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웅이순신 ▒

1598년 7월 선조 31년 무술년 (충무공 이순신 54세)

천하한량 2007. 5. 5. 19:34
(1월5일부터 9월14일까지는 일기가 빠지고 없음)
7월16일[기해/8월17일] 「행록」에서
명나라 도독 진린이 수군 오천 명을 거느리고 왔다. 술과 안주를 성대하게 차리고, 또 군대의 위의를 갖추고서 멀리 나아가 맞아들여 큰 잔치를 베풀었더니, 여러 장수 이하가 잔뜩 취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진 도독의 군사가 처음 오던 길로 자못 약탈을 일삼기 때문에 우리 군사와 백성들이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군중에 명령을 내려 크든 작든 집들을 한꺼번에 헐게 하고, 나도 옷과 이부자리를 배로 옮기게 했더니, 도독이 이를 이상히 여기고 하인을 보내어 물어왔다.
그래서 "나는 우리 작은 나라 군사와 백성들이 귀국 장수가 온다는 말을 듣고는 마치 부모 바라보듯 했는데, 이제 귀국 군사들이 행패부리고 약탈하는 것으로 일삼기 때문에 백성들이 견딜 도리가 없어 모두 피해서 달아나려고만 하는 것이다. 그러니 나도 대장의 몸으로 여기에 혼자 남을 수가 없기 때문에 같이 배를 타고 다른 곳으로 가려는 것이라고 여쭈어라"고 했다.
그 하인이 돌아가자 도독이 헐레벌떡 달려와서 내 손을 잡고 간절히 만류했다. 그래도 나는 대인이 만일 내 말대로 하면 그러겠다고 했다. 도독이 "어찌 안될 리가 있겠소" 하기에 다시 다짐받았다. "귀국 군사들이 나를 속국 신하라 하여 조금도 꺼림이 없소. 그러나 만일 방편상 내게 그것을 금할 수 있는 권한을 허락해 주신다면 서로 보존할 도리가 있겠소"라 하니, 도독은 "그렇게 하겠다"고 승락했다.1)
7월18일[신축/8월19일] 「행록」에서
적선 백여 척이 녹도로 침범해 온다고 하기에 진 도독과 더불어 전선을 거느리고 금당도(완도군)에 이르니, 다만 적선 두어 척이 우리를 보고 달아나버렸다. 나는 도독과 하룻밤을 지냈다가 곧 돌아왔고, 녹도 만호 송여종을 남겨두어 여덟 척으로 절이도(고흥군 금산면 거금도)에 복병케 하고, 도독도 그의 배 서른 척으로써 사변에 대비케 했다.2)
7월19일[임인/8월20일] 「난중잡록」에서
새벽에 많은 적선이 우리 함대 앞으로 곧장 쳐들어와 교전이 시작되었다. 나는 진린으로 하여금 높은 곳에 올라가서 내려다보게 한 뒤 스스로 함대를 지휘하여 적선 속으로 돌격하면서 활을 쏘고 대포를 쏘아 적선 50여 척을 불태웠다.3)
7월24일[기해/8월25일] 「행록」에서
도독을 위하여 운주당에 술자리를 베풀고 한창 취한 판인데, 도독의 부하인 천총 벼슬에 있는 자가 절이도(거금도)에서 와서, "오늘 새벽에 적을 만났는데 조선 수군들이 모조리 다 잡고 명나라 군사들은 풍세가 순조롭지 않아서 싸우지 못했다"고 하였다.
도독이 몹시 화가 나서 끌어내라고 호령하며 술잔을 던지는 등 행패를 부렸다.
"대감은 명나라 대장으로 와서 왜적들을 무찌르는 것이라 이곳 진중의 모든 승첩이 바로 대감의 승첩인 것이오. 우리가 베어 온 적의 머리들은 모두 대감에게 드리는 것이니, 대감이 여기 온지 며칠도 안되어 황제에게 공로를 아뢰면 얼마나 좋겠소"라고 했더니 도독은 기뻐하며 내 손을 잡고서, "내가 본국에서부터 장군의 이름을 많이 들었더니 과연 듣던 그대로군요" 하고 종일토록 취하며 즐겼다.
이 날 송여종이 잡아다 바친 배가 여섯 척이요, 적의 머리는 예순 아홉 개 인데, 모두 도독에게 보내고 그대로 장계했다.4)

1)『李忠武公全書』권9,「부록」26,「李芬行錄」.
2)「李芬行錄」.
3) ① 조경남,『난중잡록』권3, 무술 7월 ②『선조수정실록』권32, 선조31년 8월 初一日 甲寅.
4) ①『이충무공전서』권9,「부록」27∼28쪽,「李芬行錄」. ② 『선조실록』권103, 선조 31년8월 병인(13일),「이순신의 장계」. "얼마전 바다 가운데서 싸움을 했을 때, 우리 군사가 일제히 총을 쏘아 적의 배를 쳐부수니 적의 시체가 온 바다에 가득 찼다. 싸움이 급하여 적의 시체를 배 위로 끌어 올려서 그 머리를 모두 베지 못하고 겨우 70여 급만 베었다. 명나라 군사는 적의 배를 바라보고는 먼 바다로 피해가 버렸기 때문에 적을 한 놈도 잡지 못했다. 우리 수군이 적의 머리를 많이 베자 진 도독이 뱃전에 나와서 발을 구르면서 부하들을 꾸짖는 한편, 신 등에게는 몹시 공갈 협박하였으므로 신 등은 하는 수 없이 40여 급을 나누어 보내 주었다. 계 유격도 하인을 보내어 적의 머리를 요구하므로 다섯 급을 보냈더니, 모두 고맙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③『선조실록』권105, 선조 31년 10월 병진(4일),「비변사의 제의」. "이순신이 절이도 싸움에서 적의 머리 일흔 한 급을 잘랐는데, 진 도독이 마흔 급을 빼앗아가고 계 유격이 다섯 급을 빼앗아갔다. 도독은 이순신에게 강요하기를, 단지 스물여섯 급을 자른것으로 거짓 장계를 만들어 올려보내는 한편 또 별도의 장계를 만들어 사실대로 보고했다. 왕 안찰사가 남쪽으로 내려가서 이 소문을 듣고는 우리나라에 공문을 보내어 그 일을 물으면서 동시에 그 장계를 보내라고 했다. 이제 만일 사실대로 보고한 장계를 보낸다면 반드시 도독을 큰 죄로 몰 것이므로 거짓으로 보고한 보고서를 보내주어야 하겠기에 감히 건의 하는 바이다." 사실 이순신 장군이 적의 머리를 벤 것이 일흔 한 급이며, 도독 진린 등의 협박 공갈에 못이겨 명나라 장수에게 예순 아홉 급을 자진하여 준 것처럼 조정에 거짓 보고했다. 이를 볼때 적을 치러 나간 장수들치고 공로를 탐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진린도 남의 공로를 제공로로 만들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