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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평(文平) 이지명(李知命) 1127-1191(인종5-명종21)

천하한량 2007. 5. 13. 21:09

 

이지명(李知命)[1127-1191(인종5-명종21)]

 

자는 낙수(樂叟). 시호는 문평(文平). 본관은 한산(韓山) 

 

선정으로 민심을 얻어 무신정변 당시에도 무사했던 인물

#高麗史99卷-列傳12-李知命


李知命.

 

#高麗史99卷-列傳12-李知命-001


○李知命字樂叟韓山郡人

 

이지명의 자는 낙수이며 한산군(韓山郡) 사람이다.

 

博覽群書善詞賦工草隸

 

여러 가지 책을 많이 읽었고 사부(詞賦)를 잘 지었으며 초서와 예서(隸書)에 능하였다.

 

年十八擢第調黃州書記居官廉直民有飢者盡心賙恤流氓襁負而至

 

나이 18세 때에 과거에 급제하고 황주 서기(黃州書記)로 도임하여 재직중에 청렴 정직하게 일을 하였으며 굶주리는 자가 있으면 성심껏 구제하여 주었으므로 유랑민들이 젖먹이를 업고 밀려 왔다.

 

後爲忠州判官政如黃州

 

후에 충주 판관(忠州判官)으로 있을 때에도 황주에 재직할 때처럼 정사를 잘 하였다.

 

 鄭仲夫之亂內外文臣逃竄無所容州人感知命惠政護之知命獨免.

 

정중부의 난에 조정 안팎에 있는 문관들이 도망가서 숨을 곳이 없었으나 충주 고을 사람들은 이지명의 선정(善政)을 고맙게 생각하고 그를 보호하여 주었기 때문에 이지명만은 화를 면하였다.

 

及明宗立以知命有文章德行擢尙書右丞尋除右諫議大夫

 

명종이 왕으로 즉위하게 된 후에 그가 문장과 덕행이 있다 하여 상서우승(尙書右丞)으로 등용하였으며 미구에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로 임명하였다.

 

歷右散騎常侍翰林學士承旨出按西海又爲西北面兵馬使所至皆著聲績

 

그리고 우산기상시 한림학사 승지(右散騎常侍翰林學士承旨) 등의 벼슬을 지내고 서해 안무사(西海按撫使)로 나갔으며 또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임명되어 가는 곳마다에서 성적을 나타내었다.

 

 官至政堂文學太子少傅二十一年卒年六十五謚文平.

 

벼슬이 정당문학 태자소부(政堂文學太子少傅)에 이르러 21년(1191년)에 죽으니 향년 65세이었으며 시호는 문평(文平)이다.

 

知命爲相有古大臣風再掌禮闈以得人稱若趙沖韓光衍李奎報兪升旦劉冲基皆其所取

 

이지명은 상(相)으로 된 후 엄연히 옛대신(大臣)다운 기풍이 있었으며 두 번이나 예부를 맡아 과거에서 유능한 인재를 선발한 공적이 있었는바 조충(趙沖), 한광연(韓光衍), 이규보(李奎報), 유승단(兪升旦)과 같은 명사들은 모두 그가 선발한 인재이다.

 

子唐髦少有詞藻有父風

 

그의 아들 이당모는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있었으며 그 아버지의 풍도가 많았다.

 

擢魁科仕至國子司業.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고 벼슬은 국자사업(國子司業)에까지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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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년(庚寅年)의 난리에 중앙과 지방의 문신(文臣)이 도망하여 숨을 곳이 없었는데,

오직 이지명만은 고을 사람에게 보호되어 죽음을 면하였다. 황제가 그가 문학과 행실이 있다고 하여,

뽑아 간관(諫官), 상서우승을 삼으니, 이로부터 이르는 곳마다 성명(聲名)과 치적(治績)이 나타났다.

1181년(명종 11년) 우간의대부를 거쳐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로 임명되었다.

1184년에는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를 겸하였으며, 다음해 외직으로 나가 서해도안찰사와 서북면병마사를 각각 역임하였다.

1185년 1월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재직중 글안(契丹거란)이 실[絲] 5백 묶음을 바치자 이지명이 바쳤다.


 

서북면 병마사 이지명(李知命)이 거란의 실[絲] 5백 묶음을 바쳤다. 지명이 왕에게 하직할 때에 왕이 내전으로 불러들여 친히 타이르기를, “의주에서 비록 두 나라의 무역을 금하고 있으나 경이 마땅히 용주(龍州) 창고의 저포(苧布)를 가져가서 거란의 실과 무역하여 바치라." 한 까닭으로 이 바침이 있었다. 의종 때에 무릇 금 나라에서 준 실ㆍ비단 등의 물건은 그 절반은 내부(內府)에 들여보내어 어용(御用)에 쓰게 하고 절반은 대부(大府)에 보내어 경비에 충당하게 하였는데 왕이 즉위하자 모두 내부에 들여서 여러 폐첩(嬖妾)에게 내려 주니 내부의 저장이 다 없어졌으므로 양계(兩界)에서 징수 요구함이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다.


 

1185년엔 당대의 고승 현오국사를 기리는 "서봉사(瑞峰寺) 현오국사탑비"를 지어 상심한 명종의 마음을 위로하기도 하였다. 그뒤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오르고 드디어 1190년에는 팔재상중 한자리인 태자소부(太子少傅)를 겸하였다.

 

 

명종 광효대왕 2(明宗光孝大王二)(1191)


봄 정월에 정당문학 이지명(李知命)이 졸하였다. 지명은 한산인(韓山人)으로  많은 서적을 널리 읽고 사부(詞賦)를 잘 지었으며, 초서(草書)와 예서(隷書)도 잘 썼다. 과거에 급제하여 황주 서기(黃州書記)에 임명되니 관직에 있을 적에 청렴하고 정직하며,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여 살린 사람이 매우 많았다. 후에 충주 판관(忠州判官)이 되었을 때도 치정(治政)을 황주에서와 같이 하였다. 경인년의 난리에 중앙과 지방의 문신이 도망하여 숨을 곳이 없었는데, 지명만은 고을 사람에게 보호되어 죽음을 면하였다. 왕이 그가 문학과 행실이 있다고 하여, 뽑아 간관을 삼으니, 이로부터 이르는 곳마다 명성과 치적이 나타났다. 과거의 고시를 두 번이나 맡았는데 조충(趙冲)ㆍ한광연(韓光衍)ㆍ이규보(李奎報)ㆍ유승단(兪升旦)ㆍ유충기(劉冲基)는 모두 그가 선발한 사람이었으니, 세상에서 인재를 얻었다고 칭찬하였다.(고려사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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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봉사현오국사탑비 (瑞峰寺玄悟國師塔碑)

 

경기도 용인시(龍仁市) 신봉동(新鳳洞) 서봉사터에 있는 고려시대 탑비. 비의 몸체는 높이 1.88m, 나비 0.97m의 점판암으로 사각형 화강암의 부석(趺石) 위에 섰으며, 이수는 없다. 명문(銘文)에 의하면, 현오국사는 고려 중기의 승려로 휘(諱)는 종린(宗璘), 자는 중지(重之), 속성(俗姓)은 왕(王)이다. 비의 설립연대는 1185년(명종 15)이다. 탑비의 조형은 윗변의 양각(兩角)을 귀접이한 규형(圭形)이고, 지대석(地臺石)도 4변을 접은 간략한 것으로, 개석(蓋石)과 여러 조식(彫飾)을 생략한 고려 말 석비의 새 계류를 형성한 좋은 보기이다. 비문은 이지명(李知命)이 짓고, 유공권(柳公權)이 썼다. 보물 제9호.
 
 

 

 

 

 

 

서봉사지 현오국사비(瑞峰寺址玄國師碑) 탁본 

      찬(撰):이지명(李知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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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국가보물 제9호
지정년월일 : 1963.1.21
시대 : 고려시대(명종 15년.1185)
소재지 :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산 111
소유자 : 국유(國有)
규모 : 비신 높이 1.88m, 너비 0.97m
재료 : 신석-판암, 대석-강암

이 비석의 제액(題額)은 [고려국 대화엄 부석사 주지 증시현오국사비명 병서

(高麗國大華嚴浮石寺住持贈諡玄俉國師碑銘 幷序)]이다. 비신(碑身)은

높이 1.88m 너비 0.97m의 점판암으로, 화강암의 부석(趺石)위에 세워졌으며, 이수( 首)는 없다.

제액(題額)의 글자는 지름 약 8㎝의 전서(篆書)이며, 본문은 3.3㎝의 해서(楷書)이다.

제액 다음 행문(行文)에 찬자(撰者)와 서자(書者)를 다음과 같이 명기(明記) 하였다.

「朝散大夫左散騎常侍翰林學士寶文閣學士知 制誥兼 太子賓客 賜紫金魚袋臣 李知命」

「入內侍郎將作少監國學直講充史館修撰官兼 太子中允賜紫金魚袋臣 柳公權」

이 기록을 통해 「서봉사 현오국사탑비」의 본문을 지은 이는 이지명(李知命)이며,

글씨를 쓴 이는 고려 때 초서(草書)로 유명한 유공권(柳公權)임을 알 수 있다

비문의 말미(末尾)에 「大定二十五年 乙巳二月 日門入等奉 宣銷峰寺立石 興王寺大師 敏求 刻字」

라는 기록이 있는데, 대정(大定) 25년은 명종 15년(1185) 으로서 현오국사가 시멸(示滅)한지

7년 후이다. 흥왕사(興王寺)의 대사(大師)인 민구(敏求)가 각자(刻字) 하였음도 확인할 수 있다.


비석의 조형은 보경사원진국사비(寶鏡寺圓眞國師碑), 억정사대지국사비(億政寺大智國師碑),

보광사중창비(寶光寺重創碑)와 같이 윗변의 양각(兩角)을 귀접이한 규형(圭形)이고,

지대석(地臺石)도 4변을 접었다. 개석(蓋石)과 여러 조식(彫飾)을 생략한,

고려말 석비(石碑)의 새로운 계류(系流)를 형성하는 좋은 사례이다.

명문(銘文)에 의하면 현오국사는 고려 중기의 승려로 휘(諱)는 종린(宗璘),

자(字)는 중지(重之)이며, 속성(俗姓)은 왕씨(王氏)이다. 어려서부터

기량이 뛰어나고 심대하였다. 15세에 불일사(佛日寺)에서 수계(受戒)하고

의종(毅宗) 원년(1147)에 수좌(首座)가 되었다.

명종(明宗)은 원년(1171) 중추(仲秋)에 그에게 좌세(佐世)의 호(號)를 내리고,

내전(內殿)에 불러들여 가사(袈裟)한 벌을 하사하였다.명종 8년(1178) 7월에 53세 나이,

법랍(法臘) 39세로 시멸(示滅)하였다.

명종은 매우 애통해하며 최광유(崔光裕) 등을 보내어 국사(國師)를 봉하고,

시호(諡號)를 현오(玄悟)라 하였다. 같은 달 17일에 동림(東林) 산기슭에 다비(茶毘)하였다.

현오국사는 대각국사(大覺國師)의 여풍(餘風)을 이은 대표적인 고승(高僧)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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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 서봉사지

 

서봉사는 고려 명종 때 황주서기와 충주판관을 지낸 이지명(李知命)이라는 사람이 창건하여 조선시대 철종 3년(1852) 화재로 소실된 것으로 되어있다.

 

 
감나무 밭으로 변한 ‘절골 7만평’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는 폐사지를 찾는 것은 ‘숨은 그림 찾기’와 마찬가지다. 한갓진 돌담이나 예사롭지 않은 바윗돌, 울창한 송림이나 대숲이 보이면 혹시 여기가 옛 선지식들이 가부좌를 틀던 그곳이 아닌가 하여 유심히 들여다보게 된다. 이 나라가 불법(佛法)의 땅이어서 실제로 고샅고샅 운수납자들 머물던 흔적 없는 곳이 없고, 나무든 풀이든 부처님의 숨결 느껴지지 않는 곳이 드물다. 강이든 산이든 무심코 대하거나 함부로 스치기가 어려운 것이다. 무상한 것이 세월이어서 가까스로 찾아낸 옛 절집이라 하여도 달려가 와락 안겨 들지 못하는 것은 밀려드는 그리움보다 등 돌려 외면하는 방초들의 몸짓이 완강한 탓이다. 세월이 수상하면 아무리 대중들 밥그릇을 탑처럼 쌓았던 대가람이라 하더라도 놋대접에 푸른 녹슬 듯 쇠멸하기 마련이다. 어쩌다 사세(寺勢)가 기울어 동으로 서로 흩어져 장식품으로 전락한 성보들을 보면 그 이산(離散)의 아픔에 가슴이 울컥거린다.

 


‘대(竹)의 고장’ 담양. 서봉사지(瑞峯寺址)는 그 서북쪽 노령산맥의 한 갈래인 추월산 아래,
무등산으로 이어진 자미탄가의 후미진 암봉 골짜기에 숨어있다.

화순 땅 운주사지로 가려다가 식상한 감이 없지 않아 숨은 그림을 찾듯 새로운 절터인 담양읍 남면 정곡리 ‘절골’을 찾아가기로 했다. 폐사지 탐험에도 격식이 있다. 발굴 복원으로 유명세를 타는 곳이라도 입장료를 받는 곳이 아닌 곳, 암자나 전각 정도로는 안 되고, 적어도 남원 땅 ‘만복사의 귀승’처럼 저물녘 탁발을 끝내고 돌아오는 사문들의 행렬이 장관이었던 곳, 지목이 농지나 임야이더라도 그 나락들 발치에 추억의 편린처럼 부서진 기왓장이나 도자기 파편들이 심심치 않게 튀어나오는 곳이어야 한다.

서봉사지에 대한 기록이 풍문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동국여지승람>창평현조에는 ‘서봉사 재 무등산(瑞峯寺 在 無等山)’이라 되어 있고, 조선총독부 발행 <호남읍지> 창평조에는 ‘서봉사 재 무등산 동북 경술화소(瑞鳳寺 在 無等山 東北 庚戌火燒)’라고 되어 있다. 서봉사의 정확한 사명(寺名)이 ‘서봉사(瑞峯寺)’인지 ‘서봉사(瑞鳳寺)’인지 혼돈스러우나 절골이 위치한 산 이름이 서봉산(瑞峯山)이므로 후대에 와 소실과 중건을 반복하면서 절 이름이 바뀐 것으로 생각된다. 분명한 것은 절터를 에워싼 산봉우리, 솔숲과 대숲에 상서로운 기운이 가득 느껴진다는 것이다.

기록이 분명치 않아 절에 관한 사료를 찾기가 마땅치 않으나 점심을 먹으려 들린 ‘정곡가든’에서 그나마 실오라기 같은 반가운 소식을 듣는다. 송광사 천자암 활안스님이 서봉사의 복원에 관한 원력을 세운 모양인데, 그 모연문을 이곳 저곳에 돌린 것이다. 모연문에 의하면 서봉사는 고려 명종 때 황주서기와 충주판관을 지낸 이지명(李知命)이라는 사람이 창건하여 조선시대 철종 3년(1852) 화재로 소실된 것으로 되어있다. 사료의 출처가 모호하여 진위를 가리기 어려우나 출가사문의 소명이 현존사찰의 대소가를 거느리는 것만이 아니라 역사의 뒤안길에 주저앉은 망가진 가람의 끊긴 법맥의 대를 잇는 것도 의미가 있으므로 그 분의 목탁소리가 메아리 쳐 절골 안에 울리기를 기대한다.


돌축대

서봉사지는 수 백년 된 버드나무가 마을의 연륜을 말해주는 마을 뒤 켠 분지에 담겨있다. 마치 대바구니에 가지런히 과실을 담은 형상이다. 적어도 수 십채의 전각이 계곡을 메우고 있었다면 그 향기는 유림(儒林)이 아니라도 군침을 삼켰을 만하다. 사실 담양 땅 광주호 일대는 이름난 정자와 원림(園林)이 즐비하다. 이름 하여 ‘정자문화권’의 고장이다. 16세기 무렵 조선 사회를 진동했던 사화의 와중에서 중앙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사대부들이 이 곳 고서면과 봉산면 그리고 남면 일대에 들어 면양정, 송강정, 명옥현, 식영정, 소쇄원, 독수정 등 정자와 별원을 짓고 은둔하였던 것이다. 숭유배불로 사고체계가 굳은 그들의 눈에 풍광 수려한 서봉산 암봉 아래 안개처럼 피어나는 절집의 향냄새는 그리 향기롭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7만여평 감나무 과수원으로 변질된 서봉사지는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를 겉만 보는 사람들의 시력으로 보면 그러할 뿐, 눈여겨보면 감나무 그늘마다 낙과 보다 무상하게 깨어진 자기 조각 등 절 터의 흔적들이 뒹군다. 성한 것이라고는 없다. 낙과는 비바람에 깨졌고, 유구들은 절망과 자해로 상처투성이다.

이것이 모두 무엇인가? 지난 번 태풍으로 계곡 곳곳이 패여 겨우 땅 속에 얼굴을 묻고 있던 석축이며 부재들이 곳곳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빗방울이 살짝 건드렸어도 이 정도인데 제대로 발굴조사를 실시한다면 서봉사지는 또 한번 이 땅의 폐사지 지도를 바꿔 놓을지도 모른다.

절 터 중심부에는 석등부재와 괘불지주 부재가 한가로이 장좌불와를 하고 있고, 자연그대로의 바윗돌을 이용해 만든 토굴이 있다. 바위 돌에 걸린 쪽문은 굳게 잠겼으나 그 형태로 보아 절이 살아있을 때는 큰스님께서 독차지하던 목 좋은 암자 노릇을 톡톡히 했을 듯 하다. 임자 없는 토굴 문턱 아래는 떨어진 은행알이 흩어진 염주알인 듯 흐르고 있다. 산비탈에서 들려오는 댓잎 서걱이는 소리가 사문들이 책장을 넘기는 소리로 들린다.


교정탑



부도

모두다 어디로 갔는가? 계곡을 메운 대나무 줄기들은 무엇을 말하려는 듯 저희끼리 바짝바짝 다가서며 허리를 세우고 있다. 광주시의 상수원 구실을 하는 서봉사지 계곡은 그린벨트로 묶인 탓인지 청정한 기운이 감돈다. 계곡에는 쇠별꽃, 고마리, 바보여뀌, 오이풀이 군락을 이루고, 물뱀 한 마리 재빠르게 풀섶으로 꼬리를 감춘다. 개울물에 유영하는 버들치도 천적이 없는지 그 지느러미가 손바닥 크기만 하다.

서봉사지에 있던 성보들은 뿔뿔이 흩어져 이산의 아픔을 곱씹고 있다. 삼층석탑과 석종형 부도는 도굴범에 의해 반출되려던 것을 되찾아 1969년 호남문화연구소에 의해 전남대 교정으로 옮겨 놓았고, 석조보살입상은 증심사로 이사를 갔다. 가문이 망가졌으니 그 권속들이 사방에 흩어져 애꿎은 장식품이 되어도 누구하나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문화재를 그릇된 방법으로 빼돌리는 것만이 도굴이 아니라 지키지 못하는 것도 도굴이다. 대나무는 속을 비워 내고 그 절개와 충절을 담아낸다. 속을 텅 비운 대나무들이 눈 부릅뜨고 지키는 폐사지. 그곳이 바로 담양 땅 서봉사지인 것을….

다음은 무안 총지사지 편

서봉사지 가는길

서봉사지는 광주에서 동광주 IC로 진입하여 29번 국도로 좌회전. 남원 방향으로 직진하다가 소쇄원 방향으로 이어지는 887번 도로를 따라 5㎞ 정도 달리면 된다. 광주호 일대의 정자문화권인 식영정, 소쇄원 등을 지나면 담양읍 남면이 나오고, 서봉사지는 남면 석정리 마을 절골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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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 용문사

 

동왕 15년(1185) 에는 불사의 완공을 기념하는 뜻에서 이지명(李知命) 찬의 중수비를 경내에 세웠다

 

 

 

 

용문사는 예천군 용문면 내지리 소백산 남쪽기슭에 위치한 사찰로, 이 고장 출신 두운선사가
경북 예천군 용문면 내지리 용문산에 위치한 용문사는 신라 경문왕 10년(870)
두운 대사(杜雲大師) 에 의하여 개창되었으나, 이후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더욱 거대한
사찰 규모를 형성하였다. 즉 용문사는 직지사의 말사 가운데서 고려 왕조의 비호를
가장 많이 받아온 사찰이라 하겠다. 그것은 사내에 전래되는 금석문(金石文)
또는 사적기(事蹟記) 등의 기록에 의하여 알 수 있다.
한림학사(翰林學士) 이지명(李知命) 의 또는 등의 기록을 종합하면 신라 두운(杜雲) 대사가
범일(梵日) 대사와 함께 입당구법(入唐求法) 후 귀국하여 이곳 용문산 기슭에 들어와서
풀을 엮어 두운암(杜雲庵) 이란 암자를 마련하여 거처하였다고 하였다.
이때 고려 태조가 남정시(南征時) 에 이곳을 지나다가 두운 대사의 고명(高名) 을 듣고
예방코자 하였다. 태조가 동구에 이르자 홀연히 진룡(眞龍) 이 바위 위에 나타나
어가(御駕) 를 환영하므로 산명을 용문산이라 하고 사명을 용문사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태조는 두운 대사와 후일을 약속하였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태조 19년(936) 에는 용문사를 크게 중창하여 주현(州縣)으로부터
매년 150석의 조세를 바치도록 하였다. 의종 19년(1165)에는 자엄(資嚴) 대사가
명을 받고 와서 조응(祖膺) 대사가 보시한 자량(資糧) 으로 3간 법당과
승방주고(僧房廚庫) 등 93소를 건립하였다. 또 명종 원년(1171) 에는 태자의 태(胎)를
일주문 밖의 봉두(峰頭) 에 묻고 사명을 용문산 창기사(昌期寺) 라 개칭하였다.
이에 성수(聖壽) 를 축원하는 법회를 열어 5명의 승려로 낮에는 을 전독(轉讀) 하고
밤에는 관음정근(觀音精勤) 으로써 항규(恒規) 로 삼았다. 대대적인 불사를 위하여
이웃 7사와 안동 10개 사찰 등에서 조 700석을 거두어 비용에 충당하였으며,
도량의 남쪽에는 9층의 청석탑(靑石塔) 을 세워 사리를 봉안하는 등 실로
대작불사를 이룩하였다. 이에 명종 3년(1173) 에 불사를 완공하고 구
산선문학도 500인을 청하여 50일 간 담선회(談禪會) 를 배풀고 단속사(斷俗寺) 의
효순 선사(孝淳禪師) 를 청하여 등을 교습케 하였다. 또한 삼만승제(三萬僧齊) 를
설하고 대장전을 신축하여 당내 좌우에 윤장대(輪藏臺) 2좌를 설치하여 법회를
개설할 때는 300여 인이 모였으며, 이때는 개태사(開泰寺) 의 승통 영치(潁緇) 가
강연하였다. 그리고 동왕 15년(1185) 에는 불사의 완공을 기념하는 뜻에서
이지명(李知命) 찬의 중수비를 경내에 세웠다. 이 비에는 용문사의 삼이사(三異寺) 를
전하고 있는데, 그 첫째는 태조가 두운 대사를 찾을 때 진룡(眞龍) 이 출영(出迎) 한
것이라 하였고, 둘째는 처음 절을 지을 때 홀연히 고량상(古梁上) 에
무게 16냥이나 되는 은병이 출현하여 이 비용으로 절을 건립한 것이라 하였고,
셋째는 도량 남쪽의 청석탑에 사리를 안장할 때 오색 구름이 소반을 에워싼
것이라 하였다.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왕실의 지원은 계속되어
세조 3년(1457) 에는 교지를 내려 용문사의 잡역을 감면토록 하였고,
성종 9년(1478) 에는 소헌왕비(昭憲王妃) 의 태실(胎室) 을 이곳에 안장하고
성불산 용문사로 개칭하였다. 또 정조 7년(1783) 에는 효문세자(孝文世子) 의
태실을 이곳에 안장하고 사명을 소백산 용문사로 환원하고 인빈궁(仁嬪宮)
원당으로 삼았으며, 당시의 건물로는 광명전(光明殿), 지장전(地藏殿),
원통전(圓通殿), 응진전(應眞殿), 미타전(彌陀殿), 대장전(大藏殿),
응향각(凝香閣), 만월당(滿月堂), 청심당(淸心堂), 명월료(明月寮),
적묵당(寂默堂), 삼강실(三綱室), 천왕문(天王門) 등과 함께 암자로는 서전(西殿),
비전(碑殿), 양로암 등이 알려져 있다. 그러다가 전각의 화재가 있었음인지,
이후 헌종 원년(1835) 에는 화재로 소실된 보광명전과 해운루를 중건하였으며,
1979년에는 대장전을 비롯한 여러 전각들을 대대적으로 보수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1984년 5월 9일 7시경 창고에서 발화하여 보광명전, 해운루,
응향각, 영남제일강원, 요사, 종무소 등 230평이 소실되는 참사가 있었다.
이때 진화과정에서 국내 유일의 국가지정 보물 목조건물인 대장전 및
윤장대(輪藏臺) 를 구제하기 위하여 그 사이에 있던 단하각(丹霞閣) 을
허물어 불길을 잡기도 하였다. 이후 복원과정에서 퇴락된
두운암(杜雲庵) 을 철거하여 그 목재 일부를 종무소 신축에 사용하기도 하였다.
한때 용문사는 용문 일대를 사전(寺田) 으로 소유하기도 하였으나,
광복 이후 토지개혁으로 대부분 없어지고 현재는 전답이 약 15,000평,
임야 160정보를 소유하고 있다. 현존 건물은 보광명전, 대장전, 명부전,
응진전, 원통전, 천불전, 진영각, 동향각, 산신각, 해운루, 자운루, 응향각,
누각, 천왕문, 일주문, 영남제일강원, 후원요사 등이 있다. 그리고 대웅전
전방에 위치한 누각은 정면 5간, 측면 2간의 맞배집 2층, 총 60평이며,
그 전방 아래쪽에 위치한 천왕문 역시 정면 3간, 측면 2간의 맞배집이다.
그러므로 용문사는 대웅전과 요사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전각이
맞배집 형식의 건물이라 하겠다. 이들 가운데 대웅전은 정면 3간,
측면 3간의 팔작지붕 총 33평의 건물이며, 내부에는 철조비로자나불좌상(177 X 135cm) 과
소조석가여래좌상(91 X 59cm), 그리고 소조약사여래조상(110 X 85cm),
후불탱(165 X 167cm, 1868년, 175 X 204cm, 1884년) 2점, 지장탱(265 X 246cm),
신중탱(318 X 153cm) 들을 봉안하였다. 대장전(보물 145호) 은 정면 3간,
측면 2간의 맞배지붕, 총 18평이다. 대장전 내부에는 목조석가여래조상(90 X 61cm),
목조문수보살좌상(80 X 6cm), 목조보현보살좌상(177 X 135cm),
목조후불탱(177 X 135cm) 등을 봉안하였고, 장경을 봉안하였던
윤장대(보물 681호) 가 보관되어 있다. 명부전은 대웅전 동편에 위치한 정면 3간,
측면 2간의 맞배지붕, 총 18평이다. 응진전 역시 정면 3간,
측면 3간의 맞배지붕 7평의 건물이다. 내부에는
소조석가여래좌상(塑造釋迦如來坐像, 80 X 63cm),
소조미륵보살입상(塑造彌勒菩薩立像, 106 X 27cm),
소조제화갈라보살입상(塑造提華竭羅菩薩立像, 106 X 27cm),
소조십육나한상(塑造十六羅漢像, 57 X 47cm)을 봉안하고 있다.

 

의운정 누각 대들보에
이 곳을 다녀간
많은 시인묵객들의 시판이 걸려 있다.

중앙에 크게 붙은 시는
이지명李知命의 시이다.

이지명은 고려 의종때
영일고을의 감무(현감의 고려시대 이름) 였는데
그가 의운정을 세웠다.

시판을 보던 어득호가,
"저는 이 지명을 저의 스승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말하니
김종직이 고개를 끄덕인다.

수긍이 가는 것이다.


이지명은 고려 의종때의 명환名宦,
즉 뛰어난 관리였다.

청렴하며 드높은 인격,
능력 또한 뛰어나
백성들의 신망이 두터웠다.


정중부가 무신의 난을 일으켜
이름 있는 문신들을 모두 죽일 때였다.

"이지명도 죽여라!"
살기등등한 무신들이 이지명을 죽이려 할 때

개경의 백성들이 궐기했다.

"안 된다!
이 판관은 살려야 한다!"
백성들이 무사들 앞을 가로막자

정중부도 이지명을 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