맛있게 쪄냈으며 이 때 솔잎을 깔아 맛으로만 먹은 것이 아니고 후각적 향기와 시각적인 멋도 즐겼다. 추석전날 송편을 잘 빚어 놓고 추석 차례의 여러 제수를 장만한다.
- 그런데 참으로 신비로운 것은 온달[滿月]이 뜨는 추석날에 왜 반달[半月] 모양의 송편을 빚었을까 하는 일이다. 너하나 나하나 만들어 온달을 이루고자하는 공동체 의식의 발로인가 아님 그 모양새가 반달 송편이 더 예쁘기 때문인가 좀더 연구해볼 만 하다.
- 차례 와 성묘 - 새옷 입고 새 곡식으로 떡도 하고 술도 빚어 조상님께 감사하다는 차례를 지냈다. 설날 차례가 떡국차례라면 추석 차례는 송편차례이다. 차례, 음복 후에 성묘(省墓)한다. 한국의 전통 4명절인 설날·한식·중추·동지에는 산소에 가서 제사를 지내는데 추석 차례 또한 조상을 기리는 추원보본(追遠報本) 행사이다.
- '올벼심미'라 하여 추석 무렵 감사하는 마음으로 잘 익은 곡식을 한줌 베어다가 안방이나 중방, 기둥에 걸어 놓고 다음해의 풍년을 기원한다. 호남지방에서는 그 해 난 올벼를 조상에게 천신(薦新)하는 제를 지내는데, 이를 '올벼심미'라 한다. 영남 지방에서도 '풋바심'이라 하여 채 익지 않은 곡식을 천신할 목적으로 벤다. 일부 가정에서는 새로 거둔 햅쌀을 성주(城主)단지에 새로 채워 넣으며 풍작을 감사하는 제를 지낸다.
- 조상의 묘를 찾아가는 길은 고향 산천을 몸으로 익히는 수련의 행로이기도 하며 처음 참여하는 어린애들에게 조상들의 삶을 들려주는 역사 시간이기도 하다.
- 반보기,
온보기 - 가윗날에는 농사일로 바빴던 일가친척이 서로 만나 하루를 즐기는데, 특히 시집간 딸이 친정어머니와 중간 지점에서 만나 반나절을 함께 회포를 풀고 가져온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즐기는 것을 중로상봉(中路相逢), 즉 반보기라 한다. 속담에 '근친길이 으뜸이고 화전길 삼짇날이 버금이다'라고 할 정도로 추석을 전후하여 반보기가 아닌 '온보기'로 하루 동안 친정나들이를 하는 것은 여성들에게 큰 기쁨이며 희망이다.
- '더도 덜도 말고 늘 가윗날만 같아라'라고 《열양세시기》에 언급했듯이 천고마비의 좋은 절기에 새 곡식과 햇과일이 나와 만물이 풍성하며, '5월 농부, 8월 신선'이라는 말이 실감된다. 가족 상봉과 결실의 기쁨이 이러한 속담을 만들었다.
- 중국과 일본의 추석 - 중국에서도 추석날에는 달 모양의 월병(月餠)을 만들어 조상에게 바치고 달을 감상하며 시를 짓는다. 중국속담에 ‘매봉중추(每逢中秋) 배사월병(倍思月餠)’ 이라 하여 매번 중추날에는 더욱 월병 생각이 난다는 것이다. 우리의 반달 모양 송편과 달리 보름달 모양의 월병은 이미 원(元)나라 때 만들어졌는데, 월병으로 시식을 삼고 또한 달을 감상하는 상월(賞月) 행사로 추석날을 보낸다. 이러한 풍습은 일본의 경우도 비슷한데, 동양 3국 가운데 우리 민족만이 이 날을 민족적인 대명절로 여기는 것은 우리 민족과 달의 깊은 유감에 기인하다.
- 전국적으로는 다양한 놀이가 전승되는데 호남 남해안 일대에서 행하는 강강술래와 전국적인 소먹이 놀이·소싸움·닭싸움·거북놀이 등은 농작의 풍년을 축하하는 의미가 있으며, 의성 지방의 가마싸움도 이 때 한다.
- 추석날 밤에 곱게 단장한 마을 부녀자들이 수십 명씩 모여 서로 손잡고 둥들게 원을 그리며 뛰노는 민족 전래의 놀이다.
- 명칭은 '강강술래'가 일반적이나, 시작할 때의 진양조로 느리게 노래를 부를 때는 강강수월래로 발음된다.
- 유래는 임진왜란 때 충무공이 마을 사람들의 기운을 북돋우기 위하여 마련했다고 한다. 한자어로 '강강수월래(强羌水越來)'라고 표기하고, '강한 오랑캐가 물을 건너온다.'는 해석은 바로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래서인지 강강수월래는 호남지방에서도 남해안 쪽에서 성행한다.
- 남자가 끼여 들 수 없는 강강수월래는 시집간 사람들이 처녀들과 패를 나누어 따로 하기도 하지만 함께 어울리기도 한다.
- 목청 좋은 사람이 선창하면 나머지 사람들이 "강강수월래"하면서 손잡은 채 옆으로 게 걸음으로 뛰면서 다음 선창을 기다린다.
- 처음에는 진양조로 느리게 춤추다가 차츰 빨라지면서 중머리, 중중머리, 자진머리로 변하고 선도자의 능력에 따라 여러 변화를 꾀하다가 다들 지치면 끝난다.
- 경상도 지방의 "쾌지나칭칭 나네"도 부락 사람들이 참여하는 놀이인데 역시 유래가 임진왜란에 있다고 한다.
- 남성들의 농악놀이와 여성들의 강강수월래 놀이를 통해 우리 조상들의 강한 공동체 의식과 멋들어진 풍류를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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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의 유래와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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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은 우리 나라 4대 명절의 하나로 한가위, 중추절(仲秋節) 또는 중추가절(仲秋佳節)이라고 한다.
한가위의 한은 '하다(大·正)'의 관형사형이고, 가위란 '가배(嘉俳)'를 의미한다. 이때 가배란 '가부·가뷔'의 음역(音譯)으로서 '가운데'란 뜻인데, 지금도 신라의 고토(故土)인 영남 지방에서는 '가운데'를 '가분데'라 하며, '가위'를 '가부', '가윗날'을 '가붓날'이라고 한다. 또 8월 초하루에서 보름께까지 부는 바람을 "8월 가부새 바람 분다"라고 한다. 이로써 미루어 볼 때 가뷔·가부는 뒷날 가위로 속전(俗轉)된 것으로 알 수 있으니, '추워서'를 현재에도 '추버서'로 하는 것에서도 이를 짐 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한가위란 8월 중에서도 정(正)가운데란 뜻이니, 정중심(正中心)을 우리가 '한가분데' 또는 '한가운데'라고 하듯이 '한'은 제일(第一), 큰(大)의 뜻 이외에도 한(正)의 뜻이 있 음도 알 수 있다.
한가위를 추석, 중추절(仲秋節·中秋節) 또는 중추가절(仲秋佳節)이라 한 것은 훨씬 후대에 와서 생긴 것이다. 즉 한자가 전래되어 한자 사용이 성행했을 때 중국 사람들이 '중추(中秋)'니 '추중(秋中)'이니 하고, '칠석(七夕)'이니 '월석(月夕)'이니 하는 말들을 본받아 이 말들을 따서 합하여 중추(中秋)의 추(秋)와 월석(月夕)의 석(夕)을 따서 추석(秋夕)이라 한 것으로 생각된다. 8월 15일 을 '가위'라고 하고 '추석'이라고도 함은 고전 문학에서도 보이는데, 고려 때 가요인 '동동(動動)'에 서는 "8月 보로 아으 嘉俳나리마 니믈 뫼셔녀곤 오 날 嘉俳샷다 아으 動動다리"라 하고, 조 선조 때의 가사인 사친가(思親歌)에는 "8月 秋夕日에 백곡이 풍등하니 落葉이 秋聲이라 무정한 節序들은 해마다 돌이오네 여기저기 곳곳마다 伐草香花하는구나(中略) 슬프도다 우리부모 추석인 줄 모르시나"라고 되어 있음을 보아 '가위'란 말보다 '추석'이란 말이 훨씬 후대에 와서 사용된 것 임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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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의 유래는 지금부터 약 2천년전 유리왕때 부터 라고 한다.
유리왕은 백성들이 기쁜 마음으로 즐겁게 살기를 바라는 '도솔가'를 지어 부르게 하였고,여러가지 산업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가 일으킨 산업의 한가지로 유명한 것은 길쌈이었다.
유리왕은 길쌈 장려를 위해 6부의 부녀자들에게 내기를 시켰다.우선 6부의 모든 부녀자들을 두패로 나누고 궁중의 왕녀 두 사람을 뽑아 두 패를 각각 거느리게 한 다음 해마다 7월부터 한달동안 베를 짜게 하고 8월 보름이 되면어느 편이 더 많이 짰는지를 심판하였다.그래서 7월이 되면 부녀자들은 두 왕녀의 응원을 받으며 열심히 베를 짜기 시작했고, 임금이 지어준 도솔가를 흥얼거리면서 밤을 낮삼아 열심히 짜다보면 8월 보름은 금새 닥치는 듯 하고 마침내는 저마다 마음을 졸이며 그 동안 짜 놓은 베를 가지고 내기 장소에 나왔다.
유리왕과 왕비를 비롯한 궁중의 관리들이 나와 유리왕이 판결을 내리면 이긴 편에서는 환성을 지르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고, 진 편에서는 그 동안 별미 음식을 마련하여 이긴 편을 대접하였다.
맛있는 송편, 기름에 지진 고기, 전 등 갖가지 별식과 밤, 대추, 머루, 다래, 배 등이 푸짐하게 마련되면 양편은 모두 둥그런 원을 그리며 둘러앉아 함께 먹으며 노래와 춤을 즐겼다.어두워지면 하늘에는 둥근달이 떠오르고 갖가지 놀이를 하면서 즐거운 밤을 보냈다.서라벌에서는 이 날 8월 15일을 가배라 일컬었는데 이것이 '한가위'라는 신라의 큰 명절이 되어 계속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오늘날 추석은 한해동안 농사한 햇곡식과 햇과일로 조상님께 감사하는 차례를 지내고,달맞이를 하면서 여러 민속놀이를 즐기는데 이러한 우리 나라의 풍습을 다루어 봄으로써 전통문화를 자연스럽게 익혀 나갈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으며, 조상의 얼과 문화가 계승되고, 우리나라에 대한 애착심도 싹트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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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는 고대사회에서부터 있었던 만월의 명절이다.
달의 고마움에 감사하고 달을 위했으며 떡을 해도 달떡을 했다. 달을 의식하는데 있어 중국에서는 만월을 상징하는 월형의 월병을 만들었으나 우리는 송편이라 해서 반월형의 떡을 했다.
얼을 숭상하여 달에게 소원을 비는 민간신앙을 가지면서 반월을 채택한 것은 반월이 일일성하므로 발전의 상징으로 본데서 온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고대의 도성명에 반월성이 많은 것으로도 증명이 된다.
둘째는 만월야를 계기로 사람이 신에게 대한 제의가 있었다. 올게심니를 해서 풍년에 감사하고 또 명년의 풍작을 기대했으며 밭고랑을 기는 행위도 소박한 기풍행위의 하나이다. 농경민족의 최대소원은 풍작을 이루는 일이기에 한가위를 기해서 신에게 청하고 감사했다.
세째는 오락을 풍성하게 했다. 풍작의 소원을 이루었고 포식하고 나니 할일은 놀이를 즐기는 일이다.
농부들에 의해서 소놀이, 거북놀이,농악, 씨름이 행해지고 부녀자들에 의해, 강강술래, 학동들에 의해서 원놀이, 가마싸움등의 놀이가 흥겹게 있었다. 이러한 놀이는 만월과 풍작을 즐기는 축제이기도 했다.
네째, 한가위는 혈연간의 화목을 확인하고 추원보본의 실천의 계기가 되었다.
분산되어 사는 혈연들이 집결해서 협동하고 화목하며 같은 조상의 제의에 참여하는 기쁨이 있었다. 효란 인간원래의 일이지만 명절을 맞이해서 천신하고 명전에 경건하게 절하므로 은혜를 생각하고 보답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귀성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유교가 들어와 생활화됨에 따라 강조된 것이라 믿어진다.
한가위를 명절로 여기는 민속은 외래적인 것이 아니라 고대사회에 있어 달고 관련있는 것으로 전승되어 왔으며 농경시대에 들어와서 기풍예측 풍작에 감사하는 의식이 첨가되고 유교시대에 들어 추원보본하는 조상숭배 의식이 마련되었을 것이다. 추속 풍속은 현대 사회에 있어서도 의미를 갖는다.
산업사회가 가족의 분산을 초래하였으나 추석은 분산된 혈연이 집합하는 계기가 되고 따라서 혈연간의 협동과 화목을 다지는 핵의 구실을 하고 있다.
물질만능의 박정한 현대인들도 한가위가 되면 정이 솟아 친족에게의 선물과 조상에의 차례용의 제수감을 사들고 고향을 찾고 있다.여기에 우리 생활의 일명이 있어 좋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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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에 행해지는 세시풍속으로는 벌초·성묘·차례·소놀이·거북놀이·강강 수월래·원놀이·가마싸움·씨름·반보기·올게심니·밭고랑 기기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에서 대표적인 몇 가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추석에 조상의 무덤에 가서 여름 동안 무성하게 자란 잡초를 베어 주는데 이를 벌초라 한다. 옛날 조상의 묘를 풍수설에 의하여 명당에 쓰기 위하여 몇 십리 먼 곳에까지 가서 쓰는 수가 많았고, 또 묘를 쓴 다음 이사를 가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묘가 집 근처가 아니라 먼 곳에 있을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도 추석을 맞이하여서는 반드시 벌초를 하는 것이 자손의 효성의 표시와 도리로 여겼다. 한가위 때에 성묘를 와서 벌초를 안했으면 보기에도 흉할 뿐만 아 니라 불효의 자손을 두었거나 임자 없는 묘라 해서 남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추석 이른 아침에 사당을 모시고 있는 종가(宗家)에 모여 고조(高祖)까지의 차례를 지낸 다. 차례 지내는 절차가 설날과 다른 것은 흰떡국 대신 메[밥]를 쓰는 점이다. 조상에 대한 추원 보본(追遠報本)과 천신제(薦新祭)를 겸하였기 때문에 제물은 신곡으로 만들어 진열된다. 고조 이 상의 윗대는 10월에 시제라 해서 묘에서 제사를 지낸다.
강강술래가 어느 때 어떻게 하여 시작되었는지 그 유래에 대해서는 이렇다 하게 밝혀볼 수 없고 다만, 이 놀이가 꽤 오래 전에 발생한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고대 부족사회의 공동축제 등과 같은 모임 때 서로 손과 손을 맞잡고 뛰어 놀던 단순한 형태의 춤이 오늘날에 보이는 강강술래의 시원(始原)이 아닌가 생각된다. 강강술래는 또는 강강수월래 등으로 구전(口傳)되어 내려오는 강강술래 노래로 미루어, 강강술래놀이는 이미 원시 공동체 사회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추측하는 것이다. 훨씬 후, 이것이 임진왜란 때 충무공의 전술(戰術)과 결부되어 그 뜻이나 내용에 대한 폭이 넓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임진왜란 때의 충무공과 강강술래를 관련 지어 전해 오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명량(鳴梁) 바다에서 왜적을 무찌를 때 충무공이 거느린 전선(戰船)은 불과 12척밖에 없었고, 이에 비해 왜선(倭船)은 3백50여 척이나 되었다고 한다.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왜적과 맞서기 어렵게 되자 충무공은 아낙네들을 모아 군복을 입히고 수십 명씩 무리를 지어 산봉우리를 돌게하여, 멀리 떨어져 있는 왜적에게 마치 수만의 대군이 산 봉우리를 내려오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의병술(擬兵術)을 이용하여 왜적을 물리쳤다고 한다. 이때 아낙네들이 산봉우리를 돌면서 서로 손을 맞잡고 노래 부르며 춤을 추었던 것이 바로 강강술래의 비롯이라는 설이다.
이 놀이는 주로 한가윗날 밤에 놀았지만, 지방에 따라서는 정월 대보름밤을 비롯해서 봄 . 여름 가을 . 겨울 어느 때든지 달 밝은 밤에 수시로 놀아왔다. 또한 놀이꾼들도 여인네들에 국한하지 않고 남자들도 함께 어울려 놀기도 하였다.
추석날 차례를 마치고 난 뒤 알맞은 시간에 소놀이는 진행된다. 먼저 마을 사람들로 구 성된 농악대가 풍물을 울리면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상쇠의 선도에 따라 한바탕 신나게 풍물을 울리며 어우러져 놀다가 소놀이가 시작된다. 두 사람이 허리를 굽히고 그 위에 멍석을 뒤집어 씌우며 뒷사람은 큰 새끼줄로 꼬리를 달고, 앞사람은 막대기 두 개로 뿔을 만들어 소의 시늉을 한다. 소를 끌고 농악대와 마을 사람들은 그 마을에서 가장 부농집이나 그 해에 농사를 가장 잘 지은 사람의 집으로 찾아간다. 대문 앞에서 '소가 배가 고프고 구정물을 먹고 싶어 왔으니 달라'고 외치면 주인이 나와서 일행을 맞이한다.
소를 앞세우고 일행은 앞마당으로 들어가 농악을 치고 노래하고 춤추고 놀면 주인집에서는 술과 떡과 찬을 차려 대접한다. 마을 사람들은 한참 놀다가 다시 소를 끌고 다른 집으로 향한다. 이렇 게 여러 집을 찾아가 해가 질 때까지 어울려 논다. 소놀이를 할 때는 당년에 농사를 가장 잘 지은 집 머슴을 상머슴으로 뽑아 소등에 태우고 마을 을 돌며 시위하는 경우도 있다. 농사를 천하의 대본으로 여겨 온 농경 민족에게 있어 농사를 잘 지어 풍작을 거두게 하였다는 것은 큰 공이니 위로하고 포상하는 뜻에서 소에 태우는 영광을 주 는 것이다. 한번 상머슴으로 뽑히면 다음해 머슴 새경을 정할 때 우대를 받게 된다.
추석이 지난 다음 서로 만나고 싶은 사람들끼리 일자와 장소를 미리 정하고 만나는 것 을 반보기라 한다. 옛날에 시집간 여자들은 마음대로 친정 나들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모녀 사이에 중간 지점을 정해서 서로 즐기는 음식을 장만하여 만나 한나절 동안 그 동안 나누지 못했 던 회포를 푸는 것이 반보기인 것이다. 또 한 마을의 여인들이 이웃 마을의 여인들과 경치 좋은 곳에 집단으로 모여 우정을 두터이 하며 하루를 즐기는 수도 있다. 이 때에 각 마을의 소녀들도 단장하고 참여하게 되므로 자연스럽게 며느릿감을 선정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반보기란 중로 (中路)에서 상봉했으므로 회포를 다 풀지 못하고 반만 풀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추석을 전후해서 잘 익은 벼, 수수, 조 등 곡식의 이삭을 한 줌 베어다가 묶어 기둥 이나 대문 위에 걸어 두는데 이것을 올게심니라고 한다. 올게심니를 할 때에는 주찬(酒饌)을 차려 이웃을 청해서 주연을 베푸는 수도 있다. 올게심니한 곡식은 다음해에 씨로 쓰거나 떡을 해서 사 당에 천신하거나 터주에 올렸다가 먹는다. 올게심니를 하는 것은 다음해에 풍년이 들게 해 달라 는 기원의 뜻이다. 밭고랑 기기:전라남도 진도에서는 8월 14일 저녁에 아이들이 밭에 가서 발가벗고 자기 연령 수대로 밭고랑을 긴다. 이 때에 음식을 마련해서 밭둑에 놓고 하는 수도 있다. 이렇게 하면 그 아 이는 몸에 부스럼이 나지 않고 밭농사도 잘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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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급적 햇곡식, 햇과일을 이용하여 음식을 장만하고 메를대신하여 추석에는 송편을 쓰고 설에는 떡국을 쓴다. 그러나 반(뫼)갱(국)을 쓰는 가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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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설자의 왼편으로 부터 조(대추), 율(밤), 시(곶감), 이(배)의 순서로 진설하고 다음에 호두 혹은 망과류(넝쿨과일)을 쓰면 끝으로 조과류(다식, 산자, 약과) 및 양과류를 진설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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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색 과일을 동쪽 (참사자 우측), 흰색과일을 서쪽 (참사자 좌측)에 진설하고 그가운데 조과류인 다식, 산자, 야과 및 양과류 등을 진설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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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포우혜(左脯右醯)라하여 포(문어, 명태, 오징어등)를 왼편에, 식혜를 오른편에 진설하며 침채(김치,동치미등),숙채(불에 삶거나 쩌서 익힌 나물),청장(간장)을 가운데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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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동육서(어동육서)라하여 물고기 탕은 동쪽(우측), 육류탕은 서쪽(서측)에 진설하고 그가운데 채소, 두부등으로 만든 소탕을 진설하되 단탕, 삼탕 등 반드시 음수(홀수)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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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라함은 불에 굽거나 찐것을 말하며 전이라 함은 기름에 튀긴 것을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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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류를 동쪽(우측)에, 육류를 서쪽(좌측)에 진설하며, 그가운데 채소, 적과 전종유, 두부를 진설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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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류의 머리는 동쪽으로 꼬리는 서쪽으로 향하게 진설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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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은 외편에, 갱은 오른편에 면(국수)을 왼편에 편(떡)은 오른편에 진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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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가 상앞에서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분양을 뒤 두번 절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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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이하 모든 이들이 손을 모아 서있고 제주가 분향하고 술을 올린 후 두번 절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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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을 마친 후 제주 이하 모든 이들이두번 절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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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가 신위앞에 끓어앉아 분향한 후 집사자가 따르는 술을 받아제상에 올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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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그릇뚜껑을 열고 수저의 바닥이 동쪽을 향하게 꽂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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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들이 꿇어앉고 축관은 축문을 읽고 끝나면 제주는 두번 절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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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작.제주가 채워지지 않은 술잔에 술을 채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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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을 갱으로 바꾸고메를 3번 떠서 말아놓고 정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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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그릇에 있는 수저를 거두고 메그릇을 덮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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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자 일동이 두번 절하고 지방과 축문을 불태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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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의 규격은 폭이 6cm정도 길이가 22cm 정도가 좋으며 한지 (백지)를 사용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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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考位-아버지)를 왼쪽에 쓰고 비위(어머니)를 오른쪽에 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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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지방에서 현(顯)자를 고(故)자로 고쳐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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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의 지방에 미혼시에는 수재(秀才)라고 쓰고 기혼이 경우에는 학생(學生)이라고 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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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직위가 이었을 경우에는 학생學生대신 직급인 이사관 (理事官) 혹은 도지사(道知事)등 직위를 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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