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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의 학자 이색 선생
호 : 목은(牧隱), 시호 문정(文靖)
별칭 : 자 영숙(潁叔)
활동분야 : 정치, 철학
주요저서 : 《목은시고(牧隱詩藁)》 《목은문고(牧隱
文藁)》
이색은 충숙왕15년(1328년)에 태어나 5년에 돌아가신
성리학자이다.
어려서부터 총기가 뛰어나 14세에 성균시에 합격하
고, 공민왕 때 정돈성 향시에 장원으로 합격되어 서장
관에 임명된 후 원나라에 들어가 다시 문과에 급제,
한림지제고가 되었다.
귀국하여 내서사인에 올랐으며 밀직제학동지춘추관사
가 되자 이로부터 국방에 참여, 1367년(공민왕16년)성
균대사성이 되었고, 정몽주, 김구용 등과 명륜당에서
학문을 강론하니 이에 정주의 성리학이 처음으로 일어
났다.
그가 남긴 학문적 업적과 정치적 역량은 후에 사람들
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을 위하여 사절(死節)한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 본관은 한산
(韓山). 자는 청보(淸甫)·백고(伯 高), 호는 백옥헌(白玉軒).
색(穡)의 증손이며, 중추원사 종선(種善)의 손자이고, 계주(季
疇)의 아들이다. 태어나면서 글을 잘 지어 할아버지의 유풍(遺
風)이 있었다.
1436년(세종 18)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441년에 집현
전 저작랑으로서 당나라 명황(明皇)의 사적을 적은 (명황계감 明
皇誡鑑)의 편찬에 참여하고, 훈민정음의 제정에도 참여하였다.
1444년 집현전부수찬으로서 의사청(議事廳)에 나가 언문(諺文:國
文)으로 《운회 韻會》를 번역하는 일에 참여하여 세종으로부터
후한 상사(賞賜)를 받았다. 1447년 9월에 《동국정운》의 편찬
에 참여하였고, 1448년 지대구군사(知大邱郡事) 이보흠(李甫欽)
이 조정에 사창(社倉)을 설치할 것을 주장하였을 때 백성들에게
부담을 준다는 점을 들어 반대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년) 문종이 어린 왕세자를 위하여 서연(書筵)
을 열어 사(師)·빈(賓)의 상견례를 행할 때에 그는 좌문학(左文
學)의 직책으로서 (소학)을 진강(進講)하였는데, 문종으로부터
세자를 잘 지도해 달라는 간곡 한 부탁을 받았다.
1453년(단종 1) 10월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을 보좌하고
있던 대신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을 살해하고 정권
을 쥔 이른바 계유정난을 일으켜 이 거사에 참여한 공신을 책정
할 때에 환관 엄자치(嚴自治)와 전균(田畇)이 공로가 있다는 이
유로 공신에 기록하고 봉군(封君)까지 하려고 하였다.
집의로서 좌사간인 성삼문(成三問)과 함께 환관의 폐해가 망국패
가에 이르게 되는 옛날의 예를 들어서 이들에게는 재백(財帛)으
로써 상만 내리고 공 신과 봉군은 절대로 하여서는 안 된다는 점
을 힘써 아뢰었다.
이해 12월에는 글을 올려 근일에 시정(時政)의 몇 가지 일로써
여러 번 임 금의 총명을 모독하였으나 한가지도 윤허를 받지 못
하므로 사직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1456년(세조 2) 2월에 집현전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이해 6월
에 성균관사에 김질의 고변에 의하여 성삼문 등 육신(六臣)이 주
동이 되어 상왕 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이 발각되었는데, 박팽년
(朴彭年)·하위지(河緯地)·유응부(兪應孚)·유성원(柳誠源)과
함께 국문을 당하였다.
이때 그는 작형(灼刑)을 당하면서도 태연하였다고 한다. 성삼문
등과 함께 같은날 거열형(車裂刑)을 당하였는데, 수레에 실려 형
장으로 갈 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우정(禹鼎:夏나라 우왕이 9주의 쇠를 거두어 9주를 상징하여
만든 아홉개의 솥)처럼 중하게 여길 때에는 사는 것도 또한 소중
하지만·홍모(鴻毛: 기러기의 털, 즉 아주 가벼운 물건의 비유)
처럼 가벼이 여겨지는 곳에는 죽는 것도 오히려 영광이네·새벽
녘까지 잠자지 못하다가 중문 밖을 나서니·현릉(顯陵:문종의
능)의 송백이 꿈속에 푸르고나!”. 이때 이개의 매부인 전 집현
전부수찬인 허조(許)도 자결하였는데, 단종복위의 모의에 참여하
였기 때문이다.
뒤에 남효온(南孝溫)이 그 당시 공론(公論)에 의거하여 단종복위
사건의 주 도인물인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
응부 등 6인을 선정, 〈육신전 六臣傳〉을 지었는데, 이 〈육신
전〉이 세상에 공포된 뒤 육신의 절의를 국가에서 공인, 1691년
(숙종 17)에 와서 사육신의 관작을 추복(追復)시켰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노량진의 민절서원(愍節書院), 홍주의 노운
서원(魯雲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년운동가.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계호(季皓), 호는 월남(月
南). 충청남도 서천출신. 아버지는 희택(글宅)이며, 어머니는 밀
양박씨이다. 어려서는 전통교육을 받고, 1864년(고종 1) 강릉유
씨(江陵劉氏)와 결혼하였다.
32세때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와 고종 25년인 1887년에 주미공사
관 1등서기관으로 부임하여 외교활동을 전개하였으며, 귀국후에
는 우부승지, 협판위정부 참찬을 역임했다.
광무 2년인 1898년에는 서재필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 부회장
을 지내면서 민중계몽에 전력했으며, 그뒤에 기독교 청년회 회
장, 조선일보사장을 거쳐 신간회 회장을 지냈다.
1929년에 별세하였으며 1962년 3월 1일에 대한민국 공로훈장이
추서 되었다
다.
자는 중경 호는 어성이고, 한산 출신으로 중종 35년인 1540년에
사마시를 거쳐 명종 7년인 1552년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1563년에 정언, 지평, 전적 등을 거쳐 1565년에 장령이 되었다.
선조 2년인 1569년에 부수선을 거쳐 다시 장령이 되었으며 1571
년에 국자감정으로서 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577년에
는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가 한때 파직되었다.
1582년 경주부윤으로 기용되어 특히 공사를 잘 처리하여 칭송이
높았으며, 1591년 홍문관제학에서 예조참판으로 승진하였으며,
1592년 임진왜란때는 전주부윤으로서 의병 1,000여명을 모병하
여 왜적의 호남진격을 막았다.
학자. 본관은 한산(韓山).자는 중보(仲父), 호는 가정(稼亭). 한
산출생. 한산이씨 시조인 윤경(允卿)의 6대손으로, 찬성사 자성
(自成)의 아들이며, 색(穡)의 아버지이다.
1317년(충숙왕 4) 거자과(擧子科)에 합격한 뒤 예문관검열이 되
었다. 원나라에 들어가 1332년(충숙왕 복위 1) 정동성(征東省)향
시에 수석으로 선발되었으며, 다시 전시(殿試)에 차석으로 급제
하였는데, 이때 지은 대책(對策)을 독권관(讀卷官)이 보고 감탄
하였다.재상들의 건의로 한림국사원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이
되어 그때부터 원나라 문사들과 교유하였다.
1334년 본국으로부터 학교를 진흥시키라는 조서를 받고 귀국하
여 가선대부시전의부령직보문각(嘉善大夫試典儀副令直寶文閣)을
제수받았다.
이듬해 다시 원나라에 들어가 휘정원관구(徽政院管勾)·정동행중
서성좌우사원외랑(征東行中書省左右司員外郎) 등의 벼슬을 역임
하였다.
그뒤 본국에서 밀직부사·지밀직사사를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가 되고 뒤에 한산군(韓山君)에 봉
해졌다. 이제현(李齊賢) 등과 함께 민지(閔漬)가 편찬한 《편년
강목 編年綱目》을 증수하고 충렬·충선·충숙 3조(三朝)의 실록
을 편수하였으며, 한때는 시관이 되었으나 사정으로 선발하였다
는 탄핵을 받았다. 다시 원나라에 가서 중서성감창(中書省監倉)
으로 있다가 귀국하였으나, 충정왕이 즉위하자 공민왕의 옹립을
주장하였으므로 신변에 불안을 느껴 관동지방으로 주유(周遊)하
였다.
1350년(충정왕 2) 원나라로부터 봉의대부 정동행중서성좌우사낭
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郎中)을 제수받았고, 그 이듬해 죽었다.
그는 일찍이 원나라에서 문명을 떨쳤고 원나라의 조정에 고려로
부터 동녀를 징발하지 말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는 중소지주 출신의 신흥사대부로,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하여
실력을 인정받음으로써 고려에서의 관직생활도 순탄하였다. 그
는 유학의 이념으로써 현실문제에 적극적으로 대결하였으나, 쇠
망의 양상을 보인 고려 귀족정권에서 그의 이상은 실현되지는 못
하였다.이러한 상황은 그의 여러 편의 시에 잘 반영되어 있다.
《동문선》에는 100여편에 가까운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죽부인전 竹夫人傳〉은 가전체문학으로 대나무를 의인화하였
다. 그밖에 많은 시편들은 고려 말기 중국과의 문화교류의 구체
적인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한산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의 단산서원(丹山書院) 등에 배
향되었다.
저서로는 《가정집》 4책 20권이 전한다. 시호는 문효(文孝)이
다.
山人). 참판 해(解)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한 뒤 1496년(연산군 2) 만포진첨절제사(滿浦鎭僉節
制使)가 되고 뒤에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1504년 좌의정 성준(成俊)이 왕의 난정(亂政)을 극간하다가 교살
될 때 그 일당으로 몰려 유배되었으며, 그뒤로는 벼슬길에 나가
지 않았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석방되어 비인현(庇仁縣)에 은거하
면서 사냥으로 나날을 지냈다. 그후 조정에서 병조 참의의 벼슬
을 주었으니 나가지 아니하고 이땅에서 늙도록 벼슬을 주는 것
은 병을 주는 것과 같다 하였다. 성품이 청렴결백하고 근엄하며
9군(郡)을 역사(歷仕)할 때 명성과 공적이 있었다. 위명으로 옛
직함 첨추로 신주를 만들라 함으로 향리 사람들이 청절사를 지
어 제사지냈다. 중종 9년 1514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진양조를 처음으로 판소리에 넣었다는 김성옥
(金成玉)이고, 아버지는 판소리에 삼공제비를 응용하였다는 김정
근(金正根)이다. 따라서, 판소리 명문에서 태어난 셈이다. 아우
창진(昌鎭)도 명창으로, 한때 고종으로부터 참봉의 직계를 받기
도 하였다. 7세 때 아버지에게서 판소리를 공부하였고, 13세 때
에는 이날치(李捺致)에게 1년간 판소리를 배웠다.그뒤 오랫동안
홀로 공부하다가 32세 때 서울에 올라와 연흥사(延興社)창립에
공헌하였고, 1933년에는 송만갑(宋萬甲)·이동백(李東伯)과 조선
성악연구소를 만들어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창극공연에도 참가하
였다. 〈적벽가〉와 〈심청가〉를 잘하였고, 특히 〈심청가〉 중
에서 ‘꽃타령’과 〈적벽가〉 중에서 ‘삼고초려(三顧草廬)’
대목을 잘하였다.
원래 그의 집안은 경기도 및 충청도지역에 전승되는 중고제(中古
制)소리를 이어오고 있었는데, 김창룡도 또한 자기 가문의 소리
제를 그대로 이었다고 볼 수 있으나, 전승이 끊어졌고 취입한 음
반만 남아 있다. 그의 소리는 오늘날 전승이 끊어진 중고제 판소
리연구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된다.
현재 남아 있는 여러 음반 중에서 〈적벽가〉 중 ‘삼고초려’,
단가 중 〈장부한 丈夫恨〉, 〈수궁가〉에서 ‘수정궁(水晶宮)들
어가는데’, 〈심청가〉에서 ‘화초타령’은 걸작으로 꼽히고 있
다.
또는 오악산인(五嶽山人).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호(澔)이며, 어머니는 통덕랑(通德郎) 이휘(李徽)의 딸이다. 집
안은 남인으로 초기에는 벼슬길이 막혀 향리에서 시작에 힘쓰
며, 채제공(蔡濟恭)·이헌경(李獻慶)·이동운(李東運) 등과 교유
하였다.
또한, 윤두서(尹斗緖)의 딸과 혼인하여 실학파와 유대를 맺었
다.39세 때 진사에 올라 벼슬을 시작하였으며, 49세에 영릉참봉
(寧陵參奉)이 되고, 53세에 금오랑(金吾郎)으로 제주도에 갔다
가 표류하여, 제주에 40여일 머무르는 동안 그곳의 풍토, 산천,
조수항해의 상황을 다룬 부록해(浮海錄>을 지었다.그뒤 선공봉사
(繕工奉事)·돈녕주부(敦寧主簿)·연천현감(漣川縣監)을 지냈다.
1772년 61세 때 기로과(耆老科)에 장원하여 돈녕부도정(敦寧府都
正)이 되었다. 이로부터 조정에서는 문장의 신하를 얻었다고 하
였고, 영조의 대우가 대단하였다. 이때 서울에 거주할 집이 없다
는 사실이 알려져 왕으로부터 집과 노비를 하사받았다.
그뒤 우승지·영월부사를 역임하였다. 시명이 세상에 떨쳤는데
특히 과시(科詩)에 능하였고, 〈등악양루탄관산융마 登岳陽樓歎
關山戎馬〉(關山戎馬로 약칭됨.)는 창(唱)으로 널리 불렸다.
그는 사실적인 필치로 당시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농촌
의 피폐상, 관리의 부정과 횡포 및 하층민의 고난을 시의 소재
로 택하였다. 악부체(樂府體)의 시로서는 〈관서악부 關西樂府〉
가 유명하다. 그의 시에 대하여 교우의 한 사람이었던 채제공은
평하기를, “득의작(得意作)은 삼당(三唐)을 따를만하고, 그렇
지 못한 것이라도 명나라의 이반룡(李攀龍)과 왕세정(王世貞)을
능가하며 동인(東人)의 누습을 벗어났다.”고 하였다. 동방의 백
낙천(白樂天)이라는 칭을 받기도 하였다.
祖) 27년(1590)에 별세한 문신이다.
자는 중거(仲擧)이고 호는 명곡(鳴谷)이다. 본관은 한산(韓山)
목은의 7대손 이지부의 아들로서 숙보와 이지함에게 사사하고 명
종(明宗) 22년(1567)에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선조1년(1568) 증
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벼슬길에 올라서는 해미
현감(海美縣監) 정언(正言)을 지내고 순안어사(巡按御史)로 북도
를 순찰하였고 수찬(修撰), 교리(校理), 지평(持平), 헌납(獻
納), 이조정랑(吏曹正郞) 들을 역임했다.
1577년에는 양모(養母)의 상을 당하고 서천에 내려 왔다가 다시
사인(舍人) 집의(執義), 사간(司諫), 응교(應敎), 직제학(直提
學) 등을 지내고 동인(東人) 탄핵을 박아 종부사정(宗簿寺正)에
좌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년 뒤 다시 집의(執義)로 전임하고
이어 동부승지 대사간, 우승지를 거쳐 1585년 부제학(副提學) 김
우옹이, 이이, 정철의 죄를 논하는 것을 반박했고 대사헌(大司
憲)에 특진되었으나 후에 이이, 박순, 정철의 공을 논하다가 사
간원의 탄핵을 받아 전직되었다. 경상도 관찰사 황해도 관찰사
를 지내고 선조(宣祖) 22년(1589) 기축옥사(己丑獄死)가 일어나
자 대사간으로 난국을 수습하고 이듬해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
라에 다녀와서 대사헌이 되었다.
선조 24년(1591)에는 황해도 관찰사로 있다가 건저문제(建儲問
題)로 정철 등 서인(西人)이 화를 입게 될 때 이에 연류되어 파
직되고 그는 고향에 내려갔었다. 이듬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고 이조참판에 오르고 이어 이조판서에 승진하여
명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을 맞아들였다. 이어서 북도와 삼남
의 도검찰사가 되어 나라 군량 조달을 하다가 좌참찬에 승진했
다. 호성공신(扈聖功臣) 2 등에 한흥부원군(韓興府院君)으로 추
봉 영의정 추증 보령의 화암서원 서천의 건암서원에 배향되고 시
호는 충간(忠簡)이다.
건암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의해 1871년 문헌서원과
함께 훼철되었으나 지금까지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
고 임진왜란 이전에는 수문장이었다. 자는 군보이고 원의의 6세
손이나 친상을 입고 집에 돌아와 있을때 왜구가 쳐들어 오고 선
조가 의주로 피난간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단신으로 분연히 뛰어
나와 왕의 행재소로 가는 도중, 충청병사가 부르는 바가 있어
그 진중에 들어가 여러곳의 싸움에서 적을 무찌르며 분전하였다.
그후 충청병사를 따라 진주로 들어가려고 할때 왜구의 무리가 사
방으로 둘러 쌓고 있어서 그는 군사를 이끌고 3일간 싸워 진주성
에 들어가서 전세를 살핀 즉 적이 반드시 역습해 올 것을 감지하
고 황진에게 말하기를 오늘은 적이 들어 올만한 요충지에 복병
을 좌우로 매복시켰다가 적이 쳐들어 올 때 공격을 하면 승전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적에게 성을 빼앗길 것이라고
건의하였으나 황진은 귀담아 듣지 않다가 과연 적의 공격을 받
아 성이 함락되었다.
왜적이 쳐들어오자 노정필은 병사를 이끌고 단독으로 진주성 한
구석을 지키며 힘을 내어 죽기로 싸워 활을 잡아 왜구를 무찌르
고 힘껏 싸웠으나 화살이 떨어지자 길을 뽑아 단독으로 왜구의
진중으로 돌입하여 적을 무수히 무찌르며 싸웠다.
그러나 죽여도 죽여도 몰려드는 적을 감당치 못하고 힘이 빠져
죽으니 인조 10년인 1632년에 병조참의에 추증되고 숙종 39년
1713년에 정문을 세워 그의 공로를 후세에 귀감이 되도록 하였다
이종학(李鍾學)
1361(공민왕 10)∼1392(태조 1). 고려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문(仲文), 호는 인재(麟齋). 곡(穀) 의 손자이며, 색(穡)의 둘째 아들이다. 1374년(공민왕 23)성균시에 합격하고, 1376년(우왕 2) 문과에 동 진사(同進士)로 급제하여 장흥고사(長興庫使)에 제수되었다. 그뒤 관직이 밀직사지신사(密直司知申事)에 이르렀다. 1388년 우대언(右代言)으로 요동정벌군이 출정하기 전 조병육정 신(助兵六丁神:군사를 陰助하는 6정신)에게 초례(醮禮)를 행하였 다. 창왕이 즉위한 직후에는 성균시를 관장하기도 하였으며, 곧 승진하여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가 되었다. 1389년(창왕 1)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는데, 아버지 색이 정 권의 핵심에 있으면서 두 해에 걸쳐 과거를 관장하자 사람들의 시기를 받았다. 공양왕이 즉위하고, 색이 탄핵을 받게 되자, 더불어 폄출(貶黜) 되었다. 1390년(공양왕 2) 윤이(尹彛)와 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부자가 모두 청주의 옥에 갇혔다가, 마침 홍수가 나서 사면되었 으나 다음해 다시 원지로 유배되었다. 그뒤 다시 소환되었으나, 1392년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된 뒤 이 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탄핵을 받아 함창으로 유배되었다. 이해 조선이 들어서면서 정도전(鄭道傳) 등이 손흥종(孫興宗)을 시켜 그를 살해하려고 하였는데, 자기의 문생인 김여지(金汝知) 가 판관으로 있어서 그의 비호를 받아 무사하였으나, 장사현(長 沙縣)으로 옮기는 도중 무촌역(茂村驛)에서 제찰사, 손흥종이 권 세있는 신하의 뜻에 뇌동되어 목을 메어 죽이니 당시 그는 32세 였다. 그는 죽음에 임하여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내 명문으로써 모 든 사람들이 미워하는 바에 이르니 너희들은 과거에 응하지 말 라."하였다. 후에 한산의 문헌서원과 진천의 진현서원에서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인재유고》가 있다. |
홍미 (洪 米)
다 선조 때 태어났다. 학문에 재주가 뛰어나고, 문장이 빠르게
성장했다.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섬겼는데,(부모님 병환에)
부지런히 탕약을 다려 드렸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넣어드
렸으며, 부모의 상에는 슬퍼하며 예를 다하고 평생 치아를 드러
내 보이지 않았다. 밖으로 나아가지 않고, 죽림모옥(竹林茅屋)
에서 지내며 리(利)를 말하는 것을 사절(謝絶)하고 고향에서 지
내면서 글을 읊고 평생 모든 성현의 책을 공부하였다. 인종조
정묘년(1627)의 어려움 속에 호인(湖人)과 모의하여 의병을 일으
키고 공이 추대되어 도청(都廳)으로 가 군사를 모으다 왜적이 모
두 물러갔다고 하니 그만두었다. 계축년 문행으로 이름을 떨쳐
참봉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사양하고 돌아왔다.
병자호란때, 본군 군수 이안진과 더불어 의병을 모았는데, 좌순
찰사 정세규(鄭世規)의 의성(義聲)을 들으니 일도(一道)와 조정
(朝庭)에 많았다. 공이 세번 대군사부(大君師傅)를 제수받고 모
두 취하지 않다가 대군이 북에 볼모로 끌려가서 또 사부의 벼슬
을 받았을 때 공의 나이 60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공을 걱정하
니 공이 말하기를 국가가 어렵고 위태로워 대군이 (나라)밖으로
내보내져 알지 못하는 나라에 있으니 비록 놁었지만 감히
어렵다
고 싫다고 할 수 있겠는가 심양으로 따라나가 어렵고 위태로운
것을 바르게 하겠다 하였다. [서행록(西行錄)]이 있다. 상이 아
름답게 여겨 말 한 필과 궤장을 내렸고, 삼가현감(三嘉縣監)을
제수하였다. 신정비가 있다. 숙종 정해년(1707) 열읍의 선비들
이 제사를 지냈으나 지금은 터가 남아있지 않다. 묘갈문을 대사
성(大司成) 권유(權愈)가 찬하였다.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성품이 효성
스러워 부모의 상에 무덤 옆에 여막을 짓고 살았다. 묘 앞에 잣
나무가 있었는데, 어느날 산돼지가 나무를 부딪쳐 나무가 말라죽
게 되자 맹사성이 나무를 안고 울었다. 그러자 그날 밤 산돼지
가 호랑이에게 먹혀 죽어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고 한
다. 세종때에 살아서 정려(旌閭)를 받아 양세정려비가 한산 맹
씨 3세묘단 아래에 있었다.
태종때 부마인 도위(都尉) 조태임(趙太臨)의 사나운 횡포가 뜻
이 없을 정도였는데, 공이 대사헌이 되어 집의 박안신(朴安身)
과 함께 조태임을 좌부장살(坐府杖殺)시켰다. 태종은 죄가 아니
라 하고 권면하였으며, 세종때에는 정승으로 있으면서 항상 검
은 소를 몰고 다녔으니, 호가 흑우(黑牛)였다. 지금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모두 그렇게 칭한다. 성품이 음율(音律)에 능하여
항상 옥적(玉笛)을 불어 마을에 보랏빛 이슬을 내리게 하였으
니, 훗날 사람들이 그 동네를 자로동(紫露洞)이라 불렀다.
는 그러한 하나의 예가 될지 모른다. 바로 실록의 기사를 통하
여 이들을 찾아 발굴하고 사연을 정리하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본
다. 효종 1년(1650) 11월 22일조 기사를 보면 비인 유학 남회
가 상소를 올려 왕으로부터 초야의 선비로서 나라를 근심하고 임
금을 사랑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이와 같이 진언을 하니 내
매우 가상하다는 평을 들었다. 그리고 중종34년(1539) 7월 5일에
는 한산 군수 이약빙(李若氷)이 상소를 올려 노산군(단종)을 위
하여 후손을 세울 것을 청하였으며, 효종 3년 (1652) 12월 7일
서천 군수 이무(李茂)는 서천의 피폐상을 낱낱히 들어 아뢰기를
''궁가에서 떼어 받은 땅은 일찍이 임자가 있던 땅이니, 어리석
은 백성이 어찌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 둑을 쌓는 일
이 있으므로 역을 진 백성이 억울함을 호소하는데, 지세가 낮아
서 장마를 겪으면 반드시 무너지므로 쌓으면 곧 무너지곤 하여
끝날 기약이 없습니다....(중략)... 또 고을 경내에 천방사가 있
는데 이제 또한 궁가의 원당이 되었으므로 중들이 기세를 부려
사람들이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니, 밝은 세상에서 어찌 이래서
야 되겠습니까. 또 근래에 가을 환곡을 거두는 게 한창 급한데
국가에서 반만을 거두라는 명이 있었고 군대를 보충하는 일이 긴
급한데 국가에서 정지하라는 명이 있었으므로 백성이 거꾸로 매
달린 데에서 풀린 듯이 기뻐합니다마는, 군무로 말하면 날로 허
술해져서 속오군(束伍軍)에 편입된 자도 다 두 역이 있으니 사사
로이 그 기예를 익히려 하더라도 될 수 있겠습니까? 노약자를 덜
어내어 보인으로 내려 충당하여 본래의 액수를 정하지 말고 오
직 정예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라 하였는데, 왕이 이에 대하여 아뢴 말은 모두 나라를 근심하
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이니, 매우 가상하여 두세 번 보았다.
그대가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이러하다면 내가 한 고을에 대한
근심이 없어질 것이니, 그대는 더욱 공경해야 한다. 몇 가지 폐
단은 담당 관아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치하게 하겠다 하고 승정원
에 명령을 내리기를 "이른바 천방사라는 것은 어느 궁가에 속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그 고을의 사세가 매우 절박한 듯하니, 그 고
을에 도로 붙이게 하라." 하였다.
25일조 기사에 보면 훈련도감에서 임몽의 염초 제조 성공사례를
자세하게 보고하고 있다. 원래 바다 흙으로 염초를 제조하는 일
을 중국 사람들과 시도해 보았으나 실호를 얻지 못한 가운데, 서
천(舒川)의 군보(軍保) 임몽(林夢)이 여러가지 꾀를 내 시험하
여 성공을 거두고서 도감으로 찾아와 말하기를 ''어떤 곳에 가서
구워보기를 원한다''하였습니다. 즉시 감관(監官) 조효남(趙孝南)
을 시켜 남양(南陽) 지역의 바닷가로 데리고 가 굽도록 하였더
니 5일 사이에 바다 흙으로 구운 염초 1근과 함토2분(分), 바다
흙 1분을 합하여 구운 염초 3근을 가지고 왔습니다. 약제들을 합
쳐 시험삼아 쏘아보았더니 성능이 뛰어나 쓸 만하였으므로 두 가
지 약제를 각기 담아 올립니다. 필요한 바다 흙은 반드시 사람
과 말들이 밟고 다닌 염전(鹽田)에서 취하고 바닷가의 숲이 많
은 지역을 찾아서 많은 양을 구워낸다면 힘도 덜고 큰 이익을 얻
을 것입니다
우선 임몽으로 하여금 염초를 굽는 각소(各所)에서 기술을 익
히는 장인(匠人)중에 그 방법을 대강 터득한 자를 뽑아 거느리
고 다시 남양 등지로 가서 그 굽는 방법을 모두 전수케 한 다음
논상하여 권장한 후에, 충청 어사 이시발(李時發)에게 내려보내
어 남포(藍浦)등지의 소금을 구워내는 곳 중 숲이 있는 지역에
서 많은 양을 굽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
를,"내가 서쪽으로 피난 갔을 때에 바다 흙으로 염초를 굽는다
는 말을 익히 듣고 내심 기뻐하며 만일 이 방법만 얻게 되면 무
궁한 이익이 있을 것이라 여겼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의 뜻을
내려 ''이 방법을 터득한 자가 있으면 특별한 높은 벼슬을 주어
포상을 내리겠다''하였다. 그러나 그 뒤로 한 사람도 터득한 사람
이 없고 중국 사람에게도 여러 차례 물었으나 그 방법을 얻지 못
하여 마음에 늘 탄식해 왔는데 뜻밖에 오늘날 이처럼 능히 이뤄
냈으니 축하할 만한 일이다. 다만 그에 드는 힘이 얼마나 어려운
지와 얼마만큼의 염초가 얻어지는지를 알지 못하겠다. 의당 조예
가 있는 낭청(郎廳)을 보내 임몽과 다른 염초장 몇 사람을 데리
고 다시 남양 지방으로 가, 눈앞에서 직접 구워내게 해서 허실
을 자세히 알게 된 뒤 크게 논상하겠다"하였다.
기 1549년(명종4년)58세를 일기로 신사임당, 허난설헌과 더불어
조선조 중기에 3대 여성시인으로 살다 가신 자랑스런 이고장의
인물이다.
부여 중정리에서 김수천과 어머니 한양조씨의 장녀로 탄생하
여 할어버지 김축으로부터 시, 문, 서를 익혔고 이후에는 수예에
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한다.
서기1509년(중종4년)18세에 비인면 남당리의 유여주와 혼인하
여 아들 유위를 얻었다.
당시 시아버지 유기창은 중종반정때 유배지 거제도에서 풀려
나 병조참의 및 동지중추부사 등의 제수도 사양하고 비인면 남당
리에서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킴으로써 숙종조에 비인 청절사에
배향되었다
남편 유여주 또한 기묘사화가 터지자 남당리 도화동에서 우거
하면서 임벽당을 짓고 기묘의 의리를 지키면서 학인, 현인, 처
사, 의인 등으로 추앙받았으며 의성 김씨 또한 시, 문, 서, 수
에 정진하여 명원 임벽당 의성김씨로 명성을 더해갔다
이와같이 생존시에도 명원으로 이름이 높았지만 사후에는 그
명성이 더욱 세상에 알려졌으니 서기 1683년(숙종9년)에 애산 김
두명이 중국사행을 다녀오면서 명나라의 목재 전겸익이 편집한
열조시집이란 책자를 가져오면서 더욱 각광을 받게 되었다.
이 [열조시집]에는 임벽당 김씨의 시 3수가 수록되어 있었으
며 이를 본 조야에서는 그제야 명나라에까지 유명해진 임벽당 김
씨의 뛰어난 시재에 경탄과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명인 재상들
이 다투어 서문과 발문을 찬하며 임벽당 유고가 높이 평해지고
당대의 유명한 시인이요 영의정이였던 남구만의 서문도 오늘날
에 전해지고 있다
비인면 담당리에는 임벽당 내외분이 심었다는 은행나무 세 그
루중 두 그루가 보호수로 남아 그 위용과 함께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하며, 이율곡 선생의 어머니인 신사임당과 유명한 홍길동
전의 저자인 허균의 누님인 허난설헌의 유명세에 비해 이분들과
옥석을 분별하기 어려우리 만큼 작풍과 작품을 남겼으면서도 500
여년을 그늘에 가려진 채 오늘에 이르렀으니 고르지 못한 세정
에 아쉬움을 느끼며 이제 늦게나마 이고장 후인들의 무심했음을
사죄드리면서 주옥같은 유시를 다음과 같이 감상해 보기로 한다.
1. 제 임벽당
1) 작은 골의 조용하고 깊숙한 이 한 구역은
벼슬을 버리고 산수를 즐기며 근심을 잊을만하다
인간의 시비와는 전혀 무관하니
꽃이 피면 봄을 알고 잎이 지면 가을인 줄 아네
2) 수풀에 의자한 집에 티끌 하나 없으니
다만 은자가 천성을 기르기에 알맞구나
한가히 베개 베고 쉼에 봄잠이 만족하니
하는 일 없음이 마치 태초의 백성 같도다
2. 증질자 (贈姪子)
육골이 뜬구름 같이 헤어졌는데
오늘 만날 줄 어이 알았으리오
멀리서 찾아오니 한없이 고맙구나
소식이지만 가난을 부끄러이 여기지 않네
이지명(李知命)
1127∼1191 한산(韓山)李씨로 자는 낙수(樂水)이며 시호는 문평(文平)이다.
18세인 1144년(인종 22년)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황주서기(黃州書記)에 임명되니
관직에 있을 적에 청렴하고 정직하며, 굶주린 백성을 구휼(救恤)하여 살린 사람이 많았다.
후에 충주판관을 거치는 동안 청렴하고 정직하여 특히 굶주린 사람들을 구휼하는 데 힘썼다.
경인년(庚寅年)의 난리에 중앙과 지방의 문신(文臣)이 도망하여 숨을 곳이 없었는데,
오직 이지명만은 고을 사람에게 보호되어 죽음을 면하였다.
황제가 그가 문학과 행실이 있다고 하여, 뽑아 간관(諫官), 상서우승을 삼으니,
이로부터 이르는 곳마다 성명(聲名)과 치적(治績)이 나타났다.
1181년(명종 11년) 우간의대부를 거쳐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로 임명되었다.
1184년에는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를 겸하였으며, 다음해 외직으로 나가
서해도안찰사와 서북면병마사를 각각 역임하였다.
1185년 1월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재직중 글안(契丹거란)이
실[絲] 5백 묶음을 바치자 이지명이 바쳤다.
실상은 이 귀한실은 명종이 후첩들에게 선물로 주고자 이지명이 서북면으로 떠날때
명종이 내전으로 불러들여 친히 말하길
"의주(義州)에서 비록 두나라의 무역(貿易)을 금하고 있으나 경(卿)이 마땅히
용주(龍州) 창고의 저포(苧布)를 가져가서 글안 실을 무역하여 바치라"
하여 이지명이 국법을 어기고 실을 바친것이니, 황명이 곧 국법인 시기에
후첩에게 선물코자 국법을 스스로 어긴것이니 무엇이 바로 설꼬!
한편 이지명은 타고난 문객으로 많은 서적들을 널리 읽고 사부(詞賦)를 잘 지었으며,
특히 초서(草書)와 예서(隷書)에 능하여 1185년엔 당대의 고승 현오국사를 기리는
"서봉사(瑞峰寺) 현오국사탑비"를 지어 상심한 명종의 마음을 위로하기도 하였다.
그뒤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오르고 드디어 1190년에는 팔재상중 한자리인
태자소부(太子少傅)를 겸하였다.
특히 유명한 제자들을 많이 배출하였는데 이규보(李奎報),조충(趙庶),한광연(韓光衍),
유승단(兪升旦),유충기(劉庶基)등이 그의 문하생들이니 세상에서 인재(人才)를 얻었다고
그를 칭찬하였다.
1191년 봄 정월에 졸하였다.
근대 판소리사에서 큰 이름을 떨친 판소리 명창으로서 충청남
도 서천군 종천면 도만리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종기이며 어렸을 때 이름은 동백이다
13세 때에 김정근에게 판소리를 공부하고
다시 김세종에게 춘향가를 5년간 공부하였다
20세 무렵에 충남 서천에 있는 희리산에 들어가 많은 어려움을
견디며 3년간 홀로 공부하였다.
그 뒤 경상남도 진주에 있는 이곡사에서 판소리 공부를 하고 있
던 중 창원부사의 부름을 받고 <새타령>을 불러 청중을 놀라게
하였다
특히, 고종은 그를 사랑하여 통정대부의 벼슬을 내렸고, 궁궐안
에서 소리를 하게 하였다. 1900년대 초반 서울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였는데 김창환, 송만갑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원형극
장인 원각사에서 창극을 공연하였다.
1915년에 경성구파배우조합의 일원으로 활발한 소리활동을 하였
으며 1933년부터는 송만갑, 정정렬등과 함께 조선성악연구회를
조직하여 창극의 정립과 체계적인 판소리 교육에 온 힘을 기울였
다.
이동백은 풍채가 당당하며 인물이 수려하였으며
성량이 풍부하여 소리에 대한 인기가 1950년 작고하기까지 계속
되었다.
판소리 가운데 <심청가>와 <적벽가>를 잘 불렀고
특히 ''새타령''을 잘 하였는데 이동백이 가장 장기로 삼았던
''새타령''은 판소리 도중 곳곳에 끼워 불러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고 한다.
이동백의 소리를 담은 음반이 수십종 남아 있는데
그 중에서 특히<새타령>과 흥보가 중 ''제비 후리러 나가는 대목''
심청가 중''범피중류''대목이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사가 되었고 벼슬은 추성익위공신 봉익대부 지밀직사사에 이르렀
다. 공의 생졸년은 알 수 없다. 문정공이 기사년에 시를 지
어 ''지난해 장가가 죽었으니'' 라고 하였으므로, 공은 무진년에
죽은 것으로 생각된다. 공은 하늘이 내린 효성이 있어 문정공이
그것을 가상히 여겨 말하기를 "착한 아이와 착한 며느리 정겹기
가 금슬 같았도, 아침저녁 부모를 봉양하느라 잠시도 쉴틈 없
네. 빙어와 겨울 죽순을 보니 나라 정치 잘 다스려지고, 봉황새
와 벼이삭에도 제왕의 은혜가 깊도다." 라 하였다. 묘는 금천 고
우봉 오이릉에 있다. 지금은 개성에 속해 있다. 지금은 실전하
여 단을 세우고 4절일에 향사한다. 구지는 고촌이다. 포은 정몽
주가 만사에이르기를
이로부터 한산에 착한 선을 쌓았으나,
현명한 낭군 수 못하고 필경은 어디 갔는가.
고래로 이 이치는 힐난하기 어려우니,
성인 공자로도 백어를 곡했더라.
시에 합격하였고, 중종 정묘년(1507)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가선
대부 전라 감사를 지냈다. 가선대부로 중종 무인년(1518)에 내려
갔다가 기묘년(1519) 5월 임지에서 죽었다.
소은이다. 세조 을유년(1465)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급제의 증서
를 주기 전에 직제학에 임명되었다. 병술년(1466)에 중시에 합격
하였고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다. 정통 신유년(1441)에 태어나 문
과에 장원급제하였고 신축년(1481)에 죽었다. 이조판서에 증직되
었고 시호는 헌평이다. 문장에 명성이 있었으며, 묘하는 교하에
있다.
제하였고, 이조정랑을 지냈다.
냈다고도 한다.
자원에 있다.
에 태어났다. 이시애의 난에 장군으로 난을 토평하여 성종 신묘
년(1471)에 순성좌리공신이 되었다. 벼슬이 숭정대부 찬성 한성
부원군에 이르렀고, 신축년에 죽었다. 영의저에 증직되었고 시호
는 안소이다. 묘는 고양 궐산에 있고 찬성 이파가 묘갈을 지었
다.
지냈다고도 하였다. 묘는 숭정에 있다.
성에 따라 조선조에 대간을 지냈고, 여러 조에 참여하여 대언, 4
도의 관찰사를 역임하였더ㅏ. 정통 3년 무오년(1438)에 죽었다.
순충적덕병의 보조공신 대광보국승록대부 의정부영의정 한산부원
군에 증직되었다. 묘는 문정공묘 계원 고촌 구택에 있다. 비석
이 있고 글냉 이종선의 효자비에 대한 내용이 실려있다.
다. 묘는 고양 궐산에 있고 우암 송시열이 묘표를 지었다.
세조조에 좌익공신 한산부원군에 녹훈되었다. 시호는 공무이다.
알하였다. 집현전 정자, 우정관, 감찰을 지냈다.
다. 묘는 영모암 동록에 있다.
했다는 망릉 듣고 기뻐 시를 지어 으르기를 ൖ세에 십운과에 등
제하여, 벼슬하지않은 선비가 오늘 고개를 다스려 뚫었다. 맹손
이 처음으로 벼슬을 시작하니, 진실로 서로 비슷하다. 말년에 벼
슬을 그만두려하니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아버지는 이종덕이다.
낭장을 지냈다
노씨 족보에도 도감 판관을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묘는 군의
북쪽 마명산 간원에 있고 비갈이 있다.
벼슬에 올랐다. 명나라 영종 정통 8년 세종 25년 6월 전라도 관
찰사에 제수되었다 갑자년 윤 7월에는 김포군에 임녕되어 청백함
과 선정의 치적이 명환록에 기재되어 있다. 선덕년간에 좌부대언
으로 있으면서 상소를 얼려 임금을 깨우친 기록이 박챙년이 지
은 설원록에 기록되어 있다. 최항, 성상문이 임금의 명을 받들
어 지은 설원록에 이르기를 "巍는 높다는 뜻이고, 亢은 밝힌다
는 뜻으로 숨김이 없고 피하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하였다. 관
직은 숭정대부 판중추원사에 이르렀다. 묘는 고우봉 오이릉 곤원
에 있다.
렀고, 병조참의를 증직받았다. 묘는 문정공의 묘소 좌측게원에
있다.
이윤창(李允昌) :
이르렀으며 학생이 있었다. 호는 금소헌이다. 단종이 왕위에서
물러나자 분개하여 불락하고 사직공 서와 함께 속세를 떠나 은거
하였다. 뒤이 중직대부 사헌부 집의로 증직되었다.
이균(李 均) :
여 관직이 홍문관 부제학에 이르렀다.
박수채(朴秀菜) :
하표동 경수산에 있다.
이극번(李克蕃) : 보기의 증손이다. 관직이 교관에 이르렀다
박순신(朴舜臣) :
제수받았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묘가 표동에 있다.
이욱(李 昱) :
다. 묘가 광현에 있다.
(1480)화에 직학공과 더불어 죄를 입었다,. 묘는 마명산에 있다.
지냈다. 묘가 양지동 임좌원이다.
이윤번(李允番) :
(1480)사마시에 급제하였고, 성종 임자년(1492)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가선대부 대사간에 이르렀다. 묘는 본군 사성동 사직공
의 묘소 좌록에 있다.
박세광(朴世光) :
는 임재다. 면천군수를 지냈다. 묘가 남하표동 경수산에 있다.
이세침(李世侵) : 이욱의 아들로 자는 헌숙이다. 묘가 광현에 있
다.
이세유(李世瑜) :
이다. 진사였고, 후에 이조참판에 중직되었다. 묘는 문효공묘 아
래에 있다.
호는 한소, 한재, 또는 한소당이다. 15세인 고려 신우 11년 을축
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본조에서 의정부 우찬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혜이다. 묘는 우봉 판중추공 묘 하원에 있다. 선생안에
는 문형을 맡았다고 하였다.
에 사신으로 가서 한 가지의 물건도 지니지 않고 돌아와 주머니
와 전대가 모두 비어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그 청렴함을 칭찬하
여 말하기를, "진정한 관인이다"라고 하였다.
고 진사를 지냈다고도 한다.
무를 지냈다. 원 무종 지대(至大)3년 고려 충선왕 2년 경술
(1310) 7월초3일에 죽었다.
원나라에서 봉훈대부 비서감승에 증직하였고, 고려에서 광정대
부 도첨의 찬성ㅅ에 추증하였다. 묘는 암동 남록 진원에 있다.
고려조에 모든 군의 6품 수령은 감무라 하였고 조선 태종 13년
(1413)에는 감무를 현감으로 고쳤다.
헌대부 형조 판서, 가선대부 동지중추원사를 지냈다. 태종 계축
년 2월에 태어나 갑인년 8년에 죽었다. 시호는 양도이다.
남록에 있고, 표석이 잇다. 뒤에는 방손 이계옥과 이봉서가 비석
을 다시세웠다.
여 벼슬이 국자사업에 이르렀다. 문장이 뛰어나고 아버지의 품격
과 덕을 지녔다.
에 태어나서 병자년 생진과에 합격하였다, 성종조 병오년(1486)
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연산군 때 집의로서 점필재 김종직을 구
하려다 강계에 유배되었다. 관직이 좌의정에오르고 한원군에 봉
하여졌다. 신묘년(1531)에 죽었고 묘는 침산에 있다.
다. 벼슬이 가선대부 황해감사에 이르렀다, 단종 계유년(1453)
에 고양에 물러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계사년(1473)에 죽었
고 호는 망월암이다. 묘는 고양 침산 삼탄에 있다. 이승소가 묘
갈을 지었다.
신을 낮추고, 아름다운 마음을 품어 세상을 등져, 여러번 불렀으
나 나가지 ㅇ낳았다.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우맹선(禹孟善1475 ~ 1551) :
이 병조판서에 이르렀으며, "명신록"에 자세히 나와있다.
이언홍(李彦洪) :
사복시 첨정을 지냈고 집의에 증직되었다.
이우(李 遇) :
급제하였고 세조조에 중시에 합격하였다. 벼슬이 대사성에 이르
렀고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이파(李 坡1434 ~ 1486) :
인년(1434)에 태어나 18세인 문종 신미년(1451)에 문과에 급제하
였고, 병술년(1466)에 발영시에 합격하였다. 벼슬이 좌찬성에 이
르렀고 경오년(1450)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양관의 제학을 지냈
다. 시호는 명헌이다. 사람됨이 총명하고 전례와 고사를 많이 알
았다.
자는 여실, 호는 남강이다. 가정27년(1548) 진사에 올랐다. 일곱
살에 양친이 모두 병석에 눕게 되자 부모가 누워있는 사이에서
약을 올리고 시중을 드는 것을 30년간 계속 하였다. 하늘이 낸
순효함으로 천성이 효성스러워 친찬을 바라지 않고 극진한 정성
으로 공경하였으며, 또한(양친이)병석에 있었을 때 정하여 눈뭉
릉 흘리고, 3년간 묘 옆에 초막을 짓고 살면서 3년간 아침저녁으
로 무덤에 올랐고 바람이 불고 비가와도 그만두지 않았다. 제사
를 지낼 때도 정성을 다하여 살아 계실 때처럼 하였고, 신혼을
반드시 지켰다. 효행으로 정려를 받았다. 문행으로 천거되었으
나 등용되지는 못하였다. 임진왜란때, 참판 신담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호서를 지켜따. 가목서원을 창건하고 사액을 청하였더니
조정에서 문헌이란 사액을 내려 묘소를 수호하게 하였다. 모두
공이 비롯하여 시작한 것이다. 평생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효
우가 깊으며 항상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암송하였고, 시골에 살면
서 쓴 8영이 있다. 갑자년에 죽었고 묘는 광현 임원이다. 묘지명
을 과묵당 흥미가 지었다.
나 혼란한 조정에서 일하기를 그만두었다. 인조반정후 효우로서
천거되어 정사를 보았다. 처음 관직이 찰방으로 폐단을 없앤 공
적이 있어 비석이 세워졌다. 참판에 중직되었고, 묘소가 본군 동
쪽 유산에 있다. 남계 문수공 박세채가 지은 권보의 묘갈이 있
다.
군현(權現) :
었다. 어릴 때부터 지극한 행실이 있어 모친이 평석에 누워 사경
을 헤멜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약에 타 드렸고, 부모의 상
에는 모두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올바를 선비
로 천거하여 재랑에 오르고 벼슬은 현감에 이르렀다. 숙종 계사
년 효행으로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스스로 지문을 짓고자 하였
으나 효때문에 능히 행하지 못하였고, 신명을 소원하였지만, 우
때문에 그 정을 펼치지 못하였다. 묘가 상산 사연에 잇다. 문청
공 김창흡이 찬한 묘갈문이 있다.
권호(權誨) :
써 공부하여 문과급제 하였다. 효종 정유년 생원이 되었고 시남
유계에게 배우고 선생을 따라 유하며, 송시열과 송준길 양 선생
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면서 불교 서적을 보지 않았다. 관
직이 봉사에 이르렀다. 묘가 유산에 있고 현석에 문수공 박세채
가 찬한 묘표가 있다.
루다. 어려서 아무 속박도 부끄러움도 없었다. 부친의 명으로 박
사를 업으로 삼았다. 만력 기축년에 생원 진사에 급제하여 문장
이 뛰어난 막내 석주 권필과 함께 벼슬길에 나아가 이름을 나란
히 하였다. 9살에 송도를 유람하였는데, "눈처럼 희 ㄴ 달은 전
조의 색이고, 차가운 조종소리는 고국의 소리로 구나"라는 문장
을 지었다. 광해군 임자년 석주가 화를 입자 조카와 함께 일광
산 아래어서 우거하였다. 이에 세가를 이루었다. 인조 계해년 교
관 벼슬을 받았다. 주부에 이르렀다. 참판으로 증직되었다.
권집(權 緝) :
어났다. 음사로 벼슬길에 나아가 여러 고을에서 수령을 역임했
다. 어려서부터 높은 재능과 글이 뛰어나 칭찬을 받았다. 여러
번 재앙이 있었는데, 사람들을 피하게 해주었다. 숭정 인조 기묘
년 문과에 장원급제 하였고, 갑신년 참녕으로 국훈을 세워 관직
이 참판에 이르렀다.
정 29년에 태어났다. 관직은 공을 세워 종부직장에서 동추가 되
었다. 인조 임신년 나이 83세에 죽었다. 묘는 문효공 묘의 서ㅉ
고에 있다.
이수(李 穗) : 이욱의 손자. 사마급제 묘는 부여에 있다.
이미(李 薇) :
부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여 가선대부가 되어 관직이 대사헌에 이르렀다. 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였고, 갑자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영천군수를 지냈다. 묘가 경수
산에 있다. 자가 중선이다. 선조 정축년에 생원이 되고, 기유년
(1609)에 진사가 되었다.
정 40년에 즉 명종 20년 을축년(1565)에태어나 만력 38년, 공해
군 2년 경술년(1610)에 진사가 되었다. 이해에 태학에 있으면서
상소하여 김굉필,정여창,이언적을 문묘에 종사하기를 청하였다.
학행이 있으며 문장을 스스로 즐겼다. 공해군 3년 신해년(1611)
에 죽었으니 애석하게도 오래 살지 못하였다. 묘가 영묘 남쪽에
있다.
생원이 되었고, 선조 갑술년문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때 호
참으로 호남지방을 다스리고, 승진하여 자헌지중추삼도도순찰사
가 되어 이충무공과 권충정공을 탁용하여 바다와 산을 방비해 호
남을 편안하게 하였으며 재차 근왕하여 양중도를 패환하고 또 겨
우 말만으로도 가지런하게 하였다. 인조 초에 윤오음,오추탄, 김
선원 등과 함께 복관되었다. 문집이 남아 전한다. 정축년에 고부
에 있던 묘소를 본군의 추동으로 이장했다.
생원이 되었다. 천성이 총민하여 시로서 구욕새와 앵무새를 울렸
을 정도였다. 상황지사가 악부 중에 전해지며 강호에서 늙어 죽
었다. 대사헌에 증직되었다.
송유순(宋愉詢) :
원이 되었다. 임진왜란에 예빈시 직장으로 왕을 호종한 공이 있
어 을사년에 책훈되었는데. 1등이 올라 통종참의가 되었고, 선무
일등으로 가선참판이 되었다. 후에 청난일등으로 자헌좌참판에
증직되었다
러워 부모의 상례때 묘 엎에 여막을 짓고 잇지 하얀 까마귀가 여
막에 둥지를 틀었고 아침저녁으로 피눈물을 흘리자 묘의 풀이 모
두 말라 죽어버렸다. 공양왕 때에 살아서 정려를 받았다. 학문
이 깊어 수많은 후학이 그를 따랐으며, 고려가 망하자 벼슬이 전
교부령에 이르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송경으로부터 온양 오봉산 아래로 이거하였으며, 고려가 망하자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온양에 서원이 있다. 영조가 온양에
행차할 때에 제문을 지어주었다. 이를 간략하게 말하자면, 영조
가 온양에 행차할 때에 제문에 이르기를, "눈물로 무덤가의풀이
말라 죽으니...어찌 슬프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백헌 이경석
의 전기를 지어 '백이와 숙제'로 칭하였고, 청음 김상헌으니 맹
사정의 시를 지어보내어 이르기를
긴세월이 흘러도 동포의 위에 있으만한
높은 절개를 가히 기대할 수가 없구나.
라고 하였다. 공은 포은 정몽주와 더불어 우정을 나누었는데, 포
은이 글로 찬하여 말하기를 "높은 절개는 세울이 지나 아들 문정
공으로서 빛이난다."라 하였다. 영의 정에 증직되었다.
친상을 당하자 여묘하며 예를 다하였고, 상복을 벗지 않았다. 임
진왜란을 당하자 그 형조엄과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원주의 영원
산선으로 피난하였다. 그러나 성이 함락되어 어머니에게 적의 칼
날에 쓰러지는 것을 보자 형제가 앞을 다투어 어머니를 감싸니
칼날이 그들에게 내리쳐졌다. 적이 물러간 다음에 집안의 노비
가 가서 찾아보니 어머니와 형은 이미 죽었고, 조준만이 초립으
로 머리와 목이 가려져 절명되지 않았으므로 노비가 의복을 찢
어 상처를 싸매어 구호하니 겨우 회생하였다. 원주사람들과 고을
의 여러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려 정려와 증직이 내려졌다.
부정에 이르렀다. 묘는 본군 묘동 묘좌원이다.
이총(李 總) : 이욱의 손자. 음직으로 참봉이 되었다.
이세찬(李世贊) :
빛내지 않으며 통덕랑을 지냈다. 묘는 영모 남쪽 기슭에 있다.
박대봉(朴大鳳) : 을유년 사마시에 급제하였다. 묘는 경수산에 있다.
되어도 인생의 멋을 한결같이 하였고 비록 가세는 빈하여도 윗사
람을 봉양하는 데는 마음을 남겨두는 것이 없어, 향당에서 흠모
하고 찬탄하였다. 부모의 병환에 약시중으로 근심하여 얼굴이 초
췌하였고 비록 잠시라도 그 팔순 노친이 잠자리에 들 때까지 의
관을 벗지 않았다. 비록 망언으로 그를 구짖어도 관을 벗고 마당
에 내려가 땅에 엎드려 죄를 기다렸으며 바람이 불고 비가와도
피하지 않고 명령을 기다렸으니, 이러한 그의 마음 하나를 통해
서 그의 모든 행실을 알 수 있다. 부모의 상을 당해서는 모두 예
법에 따라 하여 길러준 은혜에 감응하여 장사를 지냈다. 성격이
성실하고 지성스러워 인으로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의로 친족들
을 우애를 돈독히 하였다. 그리고 모든 동정이 반드시 사단에 부
합되어 숭상되었으니, 군자에 이르렀으며 지극한 효자였다. 학식
의 명예는 한 세대뿐 아니라 백댜가 지나도 변함이 없을 것이
다. 아버지 송정이 검은 소 꿈을 꾸면서 승복을 입고 최치원을
만나 서로 자적하기로 약속하고 4운시를 지었다.
시에 이르기를
황홀하고 또 황홀하지만
꿈속에서라도 올바로 하려고 하네
푸른 바다는 해르 ㄹ태운 수레처럼 평안하여
밝은 낮에 듣다가 새벽가지 이르렀네
용에 제사를 지내고 옥 술잔을 기울이니
섬 너머로 구름이 낱낱으로 올라가는구나
울면서 벗과 이별하니
십 년도 세상은 변하지 않았지
그러므로 이 시는 송정공의 아래에 수록해야 마땅하다.
미년에 알성과에 급제하였다. 기사년 많은 선비들의 구제함과 갑
술 옥사로 둘째 아들 이현석이 성균관 학사들을 이끌고 앞장서
서, 시상이죄를 입게 되었다. 공이 시상과 평소 친하였으므로 시
상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누가 아들을 시켜 나를 죽이려 하니,
그를 원수와 같이 여긴다."고 하였다. 만경현령에 제수되었고 신
사년에 시상은 죄로 면했다. 귀락당 이만성이 전형하여 몇 일 사
이에 다시 법종지선에 의망하였으나 몇 일 이 지나 병으로 죽었
다. 벼슬이 병조좌랑에 이르렀다. 임록문에 보인다.
술년(1562)에 태어났고, 선조 임자년(1612)생원이 되었다, 문장
이 탁월하였고, 행동에 의가 있었다 죽림모옥에서 바르게 살며
리를 말하는 것을 사절하고, 개긋이 몸을 지키기로 다짐하고 평
생 공부하였다. 계축년(1613)에 죽었다. 묘가 본군에 공이 살던
유월 남쪽에 있다.
이 덕을 갖추고 순후하여 옛군자의 풍모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부모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으며 타고난 재주가 있었다. 집이
매우 가난하였으나 맛있는 것으로 부모에게 드렸으며, 밤에는 부
모의 이부자리를 보살펴 드리고 아침에는 안부를 물었고 부모를
공양할 때는 하루도 게으름이 없었다. 약을 지을 때는 얼굴에 근
심하는 기색이 가득하였으며 바로 옆에서 모시면서 변을 맛보았
으며, 비록 춥거나 더워도 물러나 쉬지 않았다. 부모의 상을 당
해서는 3년상을 마치고 한번도 웃음이 없었다. 흉년을 만나 기일
에 술을 올라지 못하자 평생토록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학식
이 고명하여 후학들을 이끌었다.
8세에 문사가 탁월하였고 성질이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였다. 여러번 과거시험을 보았지만 합격하지 못하
다가 숙종 병진년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사헌부 감찰이 되었을
때, 부임하기도 전에 특별히 위원군수에 제수되었으나, 받지 않
고 물러나 한산에 거하면서 형제가 여생을 마쳤다. 스스로 즐거
워하며 다시는 벼슬에 나깆 않았다. 임신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묘는 상북 후덕동 자원에 있다.
가 변을 당하여 서우로부터 본군 수출동으로 흘러 내려와 거주하
게 되었다. 부모가 머리와 배가 아플 때면 자기가 반드시 머리
를 잡아당기고 배를 열어 하늘에 기도하기를 "나의 머리와 나의
배가 아프게 해달라"고 말한 즉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홀연히 병
이 스스로 나았다. 아버지가 이질에 걸려 위중해지자 남역 방죽
변에서 울부짖다가 4마리 물고기를 얻어 약으로 드리니 병이 낳
았다. 어머니의 병환에 목욕하고 자기가 대신 아프게 해달라고
하늘에 기도하였으며, 손가락을 3번 잘라 드리니 병에 차도가 있
었다. 부모가 산노루를 먹고 싶다고 하니 산에 올라 만약 천둥
이 치고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면, 양 무덤을 덮고 그 위에 어루
만지면서 그곳에 엎드려 울부짖으며 말하기를"슬프도다. 돌아가
신 우리 부모님이 그 춥고 습기찬 곳에 계시니 놀라고 두려움이
없겠는가"라 하고 밤에도 거두지 않고 종일 날시가 맑기를 기다
려 집에 돌아왔는데. 75세로 죽을 때까지 이러하였다. 또한 기이
한 머리카락이 있어 자르니, 길이가 3척 5촌이었고, 풍채가 범상
치 않았다. 숭정후 을미년(1655)에 명정을 받았다.
송년이라 하였다. 문예가 다른 사람보다 뚜어나 어려서부터 시부
를 공부했는데, 종이를 잡으면 그 자리에서 완성하였다. 향시에
서 우연히 만나 더불어 한 사람이 십수명이다. 오늘에 이르러 남
은 목숨이 있어 길거리에서 노는 철없는 아이와 길거리를 소다니
는 경박한 사람들이 그 이름을 알지 못함이 없었다, 도리어 기상
이 크고 이룸과 저몸없이 시와 술로서 스스로 즐거워하여 무릇
근심과 기쁨과 편안함이 모두 시에 있었으며, 유고가 남아 집안
에 보간되었다. 아동들이 모두 초만의 문장이 탁월한 것을 아
니, 세상에 이름이 드러났으나, 여러본 없어지고 흩어져 종래에
는 공에게서 완성을 보니 어찌 번거롭겠는가.
(1756)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정조 8년 갑진(1784)에 임기가
차서 경술년 (1790)에 음직으로 인제 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벼슬
을 그만두고 서울로 돌아왔다. 신해년(1791)에 임금이 문음관에
게 명하여 시문을 짓게 하였는데, 이 때 지은 시가 1등오로 뽑
혀 임금이 ''유성화''라고 쓴 3자와 경림문회록을 내렸다. 계축년
(1793)에 우부승지에 제수되었다가 곧 우승지에 제수되었다. 천
성이 온화하고 넓었으며, 문장이 웅대하고 넉넉하였다. 일찍이
선비로서 이름난 산천을 두루 살펴보았고, 계묘년(1783)에 백두
산을 유람하며 글을 지어 백택 용산에게 제사를 지냈다. 안개를
헤치고 대각봉에 올라가 시를 지어 이르기를
마땅히 우리나라의 음뜸으로 칭해지니
나는 백두산의 늙은이가 되었다.
가을 바람을 맞으며 대각봉에 오르니
석양에 중원이 보이는 구나
라고 한 시구가 널리 알려져 임금에게까지 알려졌다. 임금이 특
명으로 불러들였고 친기 시구를 써서 책상위에 올려 놓고 외웠
다. 벼슬이 승지에 이르렀다.
을 만나자 처자르 버리고 어머니를 업고 달아났다. 적이 처를 탐
하고 창으로 찔러 죽이고 자식을 죽일 때는 멀리 숨어 있었다.
그러나 다음날 또 적을 만나달아날 곳을 찾지 못하게 되자 어머
니를 업고 슬피 울며 손가락을 끊어 던지니, 적이 불쌍히 여겨
놓아주므로 깊은 산골자기로 들어갔다는데, 먹을 것이 떨어져 어
머니가 몹시 고기를 먹고 싶다하였다. 어머니는 원래 장님이라
앞을 보지 못하므로 허벅다리를 베어서 어머니게 드렸는데 아직
다 먹기도 전에 능히 사물을 보게 되었다. 이 일이 알려져 정려
를 받았다.
이 지극히 훌륭하였으며, 살아서의 효도와 죽어서의 장례도 모
두 예경을 좇으니 향당에 존중한지 오래이다. 숙종 기사년에 이
르러 그가 산사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왕비가 퇴위하였다는 소문
을 듣고 곧바로 입성하여 대궐앞에 이르니 삼대신은 이미 형을
받았다. 또 상소를 금하는 새로운 령이 내려졌다. 여러 선비들
이 당황하여 어쩔줄 몰라 하는데, 조시태가 군중 속에서 뛰어나
와 말하기를 "오늘의 걔획은 그 잘못된 것이 하늘이 알고, 임금
의 침실까지 우는 소리가 들리는 즉 이는 시정하여야 한다. 그
시정할 사항을 내가 죽기를 한다고 발의하는 것이 나를 따르시
오."라 하였다. 이 때에 연양인 이제, 이오 형제및 이현석이 함
께 죽기를 청하니,인하여 이제. 이오 및 이현석과 함께 울부짖으
니 여러선비들이 대궐 앞에서 호곡하였다. 여러 날을 대궐 앞에
앉아 있었으나 대궐문은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으므로 어쩔수
없이 집으로 돌아와서는 스스로 죄인이라 자청하고 바깥출입을
삼갔으며, 죽을 때까지도 도성의 문밖에도 나가지 않았다. 이 일
을 듣고 증직하였다.
에 태어나 인조 임오에 사미시에 합격하고, 병술년 음관으로 천
거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효종 임진년에 34세의 나이로 세상
을 떠났다.
을 받았다. 독실하게 배우고 수행하여 처믐 벼슬을 하기에 이르
렀다. 유익함을 구하였고, 선생이 써준 ''근근화완'' 네글자를 죽
을 때까지 가슴에 안고 잤다. 효종 병신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이 집의에 이르렀다. 성품이 소박하고 고결하여 영화를 즐기지
않았고, 늦은 나이에 벼슬길에 나아갔다. 네아들이 모두 등과하
여 한때 위세가 대단하였는데 겸손하게 종신토록 집에서 지냈
다. 조정에서 그가 깨닫고 물러나는 것을 어여삐여겨 도승지에
증직했다. 훗날 자식이 귀하게 되자 더하여 이조판서에 증직되었
다. 묘가 서천의 금단리에 있다.
이안진(李安眞) :
이광의 아들. 자는 보여, 호는 청ㅎ 문학으로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고, 생원진사시에 입격하였다. 광해군 계축 년(1613) 8도의 관학생들을 이끌고 상소를 올려 정도, 윤인, 이 위경등에게 죄를 주어 목을 벨 것을 청하였다. 인조반정후 청양 현감을 제수받고 을해년(1635)한산군수에 올랐다. 병자호란때 관 군을 모아 의병장 홍미과 함께 행군하여 직산에 이르렀을 때 화 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돌아왔다. 조정에서 숭 덕연호를 쓰도록 명하자, 공은 치욕스럽게 여겨 벼슬을 버리고 제천 골짜기로 들어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최감파가 연에 있으면서 시로써 보내어 이르기를 "한가롭게 척박한 밭을 일구 니 봄이 스스로 은산에 와있구나. 어찌 나아가 방미를 케겠는 가."하였다. 세상이 칭하기를 ''계해징사또는 숭정처사''라 했다. 숙종때 많은 선비들이 글을 진달함으로써 이조참의에 증직되었 다. 국자지의 존주 및 봉당집에 호남의 많은 선비가 서원을 세우 기 위해 통문을 돌린 것이 있는데, 여기에서 이르기를 ''글을 올 려 부르짖으니 대궐을 떠받치는 동방의 3뱍년 법도에서 벼슬을 버리고 산에 들어가 굳게 서있는 나무가 있으니 천하에 천만세가 르침이 된다. 한산동문안에 유애비가 있다. |
균관에 들어가 예원의 명성이 잇었다. 만년에 향리에 돌아와 꽃
과 대나무를 심고 날마다 음운을 읊어 많은 객들이 다녀갔으며,
당나라의 율도에 이르렀다. 시를 논한 글이 동방의 명가에 드어
갔고 평생 인후하고 신중하였으며 행의에 부족함이 없었다. 관찰
사가 그를 천거하여 이르기를 향리를 바로잡고 덕의가 있으며 나
라를 빛내고 시문에 재주가 있다."고 하였다. 유교가 집안에 전
한다.
성이 지극하여 아버지가 병들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렸다. 일
찍이 생원과 진사가 되어 숙종 병인년에 얼신 조사기가 인현왕후
를 무고하여 욕보이자 제생들과 더불어 상소하여 법을 살필 것
을 청하였다. 무진년(1688)가을에는 친구인 윤경적 등과 상소하
여 시사를 논하였다. 기사년에는 왕후가 폐위되자 정재 박태보
를 따라 후에는 여러 선비들을 불러 스스로 상소문을 지어 이를
여러 번 올렸다 그러나 후원이 막음에 따라 이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궐문 밖에서 소리를 내어 슬피울었다. 갑술
년 환국에 장희재를 벌하였는데, 성균관 학사 서문택, 김유경 등
이 춘추시대 조돈의 뜻을 끌어 당시의 재상을 벌려 줄 것을 청하
였고 이로 인해 해를 당하였다. 벼슬이 종묘봉사에 이르렀다. 재
상 이의현이 기사년에 죽은 선비라고 칭하였다. 문공경 여호 박
필주가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집안의 정재 박태보와 더불어 서
로 같이 갈 만하다"라고 이른 것이 "국자지"에 기록되어 있다.
다. 자는 형원이고, 호는 월담이다. 숭정15년, 인조20년 임오년
(1642)에 태어났으며, 일찍이 우암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
다. 부모 섬기기를 지극한 효성으로 하였으며, 한굼을 좋아하여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숙종 기사년(1689)에 이후에는 세상
과 사람들의 미움과 시기를 피해 산야에 머물면서 성리학의 오묘
함을 탐구하며, 마음을 곧게 하고 애쓰고 혼자 착하게 살며 한가
롭게 지냈다. 관찰사가 경학과 효우로써 천거하여 계를 올리니,
후릉참봉에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천거하면서 이르기를:
그 학문이 푸르게 드날리고 흰머리로 바른 효가 있었다."라 하였
다. 숙종 33년 정해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묘는 군 남쪽 등갈동
자원에 있다.
무자년에 생원이 되었다. 어려서 고아가 되었다. 겨울에 어머니
가 병이 들어 수박이 먹고 싶다 하여 구하였으나 얻지 못했는
데, 갑자기 한 상인이 문 앞에 이르러, 그것을 사서 바로 드리
자 병이 곧 나았고, 상인 역시 홀연히 사라졌다. 사람들이 이를
일컬어 지극한 효성에 감동한 것이라고 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
시자 무덤 옆에 초막을 짓고 3년간 죽과 미음을 마시며 시묘살이
를 하였다. 나라에서 이 일을 듣고 정려흘 내렸다.
이다. 만력 25년, 즉 선조 30년 정유년에 태어났다. 문학이 일찍
부터 성취되었으며, 효행이 지극하였다. 관찰사이 경학과 효행
과 청렴함으로써 천거하여 사산감역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
다. 정사원종공싱에 기록되었다. 병자년 이후로 주 나라의 대위
를 쫓아 두문불출하고 손님들을 모두 물렸다. 여러 차례 천거되
었으나 나가지 않고 임천에서 늙었다, 일찍이 사계 김장생의 문
하에서 공부하였으며, 효종 9년 무술년에 죽었다. 묘는 영모 남
쪽 기슭에 있고 자원이다.
개가 있었다. 어릴 때 ''푸른 연꽃과 옥같은 풀이 그윽한 골짜기
에 숨어있구나''라는 구절을 읽고 스스로 호를 ''원은'' 이라지었으
니 이미 알아보고 세상을 피해있던 뜻이었다. 숙종 신유년 사마
양시에 합격하고 기사년 증광문과전시 하루 전에 빈청회의가 있
었다. 답안을 제출하고 나오다가 처음 인현왕우가 자리에서 물러
나게 될것이라 말을 듣고 과장에 들어간 것을 괴로 워하고 뉘우
치며 응방하지 않고, 의로서 종신토록 벼슬길에 나아기지 않았
다."
숙종이 마음 속의 정절을 가상ㅎ 여겨 칭찬하였다. 영조때 왕이
비답하여 말하기를 "깊이 탖식하노니 경이 스스로 지킨 뜻은 스
스로 그린 바이고, 밝은 마음의 절개이다. 내가 어찌 가히 경이
일생토록 지킨바를 빼앗을수 있겠는가. 처음으로 한번 조정에 출
사한 것은 즉 다른 날 돌아거려는 인사를 하기 위함이었구나.
두 번의 왕조에 걸쳐 사직을 하였다. 내가 경의 얼굴을 한번 보
고자 했고, 경이 지키려는 뜻을 쫓아 뒤에서 다시 회유했으니,
이로써 경의 뜻을 펼쳐 백세의 능절로 삼지 않으려는가." 라고
하였다. 전후의 은혜로운 포상이 이와 같았우며 관직은 대사헌겸
홍문관제학에 이르렀다. 병오년에 세상을 떠나니, 호중의 선비들
이 왕에게 글을 올려 잠시 장사를 지내지 못했음을 고하였다. 속
히 하교했는데, 그때의 승지가 잘못 절달하여 장례를 지내지 못
했던 까닭이다. 특별히 이조판서에 증직하였다. 출도공이상국이
드러난 바를 시장으로 지어롤리니 문정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을
미년 특별히 치제하고 친히 제문을 지어 말하기를 "아! 생각컨
데 경을 만고에 충성스런 충절이 있어, 전시에서 모자를 쓰지 않
은 일로 ''가히 천백 세에 모범이 되리라''라는 명예로운 4자의 포
장을 숙종조에 받았도다." 충성스런 문집 집안에 전한다. 묘가
서천 금단리에 있다.묘비명이 左에 있다.
(1592)에 생원이 되고, 경술년(1610)에 진사가 되었다. 학행이
있고 문장서화가 모두 뛰어나 세상이 칭하기를 삼절이라 하였
다. 영창대군이 해를 입자 세상을 피하여 나오지 않았고 강호에
흩어져 시를 읊고, 술을 마시며 스스로를 더럽히며 당시의 높은
선비 이상형등 여섯 사람과 친구가 되어 산수에 들어가고 혹은
노래를 부르고 혹은 울며 세상을 잊고 살면서 스스로 칠광이란
호를 지었다. 세상에 전하기를 칠광비는 즉 공이 바르지 못한 바
라고 한다. 유고가 집안에 소장되어 있다.
다. 영조 기묘년(1759)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무작년(1768)
오제에 장원하였고, 신묘년(1771)승문원에 응시하여 또 장원하
여 한림에 제수되었다. 입시할 때 마다 한 어제시에
여러 마음으로 화봉에서 축원하는 공을 이루니
성인의 이룬 속 깊음에 여러 선비들이 편안하구나.
푸른 머리의 여러 신선들이 북두에 모엿으니,
옥황게서 천년 동안 살라고 하였네.
등 편이 여러 차례 포상을 받아 글을 빨리 짓는 재주가 있다고
칭찬을 받았다. 그지조가 확실하여 문장이 넉넉하였으며, 영민하
여 한 번 본 것은 쉽게 기억하였다. 붓을 잡고 쓰기를 팔이 사헌
부에 들어가고 칠이 사간원에 오른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출세하
지 못하고 현달함을 사소하고 큰 것으로 삼지 않고, 향리에 돌아
와 후진을 권면하여 그 문하에서 교유한 자들이 모두 벼슬에 올
랐다. 정조 무오년(1798)에 임금이 사간으로 급히 부르자, 현도
상소를 올려 시폐와 사학을 역진하여 임금이 특별히 비답을 내렸
다. 그 영락함을 애석하게 여기고 또한 그 사리에 맞는 말을 칭
찬하였다. 관직이 사간에 이르렀다. 묘는 군남의 하양동 자원에
있다.
게서 수업을 받았는데, 문예가 일찍부터 성취되었다. 그 할아버
지 청호를 모시고 운둔하고자 하는 뜻이 있었으나, 아버지의 명
으로 현종 경자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낭서를 역임했는데, 성품
이 강직하여 기쁨을 즐기지 않고 관직을 헌 신짝처럼 버렸다. 삼
도해군판관이 되어 순행할 때 고부에 이르니, 군수 류씨와 성을
가진 사람이 불법적인 일이 맣음으로 계를 올려 류군수의 파직
을 청하였는데, 이때의 영의정 오수시가 근인으로 권력을 잡고
권세를 마음대로 부리니, 그 무고에 얽혀들어 고초를 당했다. 벼
슬이 판관에 이르렀다.
후손이며, 을사명현 이언침의 종손이다. 문정공 우암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문학이 일찍부터 성취되었다. 전사로써
현종 무신년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과 사헌부의 벼슬을
지냈는데, 오도일이 미워하여 여러번 외직으로 갔다. 탐라를 경
유하여 진주에 이르렀을 때 삼연 김창흡이 시를 주어 가로되
"악을 멀리하여 많지 않게 된 곳은 탐라와 진주로다"근심스런 시
대에 우암선생께서 죽음을 맞이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집안의 노
비 30명을 데리고 가서 수레를 끌고 왔다.
라고 한 것이 "초산일기"에 보인다. 벼슬이 우부승지에 이르렀으
며, 아계 송치규가 묘갈을 찬하였다.
용기가 있었다. 묘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사과에 제수되었다. 정
묘년 북쪽에 우환이 있어 장충신 장군이 무사를 뽑아 별대를 조
직하고 무예를 시험하였는데, 과녁을 세워놓고 백보 밖에서 화
살 20개를 쏘아 화살을 모두 구명에 맞추니 온 군대가 모두 놀랐
다. 병자호란을 당하여 같은 군사람 성진후와 더불어 분개하며
난에 뛰어들어 용인에 이르렀다. 본도 관찰사 정세규의 군대에
들어갔는데, 군대가 패하였다. 또 화의가 성사됨을 듣고 분개하
여 떨쳐 일어나 말하기를 "사나운 의로움을 생각한다면 이때에
살아있는 것을 참을 수 없는 것이다."라 하고 거듭 옷을 풀어 맡
기며 말하기를
"만약 내가 죽는다면, 이 옷을 나의 집에 가져다 초혼장을 지내
게 해달라." 하고는 마침내 칼을 뽑아들고 적진으로 돌진하여 죽
었다. 집안 사람들이 그 옷으로써 군 동쪽 갈마산 남록 간원에
장사냈다. 권헌이 묘지를 짓고 소이재 권령이 묘표를 지었다.
경신년(1560)에 태어났으며, 선조 경인(1590)에 사마시에 합격하
였다. 그는 천성이 순수하고 아름다웠으며, 문행이 있었다. 갑자
년 이괄의 난과 병안년 오랑캐의 난 병자년 강화에 대하여 공이
먼저 그 장래의 일을 알고 상소를 올려 방어할 계책을 올려 방어
할 계책을 올렸으나, 모드 효용을 보지 못하였다. 이로 인하여
출세를 구하지 않고 물러나 한산 고향의 오둥나무 그늘 자기 집
에서 늙었다. 효제충신으로써 스스로 즐거움으로 삼았으며, 이
를 구하여 자기 자신을 이기고, 친척들을 가르치니, 주변 고을
의 풍속이 아름답게 개선되었다. 인조 임오년(1642)에 세상을 떠
냤으며, 묘가 본군에 있다. 공은 벽오에 거주하여였다.
출처:서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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