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序)
기증 유사암 시권 서(寄贈柳思菴詩卷序)
군자는 종신의 즐거움이 있나니, 하루아침의 즐거움은 족히 자기 즐거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가함도 없고 가하지 않음도 없으며, 움직이고 고요하며 쳐다보나 굽어보나 부끄러운 생각이 조금도 싹트지 아니하면, 이른바 나라는 것이 담담한 그 가운데 있거니와, 사생과 수요(壽夭)는 하늘이 준 것이요, 길흉과 영욕은 사람이 하는 것이니, 다 나는 아닌데, 내가 그로써 기쁘게 여기고 두렵게 생각한다면, 이는 정(情)이 이기는 것이다. 정이 이기게 되면 천리는 사라지기 시작하는 것인데, 이러고도 내가 종신의 즐거움이 있다 한다면 우리는 믿지 않는다.
벼슬을 시키는 것은 나를 귀하게 하자는 것이요, 녹을 주는 것은 나를 부자 되게 하자는 것이니, 나를 부자 되게 하는 자는 반드시 나를 궁하게 할 수 있고, 나를 귀하게 하는 자는 반드시 나를 천하게 할 수 있으며, 내가 감히 그 명령을 듣지 아니하지 못하는 것은 그 권리가 저쪽에 있고 내게 없는 까닭이다. 이 때문에 본시 내게 없는 것을 하루아침에 나에게 주어서 비록 더할 수 없는 부귀를 하게 될지라도 나는 기쁘게 여길 것이 못 된다. 기뻐하는 것도 오히려 옳지 못하거늘 하물며 종신토록 즐길 수 있는 것이 되겠느냐. 이른바 즐길 수 있는 것이란, 저만이 스스로 아는 것이므로, 아비가 자식에게 줄 수도 없고 남편이 아내에게서 빼앗지도 못하게 된다. 무릇 천하의 지극히 친밀한 사이는 부자와 부부같은 것이 없는데도 오히려 서로 주고 빼앗을 수 없으니, 이는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을 알기만 할 것이 아니라 또 실천을 한다면 반드시 밖에서 오는 근심이 이에서 끊어지는 것이다.
사암(思菴) 선생은 대개 가까이 보는 바로 말하면, 서울에 거한 지 11년에 동배들이 그 높은 행실을 허여하고, 국정에 간여한 14년에 같은 조관(朝官)들이 그 넓은 도량에 굴복하여 포의(布衣)로 말미암아 재상의 자리에 앉게 되었으니, 또한 성하다 할 만하다. 그러나 털끝만큼도 만족히 여기는 뜻이 말과 행동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 거처하는 것이나 그 입고 먹는 것을 보고 더불어 종유하는 사람들을 보면 모두 당시의 부귀한 자들이지만 그 외모를 보면 야인 시절과 같으니, 하루아침의 즐거움으로써 즐거운 것을 삼지 않는 것이 아닌가. 수십 년 간 우뚝하고 빛나다가 능히 그 만절(晩節)을 지키는 자가 대개 적은데, 선생은 진퇴에 조용하여 벼슬하고 안 하는 것을 영화롭고 욕되게 여기지 아니하여 지난날 조정에 있을 적엔 그 도가 시행됨을 즐거워하였고 지금 농촌에 있어선 그 몸의 온전함을 즐거워하니, 몸이 온전하며 도(道)도 또한 온전하다. 지난날에 구름과 물이 흐르듯 처신하여 이미 자취를 남기지 않았으나, 유독 그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은 자신의 오랜 즐거움과 더불어 잠깐이라도 잊지 않았다. 만약 잊을 수 있다면 어찌 내가 말한 즐긴다는 것이 되겠는가.
성균 사예(成均司藝) 강자야(康子野)는 선생의 문인이다. 장차 제공들에게 시를 얻어서 은거의 도움이 되게 하려 하는데, 내가 선생을 깊이 아는 까닭으로 나에게 서문을 부탁하므로 나는 그 대강을 말한 것이다. 장주(莊周)는, “공허(空虛)에 사는 자가 사람의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문득 기쁘다.” 하였는데, 하물며 내 글이랴. 그는 반드시 격절(擊節)하여 감탄하기를, “서로 알아주는 지기가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이와 같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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