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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序) 근사재일고후서(近思齋逸藁 後序) -이색(李穡)-

천하한량 2007. 4. 28. 17:18

서(序)
 
 
근사재일고후서(近思齋逸藁 後序)
 

원 나라 조정에서 북정(北庭)의 진사(進士)가 고문(古文)으로써 당세에 현달하였다. 마조상(馬祖常)ㆍ백용(伯庸)ㆍ여궐(余闕)ㆍ정심(廷心)같은 자가 더욱 그 중에 뛰어났다. 을유년에 을과(乙科)에 설백요손(?伯遼遜) 공원(公遠)이 남방에 유학하여 나이 20세 전에 과문(科文)을 다 능통하였고, 틈틈이 고문을 전공하여 이름이 크게 떨쳤다. 이미 급제해서 한림을 응봉(應奉)하여 단본당 정자(端本堂正字)로 선발되었고, 오랜 후에 숭문감(崇文監)에 승진하여 바야흐로 쓰이게 되었는데, 국정을 담당한 자가 그 부친 회남좌승(淮南左丞) 공과 더불어 원한이 있었던 까닭으로 나가서 선주(禪州)를 다스려서 능리(能吏)로 소문이 있었다. 이윽고 모친상을 만나서 대녕(大寧)에 우거하는데, 그때에 적(賊)이 이미 상도(上都)를 쳐부수고 요서(遼西)로 향하니, 공원은 자제를 이끌고 단기(單騎)로 요수(遼水)를 건너서 고려로 들어왔다. 이미 길을 떠난 수일 후에 적은 대녕에 당도하였던 것이다.
주상은 단본당에서 종유한 연고로 맞아들이고 서로 위안하였다. 면대하게 되자, 예우가 거룩하여 부원(富原)의 전장(田莊)을 주고 개부(開府)의 군(君)을 봉하여 수년 동안 살다가 병으로 죽었다. 그 아우 공문(公文)ㆍ 공소(公素)는 그 문고(文稿)가 분산됨을 애석히 여겨 그 시의 기록할 만한 것을 필기하여 두 질을 만들었다가 신축년 병란에 피난가면서 또 잃어버렸는데, 지금 진주 판관(晉州判官) 김군(金君) 자빈(子贇)이 그 한질을 잿더미 속에서 발견하여 설씨에게 돌려보냈다. 설씨는 회골(回?)의 대족(大族)으로 중국에 들어와 이름난 집안이 되어 과거에 오른 자가 아홉 사람이었으며, 시서와 예의로 수 대를 내렸는데, 공원이 그 영화(英華)를 축적하여 피어나서 떨치고 빛내니, 그 문장이 찬란하여 바로 백용(伯庸)ㆍ정심(廷心)과 더불어 서로 위아래를 따질 만하며, 후세에 전하는 것도 의심이 없다. 그러나 죽기 전에 이미 유실되었고, 유실된 데다 또 유실되어 얼마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역시 슬픈 일이다. 지금 이 원고를 보면 다 젊은 시절의 작품이나 창연(蒼然)히 노련한 기운이 있으니, 장년기에 지은 것은 대개 상상할 수 있다.
그 아들 도관총랑(都官摠郞) 천우(天祐)가 나더러 말하기를, “원고가 보존된 것은 김후(金侯)의 힘이다. 내 형 천민(天民)이 다행히 그 장(長)이 되었으니, 장차 판각하여 진주의 향학(鄕學)에 수장하기로 한다. 청컨대 그 연유를 써달라.” 하므로, 나는 간단히 공의 출처의 대략과 이 한 질이 다행히 보존되었다는 사유를 편말에 기술하여 다른 날에 문류(文類)를 이어받아 이루려 하는 자의 증빙이 되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