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혼상제집 ▒

제관의 향사절차와 기타 자료

천하한량 2007. 5. 29. 23:58

제관의 향사절차

 1. 초헌관
    가. 전사감을 수지하고 찬인의 인도로 제상의 제수를 진설점시하고 환출한다.
    나. 찬인의 인도로 간세위 간세하고 신위전에 괴하여 상향례하고 전패례를 행한 후 강복위한다.
    다. 행 초헌례 - 찬인의 인도로 존소위 서향립하고 잠시 있다가 신실로 들어가 신위전에 괴하여 헌작하고 소퇴괴하면 대축이 독축문한 후에 강복위한다.
 2. 행 아헌례 : 아헌관은 찬인의 인도로 간세위 간세하고 신위전에 괴하여 헌작 한 후 강복위한다.
 3. 행 종헌례 : 종헌관은 아헌관과 동일하다.
 4. 전사감 : 초헌관을 배행하고 진설점시한다.
 5. 집례 : 향사의 절차를 창홀한다.
 6. 대축 : ①개독 점촉 전패 독축한다. ②폐독 음복 망예례를 행한다.
 7. 진설 : 제수를 제상에 차서대로 진설한다.
 8. 봉향 : 초헌관의 상향시 현관우축에 괴하여 향합을 헌관에게 올린다.
 9. 봉로 : 상향시에 헌관의 좌측에 괴하여 향로를 헌관에게 올린다.
10. 사준 : 신실문 우축 존소에 괴하여 삼헌시 주잔을 봉작에게 올린다.
11. 봉작 : 사준의 제주를 받아 헌관에게 올린다.
12. 전작 : 헌관의 잔을 받아 신위전에 올린다.
13. 찬인 : 제관을 인도하여 향사에 임한다.
14. 찬창 : 제관의 향사종료시 마다 복창하여 집례의 창홀을 도운다.
15. 학생 및 제 자손은 집례의 창홀에 따라 행한다.

 

 

주벽과 종향

사우와 서원에 신위를 모시는데 주벽과 종향(배향)이 있는데 봉안한 가운데 그 연대와 덕행, 훈적이 가장 중요한 인물을 주향으로 하고 그 다음으로 종향으로 한다. 
가령
사우가 삼간이면 중영 가운데 뒷벽을 등지고 모신데가 주벽이라 하고 동서(주향한 신위의 좌우)로 모신 것을 종향이라 한다. 본성만 모신 서원, 사우는 연대가 높으신 분 부터 차례로 모신다. 따라서 구고사는 휘 진문, 휘 조, 휘 완, 휘 여옥, 휘 여준 순으로 배향하고 있다.


이름에 대한 명칭 

아랫 사람은 이름이라 하고 웃 어른은 함자(啣字)라 하며 돌아가신 어른의 이름은 휘자(諱字)라 한다. 그리고 돌아가신 날은 휘일(諱日)이라 한다.


세(世)와 대(代) 

세는 자신을 포함한 숫자이며 대는 자신을 제외한 숫자임. 
- 예 : 증조는 자신의 3대조이고 자신은 증조의 4세손이다.
- 호(鎬)자 항렬은 중조(휘 익경)로 부터 22세손이며 시조대왕으로부터 72세손입니다.



묘표와 묘지

묘표는 (보통 표석이라고 한다) 죽은 사람의 관직 명호를 전면에 새기고 후면에는 사적을 서술하여 새기는데 이 후면에 새긴 글을 음기라고 한다. 묘지는 지석이라고도 하는데 죽은 사람의 원적, 성명, 사적 등을 돌에 새기거나 도판에 구어서 그 무덤(안)에 묻는 것이다.


신도비와 묘갈

신도비는 종2품이상 관원의 분묘가 있는 근처노변에 세우는 비석으로서 특히 이 비는 통정대부(당상관)이상의 벼슬을 지낸 사람이 찬술한다. 
묘갈은 정3품이하의 벼슬을 지낸이의 묘 앞에 세우는 것이다. 



예기에 자주 나오는 한자숙어 풀이 

1. 始祖(시조) : 한 씨족의 맨 처음되는 조상(할아버지)을 말함.
2. 中祖(중조) : 시조 이후 쇠퇴하였던 가문을 다시 일으킨 조상으로 종문의 공론에 의하여 설정한 조상을 말함.
3. 先系(선계) : 시조이후 중조 이전의 조상을 일컫는 말.
4. 世系(세계) : 시조로 부터 대대로 이어지는 계통의 차례를 말함.
5. 宗家(종가) : 본 종의 근본이 되는 집(큰집)  ※宗廟(종묘) : 역대의 신주를 모시는 왕실의 사당.
6. 生(생)과 卒(졸) : 生은 낳으신 날이며, 卒은 돌아가신 날임.
7. 配(배)와 室(실) : 配는 돌아가신 부인(처)이며, 室은 살아계신부인(처)임.
8. 石物(석물)은 表石(표석), 床石(상석), 望柱石(망주석),碑石(비석)등을 말함.
9. 合葬(합장)은 合 (합폄), 附(부), 雙墳(쌍분), 上·下葬(상,하장)등을 말함

 

 

보학상식 : 행(行)과 수(守)

행(行)과 수(守) 족보를 보면 여러 가지 관직이 나오는데 관직의 정식 명칭은 계, 사, 직(階,司,職)의 순서로 되어있다. 이를 테면 영의정일 경우 대광보국 숭록대부는 계이고, 의정부는 사이며, 영의정은 직이 된다.곧 계는 품계요, 사는 소속관청이며, 직은 직위를 말한다. 그런데 “행, 수, 법” 이라는 것이 있어서 품계가 높으면서 관직이 낮은 경우 계비직고에는 행이라고 하고 반대로 품계는 낮은데 관직이 높은 경우 계비직고에는 수라하여 소속 관청의 명칭앞에 “행” 또는 “수”자를 붙이게 되어 있다.보기를 들면, 종일품인 숭정대부 품계를 가진 사람이 정이품직인 이조판서가 되면 숭정대부행(行) 이조판서라 하고 반대로 종이품인 가선대부의 품계를 가진 사람이 정이품직인 대제학이 되면 가선대부 수(守) 홍문관 대제학이라한다.또한 고려말에서 조선조 초의 인물에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이니 검교정승(檢校政丞)이니 하여 “검교”란 용어가 많이 눈에 띄는데 이는 실제의 직책은 맡지 않은 임시직 또는 명예직을 말한다. 




기제 (忌祭)

양위가 다 별세 하였더라도 한분만 제사 하는 것은 단설이며, 양위가 다 별세 하였을시 양위를 함께 제사 하는 것은 합설이라 한다. 양위 합설시는 고위는 서편에 모시게 되니 산 사람(제관)의 좌편이 신도의 “서”가 되기 때문이다.제수는 가급적 고추가루, 마늘을 쓰지 않은 것이 좋으며 신도(神道)는 음계(陰界)이므로 음시(陰時)인 밤 시간에 행사(行祀)하는 것이 적당하며, 기제는 돌아가신 날을 추모하는 뜻이 있기 때문에 기일과는 하등의 상관없이 자신의 편의만을 위하여 적당한 날을 정하여 제사하는 것은 별의미가 없다. 사망전날은 입제일이요, 별세한 날이 기일인 것이다.신도는 무형무적(無形無跡)의 발신여신재(發神如神在)의 감응(感應)에서 존모(尊慕)한 마음이 유연자생(攸然自生) 할 것이니 반드시 신주(神主)나 지방(紙榜)으로서 제사 할것이며 지방은 돌아가신 신위를 대신 하는 것이므로 지방을 쓸때는 정중한 마음가짐으로 깨끗한 한지에 작고 하신분의 호칭과 관직을 먹으로 쓰되 가로6cm 세로20cm 정도로 한다.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모실때는 참신이 먼저이고 다음 강신이며 지방(紙榜)일 경우 강신이 먼저인 것이 순서이다.예문에 재불분향(再不焚香)이라 하여 분향은 강신에만 한다.
 


참제자가 알아야 할 예법

절하는 법오른손으로 왼손 엄지손가락을 잡고서 절 한다.·층계를 오르내리는 법동쪽 층계 혹은 중앙 층계를 올라갈 때는 오른발을 먼저 내고 내려올 때는 왼발을 먼저 내딛는다. 다시 말하면 층계를 올라갈 때는 오른발을 한 층계 올리며 다음 또 오른발을 한 층계 올린 후 왼발을 올려서 이에 모아 걷는다.·전각문을 출입하는 법동문 혹은 정문으로 들어갈 때는 오른발을 먼저 내고 나올 때는 왼발을 먼저 내딛는다. 入東門則先右足 出西門則先左足·꿇어 앉는 법꿇어 앉을때는 왼발을 먼저 굽히고 일어설때는 오른발을 먼저 편다.·전각안에서 몸 가지는 법묘중에서는 단정하게 두손을 모으고 걸어야 하며 활개를 펼쳐서는 안된다. 그리고 신위 앞에서 서거나 지나갈때는 반드시 국궁(鞠躬)한다.·제물을 드리는 법진설, 철상, 봉작 그리고 전작을 할 때에는 머리를 굽으리고 가슴 높이와 같이하여 받는다.·받들어 올리는 법폐백, 술잔, 향, 향로를 현관에게 받들어 올릴 때 서있는 자에 대해서는 서서전하고 앉은자에 대해서는 앉아서 전한다.·홀(笏)을 잡는 법오른 손의 엄지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을 안으로 하고 나머지 세손가락을 밖으로 하여 홀을 잡고 한편 왼손의 엄지 손가락은 안으로 하고 다른 네손가락은 밖으로 하여 오른손으로 덮어 싼다.앉을때는 가슴에 대고 설 대는 배꼽에 댄다. 


벼슬 (관직)에 관한 상식

문반(文班)의 벼슬자리는 크게 내직(內職)과 외직(外職)으로 구분된다. 내직은 중앙 각 기관의 관직이며 외직은 관찰사(觀察使), 부윤(府尹),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판관(判官), 현감(縣監), 찰방(察訪)등의 지방관직을 말한다. 족보를 보면 높은 벼슬을 지낸 문신(文臣)들 중에는 호당(湖堂)을 거친 이가 많다. 호당이란 독서당의 별칭으로서 세종때 젊고 유능한 문신을 뽑아 이들에게 은가(恩假)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한데서 비롯된 제도로서 이를 사가독서라 하였다. 문과를 거친 대신이라도 반드시 호당출신이라야만 육형(六衡)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이 주워졌다. 문형이란 대제학의 별칭인데 문형의 칭호를 얻으려면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 그리고 성균관의 대사성을 겸직해야만 했다. 문형은 삼관(三館, 홍문관, 예문관, 성균관)의 최고 책임자로서 관학계(官學界)를 공식적으로 대표하는 직이므로 더 할 수 없는 명예로 여겼다. 품계는 판서급인 정이품이 었지만 명예로는 삼공(三公,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나 육경(六卿, 육조판서)보다 위로 쳤다. 역사상 최연소 기록을 세운이는 한음(漢蔭) 이덕형(李德馨)인데 그는 20세에 문과에 올라 23세에 호당, 31세에 문형이 되었으며, 38세에 우의정, 42세에 영의정에 올랐다.

 ■ 대원군 (大院君)
왕의 대를 이을 적자손이 없어 방계 친족이 왕의 대통을 이어 받을때 그 왕의 친부(상부)에게 주는 직임

 ■ 부원군 (府院君)
의 장인 또는 일등공신에게 주던 칭호로서 받은 사람의 관지명(貫地名)을 앞에 붙인다. (예: 해은 부원군)

 ■ 원상 (院相)
왕이 승하하면 잠시 정부를 맡던 임시직, 신왕이 즉위하였으나 상중이므로 졸곡까지와, 혹은 왕이 어려서 정무의 능력이 없을때 대비의 섭정과 함께 중망이 있는 원로 재상급, 또는 원임자(原任者)중에서 몇분의 원상을 뽑아 국사를 처리케한 것

 ■ 제수 (除授)
벼슬을 내릴때에 일정한 추천절차를 밟지 아니하고 왕이 직접 임명하거나 승진시키는 것 이를 제배(除拜)라고 한다.

 ■ 원종공신 (原從功臣)
각등공신이외에 소공(小功)이 있는자에게 주는 칭호

 

지석 (誌石)이란?

또는 벽돌에 고인의 신상관계를 새기거나 사기에 글을 써 유약을 바르고 구어 묘앞에 묻는것. 길이는 약 七치, 넓이는 약 三치, 두께는 약 二치반, 사기는 五푼에서 一치정도로 한다. 기재 요령은 앞면에 고인의 본관성명, 생졸년월일, 약력, 배우자명을 쓰고 뒤에는 상주를 쓴다. 기록방법은 양각(陽刻) 또는 음각(陰刻)으로 하며, 사기 지석에는 붓으로 써서 유약을 발라 굽는다. 사발을 이용할때에는 안쪽벽에다 써서 정으로 쪼아 먹을 먹이고 재를 채워 봉한 후 엎어 묻는다. 요즈음은 지문(誌文) 쓴 종이를 돌로 말아 흔한 음료수 병에 넣고 마개를 한다음 초로 밀봉하여 묻기도 한다. 이 지석은 실묘(失墓)를 않기 위하여 옛부터 지켜져오고 있다. 


제례상식

 ■ 고 이성 (告 利成)
 
고 이성이란 제사가 끝났음을 고하는 절차로서 축관은 초헌관 서편으로 나아가 동쪽(초헌관)을 향하여 정중하게 읍을 하고 “이성”이라고 큰소리로 보고한뒤 원위치로 돌아간다.

 ■ 신위 (神位)와 영정
신위라 함은 고인의 영혼, 즉 신을 모시는 곳을 말하는데 종래에는 지방만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으나 지금은 가정에서 영정(사진 또는 초상화)을 지방과 같이 모시고 지내고 있는 가정이 많다.

기제사의 본 뜻이 고인의 별세한 날을 추모하는 의식이라고 하였으니 그 추모하는 정을 더욱 실감있게 나타내기 위하여 생전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난 사진을 같이 모시는 것이 예법에 없다 하여 탓 할 것만은 아니다.

그러니 생전에 사진 한 장씩 찍어 두었다가 별세한 뒤에 상례의 영좌나 기제사시 지방과 같이 모시는 것도 무방할 것 같다.

옛날에는 중국에서 들어온 철저한 유교의식에 따라서 위호라고 하여 사대부가에서는 집집마다 사당을 짓고 역대 조상들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야 했으나 지금은 세속이 많이 달라지고 있다.

 

 ■ 제례수상 (祭禮隨想)


상례(喪禮)와 제례(祭禮)에는 말도 많고 형식절차도 가지각색이다. 옛날에는 이 논란으로 조정 정사가 어지러워졌고 학자와 선비들이 점잖치 못하게 좌당을 지어 생사를 걸은 싸움질까지 하였을 정도이다.

그러나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는 우리나라 사례(四禮)의 모체라는 점에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못하리라.

기제(忌祭)는 고인이 별세한 날에 해마다 한번씩 올리는 제사로서 고인의 추억을 더듬어 별세한 그 날을 깊이 잊지못하여 몸과 마음을 경건하게 하고 금기(禁忌)한다는 뜻에서 올리는 제사이며 그날을 기일(忌日) 또는 휘일(諱日) 이라고도 한다.

제반(祭飯)을 통칭 ‘메’라고 하는데 이 말은 인도 말이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불전(佛前)에 올린 밥을 ‘메’라고 해서 공통어가 된 것이며 일본에서 밥을 ‘메시’라하고 쌀을 ‘고메’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말이다.

  

녹훈백서
 
왕께서 말씀하시기를 ‘국가가 어려움을 제거하게 된 것은 실로 숙정(肅正)의 공에 힘입은 것이라. 이에 보답의 법을 시행하여 땅을 봉하고 이름을 더 하였으니 이는 옛일에 비추어도 부끄러움이 없고 영세토록 잊을수 없는 일이다. 오직 경(卿)은 만부(萬夫)를 제압하는 웅장한 마음을 지녔고 구정(九鼎: 禹王이 구주의 금을 모아 제조 하였다는 寶鼎)을 들어 올리는 큰 힘이 있었다. 이름이 호방(好枋:무과)에 올랐음에 일찍 버드나무 잎을 뚫는 활 재주를 발휘하였고 병법을 전공하여 항상 전장에서 죽어 돌아올 비장한 뜻을 품었다. 그러나 지위가 낮아 오래도록 사람의 아래에 있게 되었고 때를 만나지 못하여 진중에서 발탁되지 못하였는데 마침 내외의 어려운 시기를 당하여 변방의 방어 임무를 맡게 되었다. 간사한 마음과 반역의 행동은 당초 반정(反正)을 위하여 힘을 빌리는데 기인한 것인바 시돌(豕突:맷돼지 처럼 앞만보고 돌진함)과 봉둔(蜂屯)의 세력은 마침내 하늘을 향하여 활을 쏘고 반역을 하였다.

비록 기일을 정하여 토벌할 수 있는 작은 역적이었지만 불행하게도 열군(列郡)이 풍문을 듣고 무너져 만일 충용한 장사들의 호응이 아니었다면 누가 불의와 정의의 세력이 다름을 알 수 있었으랴. 격문을 정하여 군사들과 맹서 함에 모두들 왕명에 따를 것을 생각하였고 기회를 잡아 모두들 모여들어 먼저 적의 토벌에 힘을 썼었다. 왕이 피난하였다는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서로 쳐다보았고 위급한 도성을 구하기 위하여 앞장서 달려 갔었다. 원수의 지휘를 받아 광구(狂寇)의 세력을 꺾고 서도의 군사들이 드디어 북산을 점거하였었다. 심복이 패하고 가지가 무너짐에 유벽(劉闢:당나라 경남서천 절도사)이 한번의 싸움에서 혼백을 상하였고 고기가 흩어지고 새가 달아남에 주자(朱子)의 머리가 삼군에 전달 되었다. 경관(京觀:전쟁이 끝난 뒤 무공을 보이기 위하여 적의 시체로 무덤을 쌓은것)을 쌓았다는 보고에 행궁에 돌아왔으니 예나 변함없는 종묘의 모습 덕이 아니라면 어떻게 중흥을 이룩할 수 있으랴. 나라의 명을 새롭게 한 큰 공훈, 실로 여러 장군으로부터 이루어 졌었다. 종묘에 경사가 있었고 백성들에게 은택이 미쳤음에 이에 훈공을 책정하여 진무공신 삼등(振武功臣三等)을 삼고 화상(畵像)을 만들어 후세에 남기게 하며 품계를 높여주고 그의 부모와 처자에게도 또한 한 벼슬을 높이도록 하노라. 만일 아들이 없을 경우에는 생질과 사위에게 벼슬을 높여 주고 적장(嫡長)의 자손으로 하여금 벼슬을 세습하여 관록을 잃지 않게 하며 유서(宥恕:너그러히 용서함)함이 영세에 미치게 하노라. 인하여 사환 4인, 겹옷 한단, 노비 7구, 구사(丘史:공신에게 내려주던 관노비) 2구, 밭 60결, 은 20량, 겹옷 한단, 내구마(內廐馬) 한필을 하사하니 영수하라. 그리고 학성군(鶴城君)을 봉하고 형상을 그려 인각(麟閣: 공신들의 화상을 걸어둔집)에 걸며 금궤(金棉)에 철권(鐵券:공신들의 이름을 기록 한 문서)을 보관하여 죽소(竹素)에 길이 이름을 드리우게 하고 태산과 황하가 숫돌처럼 닳아지고 띠(帶)처럼 가늘게 될 때까지 나의 맹서 변함 없음을 다시 다짐하노라! 항상 경계하고 두려운 마음을 지녀 기어히 시종이 여일하게 보전토록 하라. 나의 심복이요 나라의 간성이라 바야흐로 신임하여 국방을 위임하니 사생(死生)과 이험(夷險:평탄과 험준)에 마땅히 신명을 다하는 충성을 하라. 이러한 뜻으로 이에 교시(敎示)를 하는 바이니 생각컨데 마땅히 자세한 이해 있을 것이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