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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序) 송 서 도사 사환 서(送徐道士使還序) -이색(李穡)-

천하한량 2007. 4. 30. 19:49

서(序)
 
 
송 서 도사 사환 서(送徐道士使還序)
 

홍무(洪武) 건원(建元) 3년 4월에 호를 옥암(玉巖)이라 하는 조천궁(朝天宮) 도사(道士)가 향폐(香幣)와 축책(祝冊)을 받들고 금릉(金陵)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왕경(王京)에 당도하자, 들에 나가 맞아들이고 사관을 주어 위로하여 모두 일정한 격식에 의하되 오직 삼가며, 예조에 명하여 제사에 이바지하게 하였다. 또 동지밀직(同知密直) 이성림(李成林)으로서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는데, 이색(李穡)도 또한 참예하게 되었다.
5월 정유일을 이용하여 여러 관원이 위패를 모시고 산수(山水)의 신을 성남(城南)에서 합제(合祭)한바, 그 이튿날에 옥암이 매우 기뻐하였으며, 복명(復命)하기에 급박하여 예성강(禮成江) 항구에서 바람 때[候風]을 기다렸다. 며칠이 못 되어서 왕은 이르기를, “도사가 왔을 적에 몸이 조금 불편하여 더불어 예를 차리지 못하였으니 마음에 섭섭하다.” 하고, 불러들여 위문하며 한참동안 조용히 이야기하였다. 옥암이 제사의 일 때문에 내 얼굴을 잘 알았고, 또 내가 유관(儒冠)을 쓴 것을 보고서 시를 청하기를 매우 부지런히 하며, 행장을 끌러서 가지고 있는 대창(大倉) 제자(諸子)의 시를 내보이므로 받아서 끝까지 다 읽었다.
옥암은 참으로 시를 좋아하는 분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 쉽게 이것을 남에게서 구득했겠는가. 이에 여러 친지의 시를 받아주고 그 머리에 대략을 서(序)하는 바이다.
도가(道家)의 부류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에 실려 있음을 볼 수 있다. 노자(老子)는 주(周) 나라 주하사(柱下史)로서 불우하여 5천 자의 글을 저술하였고, 두 번째 전하여 개공(蓋公)에 이르러서는 조참(曹參)이 문제(文帝)에게 천거하여 한 나라가 형벌을 쓰지 않게 만들었으니, 비록 우리 유자가 천하에 쓰이게 되더라도 그 성과는 반드시 다 이와 같이 아름답지 못할 것이다. 그 이른바 수록(授?)ㆍ배장(拜章)ㆍ부주(符呪)ㆍ환단(還丹)같은 술(術)은 비록 각기 설명이 있으나, 지루하고 허망하여 다 노자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제자 된 자는 마땅히 그 스승의 도를 힘써야 할 것이다.
지금 천자가 밝음이 일월과 합하여, 인심에는 진위(眞僞)가 있고 학술에는 사정(邪正)이 있다는 점을 남김없이 통찰하며, 현교(玄敎)에 있어서도 깊이 청정(淸淨)의 도와 합하여 마음으로 해내(海內)가 영일(寧壹)할 것을 기약하였으니, 그 굉장한 규모와 원대한 정책은 한(漢) 나라보다 만 배나 넘었으며, 옥암은 조천궁을 벗어나 만 리의 외국에 제사를 대행하게 되었으니, 그 사람의 어진 것을 따라서 족히 알 수 있다. 나는 그가 정신이 완전하고 지킴이 굳건하며 말은 간략하고 의(義)는 밝음을 볼 때, 스스로 안보한 것이 중함을 알 수 있다. 재계하고 목욕하여 그 덕을 신성하게 하며 당연히 제사할 바를 제사하여 사람을 다스리는 근본을 확립한 것에 이르러서는, 정결하고 정미(精微)한 온축(?畜)을 다한 이가 아니면 능히 참예할 수 없다.
이렇기 때문에 옥암의 이번 행차가 있게 된 것이니, 어진이를 세우되 일정한 방향이 없는 것을 또한 큰 조정의 사람 쓰는 법에서 보겠다. 장차 개공(蓋公)같은 이가 나오게 된다면 이 백성이 그 혜택을 받을 것은 틀림없다. 옥암의 성은 서씨(徐氏)요, 이름은 사호(師昊)요 양주(楊州) 사람이다. 갖추어 기재하는 것은 망제(望祭)의 실지 행사가 이때로부터 시작된 것을 나타내자는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