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색깔의 예술 – 알람브라 궁전
1) 인간이 만든 가장 위대한 예술적 창조물의 하나
알람브라라는 말은 아랍어로 '붉은색'을 뜻하는데, 햇볕에 말린 타피아(토담)의 색이나 외벽
쌓기에 쓰인 자잘한 자갈과 점토로 만든 벽돌의 색 때문에 이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인류가 만들어낸 지극한 건축 예술, 스페인에 남아 있는 마지막 이슬람 유산, 지상에 마련한
실존의 파라다이스, 그리고 트레몰로 주법의 애연한 기타 선율이 흐르는 곳. 바로 15세기 어느
아랍 시인의 표현대로 그라나다는 에메랄드에 박힌 빛나는 오리엔트산 '진주'로 불리는
알람브라(Alhambra) 궁전이다 라는 칭송을 듣고 있는 이 건물은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
그라나다에 있는 무어 왕조 시대의 요새 궁전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미셀린 가이드북은 이렇게 썼습니다.
“인간이 만든 가장 위대한 예술적 창조물의 하나다. 알람브라 요새는 가장 놀라운 건축물의
“인간이 만든 가장 위대한 예술적 창조물의 하나다. 알람브라 요새는 가장 놀라운 건축물의
하나이고 궁전은 현존하는 세계 아랍 궁전 중 최고다. 낙원(樂園)과 흐르는 물을 결합시킨
설계는 <코란>의 에덴동산을 구현한 것으로, 이런 곳은 이 지구 상 어디에도 없다.”
실제의 알람브라 궁전은 대부분 사진 속의 풍경보다 오히려 더 정교하면서도 풍성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기후는 시리아처럼 온화하고, 땅은 예멘처럼 비옥하며, 꽃과 향료는 인도
처럼 풍부하고, 보석과 재물은 중국처럼 넘쳐나며, 해안은 아든(예멘의 항구도시)과 같이 닻을
내리기에 편리하다고 예찬된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에는 그 어느 곳보다도 이슬람의 향기가 짙게
배어있습니다. 이 곳 이베리아 땅에 남겨놓은 최대의 보물, 알람브라(Alhambra)궁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라나다 시 한가운데 솟은 고원에 세워진 이 궁전은 나스르 왕조를 창시한 이븐 알 아마르와
그 후계자들이 집권한 1238~1358년에 대부분 건설되었으며 궁전의 화려한 내부장식들은
유수프 1세(1354 죽음) 때 만들어졌다고 추정되는데, 1492년 무어인들이 축출된 뒤 대부분의
내부장식이 없어졌으며 가구들은 파괴되거나 철거되었습니다.
이슬람 예술의 최고의 극치를 보여준다는 알람브라 궁전이 이슬람교도 국가가 아닌 스페인
이슬람 예술의 최고의 극치를 보여준다는 알람브라 궁전이 이슬람교도 국가가 아닌 스페인
땅에 있다는 건 참 아이러니 합니다만 역사적으로 로마카톨릭 국가인 스페인은 1492년까지
약 800년간 이슬람의 영토였습니다.
현재 스페인 지역에 있었던 서고트 왕국은 711년 이슬람 옴미아드 왕조의 침입을 받아 붕괴
되었습니다. 이슬람 세력은 피레네를 넘어 프랑크 왕국도 노렸으나 732년의 투르푸아티에
싸움에서 패배하여 이베리아 반도로 물러났으며, 그 후부터 8세기 동안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였습니다.
이슬람이 지배하는 동안 산업이 발전하였는데, 당시의 이슬람의 문화·기술 수준이 서유럽을
이슬람이 지배하는 동안 산업이 발전하였는데, 당시의 이슬람의 문화·기술 수준이 서유럽을
능가하였다는 것은, 이미 10세기에 코르도바 도서관이 60만 권의 서적을 소장하여 그리스철학을
연구하고 있었다는 점, 11세기에 제지(製紙)가 시작되어 있었다는 점 등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스페인을 지배한 이슬람 사람들은 기독교와 유대인을 핍박하지 않았으므로 3대 종교와 문명이
이곳에서 용광로처럼 교류, 융합하면서 암흑시대의 구덩이에 빠져 있던 유럽에 빛줄기를 내렸
으며 아랍 학자와 유대인 학자들이 코르도바에서 연구한 그리스 철학, 천문학, 의술, 수학이
기독교 세계로 퍼져 나갔습니다.
스페인의 남쪽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그라나다를 한 눈으로 바라보는 구릉 위에 세운 알람브라
궁전은 스페인의 마지막 이슬람왕조인 나스르 왕조의 무하마드 1세 알 갈리브가 13세기 후반에
창립하기 시작하여 증축과 개수를 거쳐 완성되었습니다.
나스르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에 존재하였던 이슬람 최후의 왕조(1231~1492)로 이베리아 반도
에서 이슬람 세력을 내쫓으려는 그리스도교의 국토 회복운동에 의해 영역을 잃어가다가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5세의 가톨릭 부부왕(夫婦王)에 의해 1492년 정복되었습니다.
2) 스페인을 잃은 것은 아깝지 않지만 알람브라를 다시 볼 수 없는 것이 원통하다
아프리카로 물러난 무어인(아프리카의 아랍인)들이 스페인에 남기고 간 가장 유명한 문화
유산이 ‘붉은 성(城)’이란 뜻의 알람브라 궁전입니다. 나스르 왕조의 마지막 왕인 보아브딜은
자신의 가련한 시민들을 보호해준다는 조건으로 금화 3만 냥과 궁전을 바치고 그라나다의
열쇠를 스페인 왕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그라나다의 주민들은
무자비한 학살과 추방을 당했습니다. 보아브딜은 모로코로 떠나는 길에 언덕에 올라 마지막
으로 이 궁전을 바라보면서 울었다고 합니다. 이런 연유로 이 언덕은 ‘무어의 마지막 한숨’
이란 이름을 얻었습니다.
아들이 우는 것을 바라보던 어머니는 한 마디 나무랍니다.
“너는 사나이로서 지키지 못했던 것에 대해서 여자처럼 우는구나. 울음을 그쳐라.”
“너는 사나이로서 지키지 못했던 것에 대해서 여자처럼 우는구나. 울음을 그쳐라.”
무어 인들로부터 이 궁전을 점령한 스페인 사람들과 나폴레옹 군대는 인류의 유산을 무시하고
탄약 창고, 감옥, 병원 따위로 썼습니다. 이 성벽엔 이런 시(詩) 한 구절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라나다에서 눈이 먼다는 것보다 더 참혹한 인생은 없다.”
“그라나다에서 눈이 먼다는 것보다 더 참혹한 인생은 없다.”
1492년 그라나다를 차지한 이사벨 여왕은 이해 여름 이탈리아의 제노바 사람 콜럼버스가
세 척의 배로 대서양을 건너 인도를 발견하겠다는 개척 항해를 지원했습니다.
이리하여 콜럼버스는 이해 마침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라나다를 탈환한 기독교 세력은 이 상징적 도시에 성당을 짓기 시작해 200년 만에 완성합니다.
돌산처럼 육중한 이 성당에는 이사벨과 페르난도 두 사람의 무덤을 모신 교회가 붙어 있는데
지하에 부부 왕의 석관(石棺)이 있고 1층에 딸과 사위의 석관이 있습니다. 이사벨은 1504년,
페르난도는 1516년에 사망했는데 이 무덤 교회는 1506년부터 15년간에 걸쳐 지은 고딕식 건물
입니다. 두 왕은 그라나다에 매료되어 이 도시에 묻히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이슬람 후손인 무하마드 3세는 훗날 스페인을 잃은 것은 아깝지 않지만 알람브라를 다시 볼 수
없는 것이 원통하다 라고 한탄했다 합니다. 영국 사람들이 세익스피어와 인도를 바꾸지 않겠다
라고 했다는 심경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3) 화려한 종유석 장식과 아름다운 정원
'중세 이슬람 문화의 결정체', '이슬람 건축의 최고 걸작' 등으로 찬사를 받고 있는 알람브라
'중세 이슬람 문화의 결정체', '이슬람 건축의 최고 걸작' 등으로 찬사를 받고 있는 알람브라
궁전은 그러한 찬사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화려함을 자랑하지만 다른 유럽의 궁전들처럼 거대함,
보석장식, 그림 장식 등으로 화려함을 뽐내는 것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우상숭배를 금지한 이슬람
교리에 따라 내부 장식을 식물과 기하학적인 디자인으로만 구성하였기 때문에 소박하지만 환상적인
모습으로 관광객들을 압도합니다.
알함브라 궁전은 공간, 빛, 물 그리고 장식 등을 신비하게 이용해서 완성한 감각적인 건축물인데
이슬람 점령시대에 지어진 이슬람 양식 건축물로 유럽의 다른 건축물과는 달리 신비로운
자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건물의 높이는 낮고 방들도 크지 않으며, 아담한 정원은 건물들이
빛에 의해 비추어지도록 작은 연못들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1492년 무어인들이 축출된 뒤 대부분의 내부장식이 없어졌으며 가구들은 파괴되거나 철거
되었습니다. 1516~56년에 스페인을 다스린 카를 5세(카를로스 1세)는 궁의 일부를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했고 일부는 허물어 1526년 페드로 데 마추카로 하여금 이탈리아풍 궁전으로
짓게 했습니다. 1812년 나폴레옹 군대 침략 때 탑 몇 개가 파괴되었고 또한 1821년 지진으로
많은 손실을 입었습니다.
이 알람브라 궁전은 왕궁, 알카사바, 찰스 5세 궁전, 히네랄리뻬의 건축물과 기타 공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나사리에스 궁전이 제일 아름답습니다. 나사리에스 궁전은
조각으로 꾸며진 내부들이며, 긴 연못으로 건물이 비춰지게 하는 방식이며, 전체적인 분위기가
인도의 타지마할을 연상시킵니다.
무어 왕조 때 지어진 부분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알카사바, 즉 성곽인데, 지금은 거대한 외벽과 탑,
방벽들만이 남아 있으며 성채 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벨라 탑에 오르면 알바이신(Albaicin) 지구,
사크로몬테 언덕, 시에라 네바다 산맥이 이루는 일대 장관의 파노라마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습니다. 알카사바 안쪽에 알람브라 궁전이 있고, 그 안쪽에 알람브라 알타(상부 알람브라)가
있는데 알람브라 알타는 원래 관리와 시종들이 살던 곳으로 정부 소재지인 국왕도시의 일부
였습니다.
아랍 건축의 특징은 외관의 투박함과 내부의 화려함이다. 그리고 많은 문을 통해 실내로 연결
되는데, 문 하나를 통과할 때마다 화미함과 정교함은 점점 도를 더해가는데 속세와 천국을 건축에
표현하려는 아랍인들의 삶의 철학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왕궁은 수많은 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벤세라헤스의 방', '왕의 방', '두 자매의 방'에서
왕궁은 수많은 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벤세라헤스의 방', '왕의 방', '두 자매의 방'에서
볼 수 있는 모사라베라고 부르는 종유석 장식과 왕의 공식 접견실인 '대사의 방'의 아라베스크
무늬도 볼 수 있습니다.
4) 알람브라궁전의 추억 (Recuerdos de la Alhambra)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은 스페인의 전설적인 기타리스트인 프란시스코 타레가가
알람브라 궁전을 구경한 후 깊은 감명을 받고 작곡한 곡입니다.
타레가는 근대 기타연주법의 틀을 완성한 전설적인 기타리스트로서, 제자인 콘차 부인을
사랑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콘차 부인은 타레가를 거부하고 이에 상심에 빠진 타레가는
스페인 곳곳을 여행하다가 알람브라 궁전을 구경하게 됩니다.
타레가는 이처럼 아름다운 알람브라 궁전에서 창밖의 달을 보며 밤을 지새웠고,
콘차 부인을 생각하며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을 작곡했다고 합니다.
일설에 따르면 타레가의 부름에 콘차 부인이 이 궁전에서 타레가와 하루밤을 함께 보냈다 고도
합니다.
워싱턴 어빙이 <알람브라 이야기>로 역사적 가치를 재발견하고, 타레가의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
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알람브라 궁전. 이 장대하면서도 섬세하고 육중하면서도 우아한
세계적인 유산을 방문하는 것은 스페인을 여행하며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희열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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