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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序) 송 양광도 안렴 한시사 서 홍도(弘道) (送楊廣道按廉韓侍史序) -이색(李穡) -

천하한량 2007. 4. 21. 19:25

서(序)
 
 
송 양광도 안렴 한시사 서 홍도(弘道) (送楊廣道按廉韓侍史序)
 

내가 어렸을 적에 산중에서 글 읽기를 좋아해서 그 옛날 노닐던 곳은 역력히 헤아릴 수 있는데, 금곡(金谷)에서 밥을 구걸하던 일이 더욱 잊을 수 없다. 현 사헌(司憲) 한시사(韓侍史)ㆍ민부(民部) 장의랑(張議郞)과 나, 세 명이 책을 짊어지고 해중(海中)에 있는 교동(喬桐)의 화개산(華蓋山)에 들어가 보니, 그곳은 외롭게 동떨어져서 인적이 드물기 때문에 마음에 들어오래 묵으려고 했다. 그러나 산중이라 배가 주려서 있을 수가 없어서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배[舟] 안에서 서해의 여러 산을 바라보고 말하기를, “평주(平州) 남쪽 모란산(牧丹山)도 옛 사람이 글 읽던 곳이니, 그곳으로 가보자.” 하여, 드디어 장의랑에게 부탁하여 돌아가서 두 집을 보호하라 하고, 뱃사람에게 간청하여 서해안으로 내려서 갈대밭으로 6, 7리를 가자, 해가 저물고 다리 힘도 더 계속할 수 없어 금곡(金谷) 역사(驛舍)의 주인에게 밥을 빌어먹었으니, 한때 피곤에 지쳐 구걸하던 형상은 지금도 생각할수록 우습기만 하다.
그러나 맹자(孟子)의 호연지기(浩然之氣)란 말씀이 마음속에 아로새겨져 능히 감추려 해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주인도 알고 후히 대접한 것이다. 옛날의 군자는 동심인성(動心忍性)하여, 모두 한때의 궁액(窮?)을 통하여 평생 도움을 얻게 하였으니, 나 자신의 처신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을 따름이다. 어찌 높은 수레에 네 마리의 말을 몰고 가는 것과, 옷자락을 무릅쓰고 짚신을 끄는 것으로 영화롭고 욕됨을 삼았겠는가.
처음 한시사(韓侍史)와 더불어 함께 신사년 진사과에 합격하였고, 계사년에 또 함께 급제하였다. 나이는 나보다 일곱 살이 많고 학문과 문장도 내가 따라갈 수 없다. 그리고 그 지조는 승상(丞相)과 봉후(封侯)의 영예라도 또한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오직 학문으로 세상에 아첨하는 것을 더럽게 여길 뿐이다. 이 때문에 나는 요행히 벼슬을 얻은 이래로 일찍이 부끄럽게 여기지 않은 적이 없었다. 군은 오히려 말직에 맴돌면서 그대로 종신할 것같더니 지금은 양양하게 대중(臺中)에 들어가 시사(侍史)가 되었으니, 역시 때를 만났다 이를 만하다. 저 역사(驛舍)에서 밥을 빌던 날에 비하면 환경이 달라졌다 이를 수 있는데, 우리 두 사람이 지키는 바도 또한 변함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
무릇 선비가 조정에 서서 지위의 높고 낮음과 녹의 후하고 박함을 묻지 말고 그 뜻을 행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 것인데, 시사(侍史)는 탄핵을 주로 하여 위로 군상(君上)의 득실을 다투고 아래로 재상의 시비를 힐난하며, 온갖 관원이 바람에 쏠리듯 하여 감히 우러러보지를 못한다. 안렴사(按廉使)는 또한 중대한 소임이니, 임금의 대리로 산천에 제사하며 풍속을 관찰하고, 상과 벌을 자유로 결단하므로 수령들이 떠받들기를 더욱 삼가 사소한 한 가지 음식이라도 반드시 그 좋아하고 싫어하는 바를 살피며, 감히 조금도 그 뜻을 거슬리는 것이 없다. 이러고서 능히 자기 주장대로 시행되는 것이 없다 한다면, 나는 믿지 않는다. 시사가 이 두 가지 책임을 겸하였으니, 반드시 스스로 힘쓰는 바가 있을 것이다.
조정의 사대부가 시를 노래하여 그 떠나는 길을 아름답게 하자, 시사의 말이, “서문은 반드시 목은(牧隱)이 해야 내 뜻에 맞을 것이다.” 하였다. 나는 글짓기를 기뻐하지 않으며 짓는다 해도 또한 졸한 것은 시사가 아는 바다. 그러나 반드시 내 글을 얻고자 하는 것은 내가 아유(阿諛)하지 않음을 아는 때문이다. 그러므로 옛날 노닐던 일을 서술하여 그 배운 바를 저버리지 않도록 권면하는 것이 이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