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시자료실 ▒

부설거사와 <팔죽시>

천하한량 2007. 5. 29. 14:54
 

 

 

 


부설거사와 <팔죽시>

 

 


월명암은 신라 신문왕 12년(692) 부설거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그 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진묵대사가 중건했다. 월명암을 개창한 부설거사는 매우 특이한 인물이다. 그의 행적은 ‘부설전’이라는 고소설에 상세히 전해진다.

경주에서 출생한 부설은 법우인 영조, ·영희와 함께 구도의 길을 떠나 변산(엣이름은 능가산)에 들어서 묘적암을 세우고 수도에만 정진했다. 후제 이들은 문수보살을 친견하러 오대산으로 길을 떠나는데, 부설원(정읍군 칠보면)에 이르렀을 때 부설은 묘화라는 아가씨를 만난게 된다. 이 운명적 만남을 뿌리치지 못한 부설은 결혼을 하고 환속하게 된다.

부설거사는 아들 등운과 월명이란 딸을 두었는데 말년이 되자 변산에 등운암과 과 월명암이란 두 암자를 지어서 하나씩 맡겼다. 겉으로 보면 부설과 묘화 부부는 여느 속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수도승보다 더 치열하게 수도에 정진했다. 그 결과 부설거사는 "중생이 병들었으므로 나도 병에 들었다" 는 <유마힐 소설경>으로 널리 알려진 인도의 유마힐 거사, 중국의  방거사 등과 더불어 3대거사로 일컬어진다.

월명암을 중건한 진묵대사도 많은 이적을 남겼다. 진묵은 조선 중기 호남의 대표적인 선승이었는데, 어느 날 탁발을 나갔다가 매운탕 한 솥을 얻어 마셨다. 그런 다음 진묵은 물가에 가서 토해냈는데 탕 속에 들어 있던 죽은 물고기들이 전부 살아났다는 전설이 있다.

근대에는 백학명(1867∼1929)과 같은 고승이 월명암에 주석하기도 했다. 학명스님은 불교개혁의 일환으로 선농일치를 몸소 실천했다. 그는 참선과 농사를 같은 것으로 보고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한  중이다. 이외에도 원불교를 개창한 소태산 박중빈, 증산도를 창설한 강증산 역시 월명암을 찾아 수행한 적이 있다 하니 월명암이 수행처로서 얼마나 수승한 곳인지 미루어 짐작할 일이다.

此竹彼竹 化去竹   피죽피죽 화거죽       이런 대로 저런 대로 되어가는 대로
風打之竹 浪打竹   풍타지죽 낭타죽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粥粥飯飯 生此竹   죽죽반반 생차죽       죽이면 죽, 밥이면 밥, 이런 대로 살고
是是非非 看彼竹   시시비비 간피죽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르고 저런 대로 보고
賓客接待 家勢竹   빈객접대 가세죽       손님 접대는 집안 형편 대로
市井賣買 歲月竹   시정매매 세월죽       시정 물건 사고 파는 것은 세월 대로
萬事不如 吾心竹   만사불여 오심죽       세상만사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도
然然然世 過然竹   연연연세 과연죽       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대로 보낸다


부설거사가 지었다는  <팔죽시(八竹詩>)는  절묘한 각운의 묘미를 느끼게 해줌과 아울러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유유자적하며 살아가겠다는 달관의 경지가 느껴지는 한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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