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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祖 54卷 附錄 011 / 정조 대왕 행장(行狀)④

천하한량 2007. 3. 23. 03:25

正祖 54卷 附錄 011 / 정조 대왕 행장(行狀)④


〔○〕三年春, 望拜皇壇, 有言壇享樂章, 當用皇朝《九廟迎送神曲》, 佾舞當用皇朝親王國祭仁祖廟之制者。 敎曰: “皇朝樂章, 有曰 ‘格我聖祖,’ 又曰 ‘佑余子孫,’ 我朝之祭天子, 用此句語, 未知其當也。 仁廟儀則無登歌、軒架, 皇壇儀, 登歌、軒架, 設於壇上壇下, 今但就佾舞增六爲八, 則是舞備而樂不備也, 與其用失禮之樂, 莫若倚閣之爲寡過也。” 拜元陵, 歷拜局內諸陵。 夏拜永祐園, 敎曰: “敎莫大於五敎, 五敎不敷, 厥咎誰執? 每聞法曹決綱常之罪, 未嘗不怵然而懼。 自今罪關綱常者, 雖死罪以下, 必審閱究覈, 明知無疑, 然後斷以律, 以副予先敎後刑之意。” 親鞫投書罪人李鎭厚, 敎曰: “刑人殺人, 欲以生道殺之也, 親鞫庭鞫, 遇雨或値熱, 設以草芚, 俾得緩喘下氣, 輸其辭盡其情。” 夏五月, 命每年五月十三日, 至二十一日, 勿稟視事。 蓋自春邸, 遇是月, 齋居悲痛, 如壬年之初, 是年元陵制訖, 始有成命。 秋, 將拜寧陵, 以聖祖陟方之舊甲也。 召兵曹判書、訓鍊大將, 敎曰: “師行百里之外, 軍容尤當整齊。 昔玄宗講武驪山, 因軍法失宜, 置兵部尙書郭元振於法。 今玆之敎, 若命將誓師, 其各勉之。” 指駕前信箭曰: “聽政初, 先王以此錫予, 每當師行, 必立此箭於駕前, 蓋專征伐之意也。” 至廣津, 御龍舟, 敎曰: “君猶舟也, 民猶水也。 予今御舟臨民, 益切兢惕。 昔聖祖作舟水圖, 命詞臣撰銘, 此意也。” 次南漢, 敎曰: “丙子事, 宛如昨日, 追念日暮道遠之聖敎, 不覺涕出。 人心漸狃, 大義轉晦, 北走之皮幣, 不以爲恥, 思之及此, 寧不痛心? 當此民力凋殘經費匱乏之時, 豈必作遠道行幸, 而逢此己亥之歲, 不有寧陵之行, 則亦豈天理人情乎?” 京畿儒生等, 疏請賜額文正公宋時烈祠之在驪州者, 額曰大老祠, 豎御製御筆碑于祠庭。 駕過利川, 挾道觀光之民, 漫山遍野, 老白首者, 或遮道而奏曰, 願見吾君, 顧謂諸臣曰: “予無一政一令之澤及於民, 民如是不遠千里來, 予爲之愧惕也。” 謁寧陵英陵, 還次利川, 下綸音, 諭三州父老, 駕過沿路, 減租一年。 次廣州, 敎曰: “仁廟甲子, 得異僧覺性者, 命爲八道都摠攝, 召募僧軍, 分住各刹, 而近年以來, 組練不勤, 勞役不恤, 緩急何足恃也?” 仍命守臣, 蠲其弊。 御西將臺, 行城操夜操, 犒饋將士, 周覽城內外, 歷詢形便古蹟。 行幸八日, 始還宮, 有雷異, 減膳下責躬敎, 越十日, 又大雷, 減膳五日。 敎曰: “天遠乎人哉? 在方寸間。 經曰: ‘敬天之怒, 無敢戲豫。’ 使寡人, 痛自克責, 奮勵抑畏, 則庶可底豫已怒之天心。 纔經災沴, 只是依舊樣子, 維新濯舊之功, 置之相忘, 使一國之人, 駸駸入於含糊鶻突之中, 曾不悟楚之鐵劍利, 而反爲倡優拙焉, 所謂庴火積薪, 安於其上者也。 急於責躬, 未暇及於有位之闕失, 惟我匡弼之臣, 直言我得失。” 初, 洪國榮, 自乙未前, 出入冑筵, 特被寵簡, 四年之間, 位至宰列, 歷掌重兵, 貪天爲功, 日益驕縱, 權傾一世, 朝象漸亂。 王, 燭其奸, 隱忍未發。 及洪嬪喪, 國榮自知勢去, 轉生移國之計, 乃倡言曰: “廣儲嗣之擧, 不可再也。” 以之子, 作爲奇貨, 改其君號爲完豐, 恒言曰, 吾之甥也。 爲洪嬪守殯官, 聞者骨顫, 而威勢所壓, 道路以目。 賊臣宋德相, 假稱儒名, 膺召而至, 坐立言動, 惟國榮所使, 至是投疏言儲嗣事, 有曰: ‘某樣道理, 非在下者所可指陳, 而必有商量於聖念。 臣對宿衛將臣, 以此事爲第一義。’ 宿衛將臣, 卽國榮, 而此事指事也。 於是, 賊謀日急, 禍機迫在呼吸, 王, 乃決意乾斷, 而顧欲保全其終始, 且慮賊徒寔繁, 凶謀難測, 姑不宣示於外, 前席數其罪, 使之引退。 國榮不敢抗命, 納符而出, 特假三字銜。 恩信君改葬, 命用崇品宗臣禮, 賜以美諡。 敎曰: “諡法至重, 至於忠字, 尤不宜輕加。 今見弘文館議諡律之斷例, 得無汰哉之嫌乎?” 仍命修明古諡法。 四年春正月, 受朝參于仁政門, 黜洪樂純樂純, 國榮之叔也, 國榮旣屛斥, 樂純尙據相職, 藉其餘焰, 圖握國柄, 國榮又覬覦, 復入以文衡, 爲落致仕之階。 時徐命善爲領揆, 其兄命膺爲文衡, 臺臣李普行等交章覈之, 敎曰: “予任非其人, 權移於下, 殺活威福之柄, 將至莫可收拾, 豈忍不思矯革, 坐視國家之亡乎? 今日之事, 莫非一大臣之罪。” 仍命樂純削黜, 普行島置。 拜明陵, 以禮陟舊甲也。 吏曹判書金鍾秀, 袖箚討洪國榮, 沮遏廣儲嗣大策之罪, 三司交章力請, 命國榮放之田里。 時臺閣彈章, 日積公車, 敎筵臣曰: “人才當責以中人以下。 《明義錄》成, 其人便作義理主人, 交其人爲其國邊人也。 乙丙以後, 世道屢變, 國脈之傷, 固已不少, 顧今對症之策, 莫如聚首同心, 精白寅協。 而博擊爲事, 寧靖無日, 傷一人, 國脈隨以益傷, 豈不懍然乎? 東京之末, 名論崢嶸, 曹操徘徊於鼎之傍, 而不敢躬自犯手, 托以挾天子之義, 如荀文若之自好, 亦未免委身事之。 向來事, 何異於是? 諸臣若不體予鎭安之意, 其將空朝廷而後已。 寧有是哉?” 行和嬪尹氏嘉禮, 判官昌胤女。 秋, 拜永陵, 冬雷, 下綸音求言。 五年春正月, 拜元陵, 歷拜諸陵, 以是歲辛丑, 卽英廟冊儲舊甲也。 賜祭于四忠祠, 命贈參議金省行加贈, 故學生徐德修贈執義。 行抄啓文臣講製之法, 敎曰: “近來年少文官, 纔決科第, 束閣書籍, 習俗轉痼, 矯革未易, 雖有專經之規, 月課之式, 作輟無常, 名實不符。 朝家勸課, 旣乖其方, 新進怠忽, 不暇專責。 今欲倣古設敎, 爲作成之道, 則湖堂太簡, 知製稍氄, 若就文臣堂下中, 限其年廣其選, 月講經史, 旬試程文, 較勤慢行賞罰, 未必不爲振文風之一助。” 命議政府, 抄啓槐院文臣參上、參外三十七歲以下人, 令內閣, 著成講製節目行之。 王於講製文臣勸課作成, 至誠不倦, 恩遇亞於閣臣。 自辛丑選以後, 凡十選, 今之公卿大夫, 太半是講製文臣也。 又敎曰: “文講武講, 文製武射, 如車輪鳥翼, 不可偏廢。” 命宣傳官試講試射, 依講製文臣例。 以昌德宮之都摠府, 爲摛文院, 御筆扁之, 院舊在禁苑, 以地太邃嚴, 移住永肅門外, 至是, 閣臣箚陳移院便宜, 可之。 敎曰: “當臨奎章新署時, 原任閣臣, 以侍講官講書官, 幷挾冊升堂, 講說經義, 敷陳治道, 以至寡躬闕遺, 朝政得失, 雖非論思之任, 是日是筵, 無異應旨。 苟有所蘊, 俾各悉陳。” 禮數儀度, 略倣臨學宮之儀, 兼考先朝臨署故事, 參酌有幸院事蹟, 以啓。 還內時歷臨玉署, 傳不云乎, 蓋取愛其禮之意。 三月辛丑, 幸摛文院, 講《近思錄》道體篇, 時原任閣臣, 分班升堂, 弘文館領事以下聽講, 講訖宣饌。 仍幸弘文館, 與經筵諸臣, 講《心經》, 內閣玉堂諸臣, 進箋稱謝。 奎章閣建置有年, 儀制草創, 及國榮屛斥, 朝著淸明, 王益勵爲治, 百度畢張。 申令諸閣臣, 酌古參今, 次第修擧, 閣規煥然大備。 以校書館爲外閣, 屬之內閣, 提學以下, 付兼銜。 以江華御庫奉安冊寶書籍, 建閣藏弆, 名曰外奎章閣。 《八子百選》成, 王, 憂文體日下, 手選《八家文》印行。 夏, 拜永祐園, 觀刈于東耤, 行勞酒禮, 遵英宗故事也。 旣回鑾, 下綸音于八道兩都, 勸農政。 王每於元正, 必下勸農綸音, 是日, 以觀刈禮成, 申加蕫勸。 大雨, 禜于四門, 敎曰: “有國之虞, 在於水旱盜賊, 不可不聞于上。 而上之人, 恒存戒懼, 不敢作侈泰之念, 亦惟在是。 善乎李文靖之說也。 近來忌諱成俗, 有司未嘗登聞, 寧不慨然? 噫! 匝域蒼生, 皆吾赤子。 而都民休戚, 所係尤重。 城闉之中, 或有愁困之歎, 而予莫聞知, 是豈作元后之意也?” 仍飭京兆捕廳。 秋八月, 拜明陵, 以是月英廟建儲之月, 是日肅廟誕彌之日也。 英廟在潛邸, 辛丑八月之望, 拜昭寧園, 回駕至德水川, 有盜牽牛而過, 從者以告, 命黔巖撥將, 牛還其主, 盜則勿問, 及還都, 建儲命下。 至是, 王追感舊甲, 旣謁陵, 御製紀其事, 建碑撥舍之前, 摹寫御眞, 妥奉于奎章閣之宙合樓。 始定閣臣豹直奉審之規, 遠倣天章閣故事, 近取泰寧殿成式也。 湖西人延德潤等, 爲宋德相伸卞, 發通四道, 互相煽動, 道臣以啓, 諸臣齊請設鞫。 王曰, 不足煩王府也, 遣使按覈, 分等酌處, 乃竄德相三水府。 冬, 敎曰: “西北係是邊圉, 揆文奮武, 隨地而異, 而挽近以來, 習尙漸弛, 以武爲恥, 皆慕儒名, 風氣委弱, 邊防踈虞, 予甚病之。 靜究厥由, 專在用舍導率之效, 不出政注。 大臣將臣本兵之長, 爛商西北武弁收用之政, 劃一以聞。” 修檀君、箕聖、三國、高麗始祖王陵。 王於異代勝國, 尤眷眷於崇德象賢之典, 徧酹首露王陵, 新羅諸王陵, 正三聖祠祭儀, 號溫祚王廟曰崇烈殿, 賜額高麗四太師祠。 六年春, 拜弘陵, 歷拜諸陵, 夏, 拜永祐園。 久旱, 王避正殿, 親禱雨于雩祀壇, 屛繖蓋, 御步輿, 至壇親眂牲器, 自朝至夜, 盛服露坐, 禮成回輿, 至雲從街, 疏放金吾刑曹囚。 旣還宮, 猶臨軒不脫袞服以待, 已而果雨。 秋, 親鞫權泓徵宋德相宋煥億文仁邦白天湜李京來, 遣使海西按覈申亨夏朴瑞集等。 泓徵, 投凶書者也, 亨夏瑞集, 營護德相, 爲文相告, 指意陰憯, 仁邦天湜京來等, 妖書妖言, 結黨興訛, 陰謀稱亂, 部署已具, 而皆以德相爲依歸。 次第就鞫輸款, 泓徵仁邦天湜京來伏誅, 德相徑斃, 煥億絶島荐棘, 亨夏等酌配。 時, 鞫獄繼發, 株連漸廣, 諸路密啓, 絡續於道。 王, 深慮濫及無辜, 下綸音, 布告國榮德相諸賊罪犯, 末曰: “今之治逆, 鎭安二字, 爲第一急務。 必欲窮其黨與, 發其隱情, 期於劓殄無遺, 則非予之所欲聞也。 近日營閫之登聞, 或有不必啓而啓者, 家藏讖緯, 自有其律, 而無怪乎遐土愚民之不知爲何書? 若以故紙斷簡, 歸之於妖言不軌之科, 則豈不大可哀矜乎? 外方之景象, 雖不得目見, 而驛卒旁午, 道路騷擾, 追捕間發, 閭里駭懼, 又或偵探, 遍於巷陌, 摘發及於偶語, 則大非朝家之本意, 而抑恐人心波蕩, 靡所底定, 咨爾大小臣工, 必以開曉之道, 參恕之念, 各自銘佩, 競相勉勵。 雖使隄防不弛, 勿令坑阱或廣, 寧失不經, 惟務咸新。 臨御六載, 治敎不立, 遷善者未聞, 而罹辟者日衆, 無望空圄之化, 徒煩下車之泣, 予於是, 重爲之慙歎。” 又敎曰: “近日諸賊之符讖惑民, 正學不明之致也。” 下崇儒重道綸音, 飭選曹, 甄拔問學之士, 命諸道方伯, 薦進經明行修者, 賜祭紹賢華陽書院。 王, 自初元, 以崇儒術爲先務, 國朝配食文廟諸賢, 悉加表章, 或遣官致酹, 或親題遺文, 或錄用其子孫。 以至及門諸儒, 竝施寵典。 畿甸、湖西、嶺南饑, 下綸音, 慰諭民人, 飭賙求之政。 又敎曰: “都民生理, 專係畿湖, 畿湖判歉, 予之憂都民久矣。 我國發賣, 卽之振貸也, 預令京兆賑廳, 商確抄戶賣米之政。” 九月, 文孝世子誕生, 宜嬪成氏所誕也。 拜永祐園, 冬, 《國朝寶 鑑》成。 初, 世祖丁丑, 命大提學申叔舟, 撰太祖太宗世宗文宗四朝寶鑑, 是爲《國朝寶鑑》。 自是, 列朝相承, 屢欲續成以繼四朝, 而竟未遑焉。 至肅廟庚申, 工曹參判李端夏, 編進《宣廟寶鑑》, 英廟庚戌, 大提學李德壽, 編進《肅廟寶鑑》。 而列朝寶鑑, 未有一統成書, 辛丑秋, 《英宗實錄》告訖, 王, 語大臣閣臣曰: “先王五十年盛德大業, 史不勝書, 而實錄則石室金櫃, 其藏甚秘, 惟寶鑑爲書, 與秘史稍異, 雖存編年之體, 務主揄揚之方。 今因實錄編成, 仍始寶鑑纂修之役, 在予一人, 光前謨闡先烈之道, 庶乎無憾。” 諸臣一辭仰贊。 又敎曰: “光廟撰成寶鑑之後, 只有宣廟肅廟兩寶鑑, 十二朝尙爲闕文, 今宜幷加編輯, 與三寶鑑及《英廟寶鑑》, 合成一書, 永垂無窮。” 乃命奉來列朝寶錄于沁都, 差詞臣十二人, 分掌纂輯, 又命原任大提學李福源徐命膺等校正, 勒成寶鑑, 閱七月書成, 凡六十有八卷, 印以活字。 諸臣具箋以進, 王, 御法殿親受, 敎曰: “國朝故事, 每室玉冊金寶, 倣廟之陳寶器殿之藏玉牒, 必皆奉安于入廟之時。 夫寶鑑爲書, 所以揄揚功德, 垂裕來嗣, 則實與西序大訓, 同其規模。 而雖琬琰之表徽, 璽章之昭度, 猶不足以喩其重。 特因虞謨未備, 殷禮有待, 三百餘年, 尙爲闕典, 今列朝寶鑑燦然咸秩, 曷敢不祗獻閟宮, 永垂邦禮, 以與我子孫萬世哉?” 乃參倣上冊寶儀節, 親上寶鑑于宗廟、永寧殿, 分藏于各室。 越翼日, 下綸音, 詢于大小臣工, 尊英宗爲世室, 定元子號, 受百官賀, 下蠲恤之政于八道兩都, 大赦中外, 疏放凡三千餘人。

정조 54권 부록 011 / 정조 대왕 행장(行狀)④


3년 봄에 황단(皇壇)에서 망배례를 올렸는데 어떤 사람이 단향(壇享) 때의 악장(樂章)은 당연히 명조의 구묘영송신곡(九廟迎送神曲)을 써야 하고 일무(佾舞)도 명조의 친왕국(親王國)에서 인조묘(仁祖廟)에 제사 모실 때 쓰는 일무를 써야 한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다. 그러자 하교하기를,

“명조 악장에는 ‘우리 성조(聖祖)를 오시게 하사’라는 가사가 있는가 하면, 또 ‘우리 자손을 도우사’라는 등의 구절이 있는데 우리 나라에서 명천자(明天子)의 제사를 모시면서 그러한 구절들을 써도 맞을런지 모르겠다. 그리고 인조묘 제의(祭儀)에는 등가(登歌)·헌가(軒架)가 없고 황단 제의에는 등가와 헌가를 단 위와 단 아래다 설치하는데 지금 일무만을 6줄에서 8줄로 늘리면 무(舞)는 갖출 것을 다 갖추고 악(樂)만 안 갖춰진 경우가 되니 예에 어긋난 악을 쓰는 것보다는 차라리 안 쓰고 놔두는 게 허물이 더 적을 것이다.”

하였다.

원릉(元陵)을 배알하고 그 국(局) 안에 있는 여러 능도 다 배알했다. 여름에는 영우원(永祐園)을 배알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교육은 오교(五敎)보다 더 큰 교육이 없는데 오교가 제대로 보급이 안 되고 있으니 그 책임을 누가 져야 할 것인가? 형조가 강상죄를 처리한다는 것을 들을 때마다 언제나 깜짝 놀라고 두려운 생각이 든다. 지금부터 강상에 관계된 죄인은 비록 죽을 죄 이하라도 반드시 사실을 샅샅이 조사하여 아무 의심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 뒤에야 법률로써 단죄하여, 교육을 우선하고 형벌은 뒤로하는 내 뜻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투서(投書)한 죄인 이진후(李鎭厚)를 친국한 뒤에 하교하기를,

“사람에게 형벌을 가하고 사람을 죽이고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하는 일이니 친국·정국 때 비가 오거나 혹 날씨가 더우면 초둔(草芚)이라도 쳐서 그들로 하여금 그 속에서 숨도 좀 돌리고 기운도 가라앉혀 가면서 그들 속이 시원하도록 할 말을 다 하게 하라.”

하였다.

5월이 되자, 해마다 5월 13일에서 21일까지는 집무에 관한 사항을 여쭙지 말라고 명했다. 그것은 춘저(春邸)에 있을 때부터 이날만 되면 혼자 따로 지내면서 마치 임오년에 일을 처음 당했을 때처럼 비통해 왔었는데 이해에 영조의 복제를 마치고 나서 비로소 이렇게 명령한 것이다.

가을에는 영릉(寧陵) 배알을 계획했는데, 이해가 성조(聖祖)가 승하한 지 일주갑(一周甲)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었다. 병조 판서와 훈련 대장을 불러 하교하기를,

“군사가 1백 리 밖 나들이를 하려면 그 군용(軍容)이 더욱더 질서 정연해야 할 것이다. 옛날 당 현종(唐玄宗)이 여산(驪山)에 가 강무(講武)를 하다가 군법(軍法)이 제대로 안 되어 있다 하여 병부 상서(兵部尙書) 곽원진(郭元振)을 법으로 처리한 일이 있었다. 지금 이 하교 역시 명장 서사(命將誓師)와 같은 뜻으로 한 것이니 각기 노력하라.”

하고, 대가 앞에 있는 신전(信箭)을 가리키며 이르기를,

“대리 청정 초기에 선왕께서 저것을 내게 주시고 언제나 사행(師行) 때면 저 화살을 대가 앞에다 꼭 세워두게 하셨는데, 그것은 정벌(征伐)을 단독 결정하라는 뜻이었다.”

하였다. 광나루에 이르러 용주(龍舟)를 타고는 하교하기를,

“임금은 이 배와 같고 백성은 저 물과 같은 것이다. 내가 지금 배를 타고 백성을 대하니 더욱 두려운 생각이 든다. 옛날에 성조께서 주수도(舟水圖)를 그리시고 사신(詞臣)을 불러 명(銘)을 지으라고 하신 것도 역시 그러한 뜻에서였을 것이다.”

하였다.

남한 산성에 이르러 행차를 멈추고는 하교하기를,

“병자년 일이 완연히 어제와 같은데, 날은 저물고 갈길은 멀다고 하셨던 성조의 하교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솟는구나. 사람들은 그것을 점점 당연지사처럼 잊어가고 있고 대의(大義)에 대한 관심도 점점 희미해져 북녘 오랑캐를 피폐(皮幣)로 섬겼던 일을 부끄럽게 생각지 않고 있으니 그것을 생각한다면 그 아니 가슴 아픈 일인가. 이렇게 백성들의 힘이 쇠잔하고 경비가 모자라는 시기에 왜 꼭 먼 길을 가야만 하겠는가마는 또 이 기해년을 당하여 영릉(寧陵) 행차를 하지 않는다면야 그것이 어디 천리(天理)요 인정(人情)이겠는가.”

하였다.

경기도 유생(儒生)들이 상소하여, 여주(驪州)에 있는 문정공 송시열(宋時烈) 사당에 사액(賜額) 해줄 것을 청하니, 대로사(大老祠)로 사액을 하고 어제(御製)에 어필(御筆)로 된 비를 사정(祠庭)에다 세웠다. 대가가 이천(利川)을 지날 때 길 옆에 구경 나온 백성들이 산과 들에 널려있었으며, 어떤 머리 하얀 늙은이가 길을 막아서서, 우리 임금 좀 뵙기를 원한다고 아뢰자, 제신들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내 아직 백성들에게 혜택이 미쳐갈 만한 정사나 명령이 하나도 없었는데 백성들이 이렇게 천리를 멀다 않고 왔으니 나로서는 부끄럽고 두려울 뿐이다.”

하였다. 영릉(寧陵)과 영릉(英陵) 배알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이천에서 행차를 멈추고는 윤음(綸音)을 내려 광주·이천·여주 세 고을 부로(父老)들을 개유하고, 대가가 지나는 연도의 백성들에겐 1년 치 조세를 감면하였다. 광주에서 행차를 멈추고는 하교하기를,

“인묘(仁廟) 갑자년에 색다른 중 각성(覺性)이라는 자를 얻어 팔도 도총섭(八道都摠攝)이라 명하고 승군(僧軍)을 모집하여 각 사찰에 나누어 있게 했었는데 근년에 들어서는 그들이 조련도 잘 하려 들지 않고 힘든 역사가 있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니 일단 유사시 그들을 어떻게 믿겠는가.”

하고, 수신(守臣)으로 하여금 그 폐단을 없애도록 명했다. 서장대(西將臺)에 올라 성 안에서 하는 훈련과 야간에 하는 훈련을 실시하고 장사(將士)들에게 푸짐한 음식을 내렸으며, 성 안팎을 두루 둘러보고는 그곳 형편(形便)과 고적(古蹟)에 대해 낱낱이 물었다.

행행 8일 만에 비로소 환궁했는데 우뢰의 이변이 있어 감선(減膳)을 하고 자신을 책하는 하교를 내렸으며, 그로부터 10일 후 천둥이 또 크게 치자 감선 5일을 하고 하교하기를

“하늘이 사람과 멀리 있다던가. 바로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경(經)에도 이르기를, ‘하늘이 성내시면 마음가짐을 경건히 하고 감히 장난으로 실없이 여기지 말라.’ 하였다. 가령 과인이 통렬히 자기 자신을 극복 책망하고 한껏 노력하고 두려워한다면 이미 성난 하늘의 마음도 다시 즐겁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기껏 재앙을 겪고서도 다만 옛모양 그대로 지내면서 구습을 씻어버리고 유신(維新)을 도모해야 하는 일을 까맣게 서로 잊어버려 나랏사람들 전체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 흐리멍덩한 굴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상대국의 철검(鐵劒)이 예리한 것도 깨닫지 못한 채 도리어 광대놀음이나 하고 있다면 그야말로 짚더미에 불을 붙여놓고 그 위에 앉아 편안하다고 하는 꼴인 것이다. 자기 자신을 꾸짖기에 급급하다 보면 미처 왕의 잘못에까지 눈 돌릴 겨를이 없겠지만 광필(匡弼)의 책임이 있는 우리 신하들은 나의 득실에 대해 바른말을 해달라.”

하였다.

처음에 홍국영(洪國榮)이 을미년 이전부터 주연(胄筵)을 드나들며 특별한 총애와 신임을 받아 4년 동안에 벼슬이 재열(宰列)에 오르고 중한 병권도 두루 맡았으므로 제가 잘나 그리 된 것으로 알고 날이 갈수록 더욱 교만하고 방종하여 그 권세가 세상을 좌우할 만큼 조정 모양이 점점 문란해져 갔었다. 왕은 그의 간악상을 훤히 알고서도 은인 자중하느라 티를 내지 않았었다. 급기야 홍빈(洪嬪) 상을 당하자 국영이 스스로 세(勢)가 간 것을 알고는 이제 방향을 바꾸어 이국(移國)을 해보려고 앞장서서 주장하기를,

“저사(儲嗣)를 두기 위해 빈어(嬪御)를 또다시 맞아들여서는 안 된다.”

하고는, 인(裀)의 아들 이담(李湛)을 기화(奇貨)로 삼아 그의 군호(君號)를 완풍(完豊)으로 고치고는 우리 생질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홍빈의 수빈관(守嬪官)이 되었을 때에 그의 말을 들은 자는 뼈가 시렸지만 그의 위세에 눌려 길거리에서도 눈짓만 할 뿐이었다.

역적 송덕상(宋德相)은 유자라는 명칭을 가탁한 자로서 홍국영의 부름을 받고 와 모든 언행을 오직 국영 시키는 대로만 해왔는데 이때 와서 저사에 관한 일로 투소(投疏)를 하면서 그 내용에 “무슨무슨 일은 아래 있는 자가 감히 지적해서 할 말은 못되지만 그러나 성상께서도 틀림없이 생각해보신 바 있을 것입니다. 신이 숙위 장신(宿衛將臣)을 대해서도 그 일이 제일가는 일이라고 했었습니다.” 한 대목이 있었다. 그가 말한 숙위 장신이란 바로 국영을 말한 것이고 그 일이란 담에 관한 일을 말한 것이었다. 이에 적들의 모사가 날이 갈수록 긴박하여 화기(禍機)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왕도 이제는 단안을 내리기로 마음을 굳혔으나 그러나 그와의 관계를 끝까지 보전하고 싶었고 또 적도들의 수가 많아 그들의 흉모를 예측하기 어려운 점도 고려해서 짐짓 밖에다 선시(宣示)는 않고 조용히 앞으로 불러 그의 죄상을 세며 스스로 물러가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국영은 감히 항명(抗命)을 못하고 부신을 반납하고 나갔는데 그에게 특별히 삼자함(三字啣)을 붙여주었던 것이다.

은신군 이진(恩信君李禛)을 이장할 때 숭품(崇品)의 종신(宗臣)에게 쓰는 예를 쓰도록 명하고 아름다운 시호도 내렸다. 그리고 하교하기를,

“시법(諡法)이란 지극히 중대한 제도이며 더구나 충(忠)자 같은 글자는 더더욱 함부로 쓸 수 없는 글자인 것이다. 지금 홍문관이 의정한 시호를 보면 단례(斷例)로 비추어볼 때 좀 분수에 넘친다 싶은 혐의가 있잖은가.”

하고, 옛 시법을 다시 수명(修明)하라고 명했다.

4년 1월에 인정문(仁政門)에서 조참(朝參)을 받고 홍낙순(洪樂純)을 삭출하였다. 낙순은 국영의 숙부였는데 국영이 물리침을 받고 물러난 뒤에도 낙순은 아직까지 상직(相職)을 거머쥐고 있으면서 그 여세를 빙자하여 나라의 실권을 움켜쥐려 하였고 국영은 또다시 들어올 기회를 넘보면서 문형(文衡)을 맡아 그것으로 최종 치사(致仕)의 발판을 삼으려고 했다. 그때는 서명선(徐命善)이 영의정이었고 그의 형 명응(命膺)이 문형을 맡고 있었는데 대신(臺臣) 이보행(李普行) 등이 번갈아가며 소장을 올려 탄핵하자, 하교하기를,

“내가 적임자가 아닌 자에게 일을 맡겼기 때문에 실권이 아랫사람에게로 옮겨져서 죽이고 살리고 위엄을 보이고 복을 주고 하는 권한이 장차 수습할 수 없는 단계에까지 가게 되었으니 어찌 차마 나라 망하는 꼴을 앉아서 보기만 하고 그것을 바로잡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늘 일은 모두가 대신(大臣) 한 사람이 저지른 죄인 것이다.”

하고, 낙순은 삭출하고, 보행은 섬에다 안치하도록 명하였다.

명릉(明陵)을 배알했는데 승하한 지 일주갑이 되는 해였기 때문이었다.

이조 판서 김종수(金鍾秀)가 수차(袖箚)로 홍국영의 죄를 성토했는데, 저사(儲嗣)를 널리 구하는 방법을 막았다는 죄목이었고, 삼사에서도 번갈아가며 소장을 올려 강력히 청하였으므로 국영을 전리(田里)로 방출하도록 명하였다. 그때 대각(臺閣)에서 올린 탄핵문이 날마다 공거(公車)에 쌓였는데, 왕이 연신(筵臣)에게 하교하기를,

“인재를 고르는 데 있어서는 상대가 중인(中人) 이하일 것으로 기대해야만 할 것이다. 《명의록(明義錄)》이 만들어졌을 때 그가 곧 의리(義理)를 아는 장본인이었고 그와 사귄 사람도 나라편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을미 병신년 이후로 세상이 자주 변하여 국맥(國脈)이 적지않게 손상되었는데 지금 그 병을 고치는 방법으로서는 무엇보다도 서로 한마음으로 머리를 맞대고 아무 사심없이 서로 공경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피차 상대를 공격하기만을 일삼아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는데 가령 한 사람이 다치게 되면 국맥도 그만큼 손상되는 것이니 그 얼마나 소름끼치는 일인가.

후한 말엽에 명분론(名分論)이 준엄했던 까닭에 조조(曹操)가 비록 곁을 맴돌며 한(漢)을 넘보았지만 감히 스스로 손을 대지는 못하고 핑계가 천자(天子)를 보호한다는 명목이었기에 순문약(荀文若) 같이 내노라 했던 자도 역시 몸바쳐 그를 섬기지 않았던가. 지난번에 있었던 일들이 그와 다를 게 뭐겠는가. 제신들이 만약 진정과 안정을 바라는 내 뜻을 이해하고 따라주지 않는다면 앞으로 조정은 텅 비고 말 것이다. 어디 그럴 수야 있는 일인가.”

하였다.

화빈(和嬪) 윤씨(尹氏)와 가례(嘉禮)를 올렸는데 판관(判官) 윤창윤(尹昌胤)의 딸이었다. 가을에는 영릉(永陵)을 배알하고, 겨울에는 천둥으로 인해 구언(求言)의 윤음을 내렸었다.

5년 1월 원릉(元陵)을 배알하고 다른 능들도 두루 배알했는데, 그해가 신축년으로 바로 영조가 세자 책봉을 받은 지 일주갑이 되는 해였기 때문이었다. 사충사(四忠祠)에 제(祭)를 내리고, 증 참의(贈參議) 김성행(金省行)에게 가증(加贈)할 것과 고 학생(學生) 서덕수(徐德修)에게 집의(執義)를 추증할 것을 명했다. 그리고 강제(講製)를 익힐 문신(文臣)을 뽑아 아뢰는 제도를 실시하도록 하고, 하교하기를,

“근래 나이 젊은 문관(文官)들이 겨우 과거에 급제만 하면 책이라고는 아예 덮어버리는 풍습이 점점 고질화되어 쉽게 바로잡혀지지 않기 때문에 비록 전경(專經)이니 월과(月課)니 하는 규정들이 있기는 해도 하다말다 해 일정한 법도가 없어 명실(名實)이 서로 맞지 않는다. 국가에서 권과(勸課)하는 방법이 이미 잘못되었으니 신진(新進)들이 태만한 것을 그들에게만 책임지울 수도 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지금 옛 교육제도를 모방하여 인재를 만들어내는 길을 마련하려고 하는데, 독서당만으로는 너무 단조롭고 지제교는 조금 취약한 점이 있으므로 만약 문신(文臣) 당하관들 중에서 나이를 제한해서 사람을 널리 뽑아 매월 경사(經史)를 강하게 하고 열흘마다 정문(程文) 시험을 보여 근만(勤慢)에 따라 상벌을 실시하면 문풍(文風)을 진작시키는 데 있어 일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고, 의정부에 명하여, 승문원의 문신들을 참상(參上)·참외(參外) 할 것 없이 나이 37세 이하인 자들을 뽑아 아뢰고 내각(內閣)이 강제에 관한 절목을 만들어서 시행하도록 하였다.

왕이 강제에 임한 문신들에 대한 권과와 그들을 인재로 만들어내는 방법에 있어 지극한 정성을 다하고 그들에 대한 은우(恩遇)도 각신(閣臣) 다음가는 수준으로 하였다. 그리하여 신축년 선임 이후 무릇 10차에 걸쳐 선임을 했는데 지금 공경 대부(公卿大夫)인 자들 태반이 다 강제에 임했던 문신들이다. 또 하교하기를,

“문강(文講)과 무강(武講), 문제(文製)와 무사(武射)는 마치 수레바퀴나 새 날개와 같아서 어느 한쪽도 폐해서는 안 된다.”

하고, 선전관으로 하여금 무강·무사 시험을 문강·문제하는 문신들 예에 준하여 실시하도록 명했다.

창덕궁(昌德宮)의 도총부(都摠府)를 이문원(摛文院)으로 명명하고 어필로 편액을 썼는데, 그 원이 옛날에는 금원(禁苑)에 있던 것을 지대가 너무 깊숙하다 하여 영숙문(永肅門) 밖으로 자리를 옮긴 것으로, 이때 와서 간신들이 상차하여, 원을 옮기는 것이 편리하다고 아뢰어, 허락한 것이다. 하교하기를,

“규장각에 임어하여 새롭게 정무를 볼 때 전직 각신(閣臣)들이 시강관(侍講官)·강서관(講書官) 자격으로 모두 책을 끼고 당(堂)에 올라 경의(經義)를 강설하고 치도(治道)에 대해서도 각기 소견을 개진했으며 과인의 잘못과 정사의 득실까지도 모두 거론했었는데 그들이 비록 논사(論思)의 책임자들은 아니었지만 그날 그 자리는 응지(應旨)의 자리나 다를 바 없었다. 지금도 마음속에 쌓여 있는 것이 있으면 각기 다 털어놓도록 하라.”

하였다. 그런데 그날의 예수(禮數)와 의식 절차는 대략 학궁(學宮)에 임어할 때의 의식을 모방했고, 선왕조 때 임어하여 일 보시던 고사(故事)도 참고했으며 송(宋)나라 때 원(院)에 행행했던 사실들도 참작해서 아뢰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내로 돌아올 때는 홍문관도 들러 두루 임어했었는데 그것은 《논어》에서도 말했듯이 그 예를 아끼는 뜻에서였던 것이다.

3월 신축일에는 이문원에 행행하여 《근사록(近思錄)》의 도체편(道體篇)을 강했는데 그 때도 전임 각신들이 반을 나누어 당에 오르고 홍문관 영사(領事) 이하는 강(講)을 들었으며 강을 마치고는 음식을 내렸다. 그리고 이어 홍문관으로 행행하여 경연(經筵)의 신하들과 《심경(心經)》을 강했는데 내각과 홍문관의 신하들이 전(箋)을 올려 그 일을 축하했었다. 규장각이 건립된 지는 몇 해 되었으나 모든 제도가 제대로 마련이 되지 못했었는데 홍국영이 축출당한 후로는 조정 분위기가 깨끗해졌고 왕은 왕대로 치적을 높이기에 더욱 노력하였으므로 이제 온갖 제도가 모두 완비되었다. 그런데다 거듭 여러 각신으로 하여금 고금을 참작하여 하나하나 차근차근 수거(修擧)하도록 하여 각(閣)의 규모가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갖출 것을 다 갖추었다. 이에 교서관(校書館)을 외각(外閣)으로 삼고 본각은 내각(內閣)에다 소속시켜 제학(提學) 이하는 겸직 제도를 두었다. 그리고 강화도 어고(御庫)에 봉안되어 있던 책보(冊寶)와 서적들은 다시 각을 지어 간직해 두고 그 각을 이름하여 외규장각(外奎藏閣)이라 하였다.

《팔자백선(八子百選)》이 만들어졌는데, 이는 왕이 문장이 날이 갈수록 저하되는 것을 걱정하여 손수 《당송팔가문(唐宋八家文)》에서 선발하여 간행한 것이다.

여름에 영우원(永祐園)을 배알하고 동쪽 적전(籍田)에서 보리 베는 것을 구경한 다음 노주례(勞酒禮)를 행했는데 이는 영종이 하던 고사를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돌아와서 팔도(八道)와 양도(兩都)에 윤음을 내려 농정(農政)을 권면하였다. 왕은 언제나 정월이면 반드시 권농(勸農)의 윤음을 내려왔었는데 그날은 보리 수확 구경을 하고 노주례를 행했던 끝이었기에 거듭 독려를 한 것이다. 큰비가 내려 사문(四門)에다 영제(禜祭)를 행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나라를 둔 자로서는 가장 걱정거리가 장마와 가뭄 그리고 도둑이니 그런 일이 있을 때면 위에다 알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윗사람도 항상 두려움과 경계 속에서 감히 사치하고 안일한 생각을 갖지 못하는 것도 역시 그것들 때문인 것이다. 이 좋은 말은 바로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의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요즘 와서는 사실을 숨기는 것이 풍속이 되어 담당관이 등문(登聞)을 않고 있으니 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아, 나라 전역에 있는 백성들이 모두 나의 자식들이다. 그러나 도성 안의 백성들이 겪는 고락은 관계된 바가 더욱 중하다. 혹시 도성 안에 고달픔을 한탄하는 소리가 있는데도 내가 들어 알지 못한다면 백성들의 임금된 의의가 어디 있겠는가.”

하고, 이어 한성부와 포도청에다 경계령을 내렸던 것이다.

8월에는 명릉(明陵)을 배알했는데, 이달이 영조가 세자로 책봉된 달인데다가 그날은 숙묘(肅廟)가 탄생한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영조가 잠저(潛邸)에 있던 신축년 8월 보름날 소령원(昭寧園)을 배알하고 돌아오는 수레가 덕수천(德水川)에 당도했을 때 소를 몰고 지나가는 도둑이 있어 뒤 따르던 자가 그 사실을 알리자, 검암(黔巖)의 발장(撥將)을 명하여 소는 몰아다 주인에게 돌려주게 하고 도둑은 불문에 부쳤었는데 도성으로 돌아오자마자 후사로 세운다는 명령이 내렸었다. 그런데 이때 와서 왕이 그 날을 생각하고 느끼는 바 있어 능 배알을 마치고는 어제(御製)로 그 사실을 기록한 비(碑)를 파발의 관사 앞에다 세우고 어진(御眞)을 그려 규장각 주합루(宙合樓)에다 봉안하였다. 그리고 각신(閣臣)이 쉬는 날에도 숙직을 하면서 봉심하는 규정을 처음으로 두었는데 이는 멀리는 천장각(天章閣)에서 한 일을 모방한 것이고 가까이는 태령전(泰寧殿)의 의식을 취한 것이다.

호서(湖西) 사람 연덕윤(延德潤) 등이 송덕상(宋德相)의 억울함을 변호하려고 네 도에 통문을 보내 저들끼리 서로 선동을 일삼자, 도신(道臣)이 그 사실을 아뢰어왔고 제신들은 일제히 국청을 개설할 것을 청했다. 이에 왕은 왕부(王府)를 번거롭게 할 것까지 없다 하며 사신을 보내 사실을 조사하여 죄상에 따라 적절한 처리를 하도록 하고 덕상은 삼수(三水)로 귀양을 보냈다. 겨울에 하교하기를,

“서북(西北) 지방은 바로 국경 지대로서 곳에 따라 문(文)으로 다스리기도 하고 무(武)를 장려하기도 해야 하는데 근래 들어서는 습속이 점점 해이하여 무는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고 모두 유명(儒名)만을 좋아하기 때문에 풍기가 시들하고 연약하여 변경 방어가 염려스러울 정도로 허술하니 내 매우 걱정되는 바이다. 그런데 가만히 그 까닭을 찾아보자면 전적으로 용사(用舍)와 지휘의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정부의 주의(注擬)를 벗어나지 않는데 있다. 대신(大臣)과 장신(將臣) 그리고 병조 판서는 서북 지방 무변(武弁)의 수용 정책에 대해 숙의하여 통합된 의견을 아뢰라.”

하였다.

단군(檀君)·기자(箕子)와 삼국(三國)·고려(高麗) 시조들의 왕릉(王陵)을 개수하였다. 왕은 지난 시대 왕조들에 대해 덕 있는 이를 숭배하고 어진 이를 본받는 일이면 더욱 그를 못잊어하여 수로왕(首露王)의 능을 비롯해서 신라 여러 왕의 능에다 잔을 올리고, 삼성사(三聖祠) 제례 의식을 다시 정했으며, 온조왕(溫祚王) 사당을 숭렬전(崇烈殿)이라 이름하고, 고려 사태사(四太師) 사우(祠宇)에는 사액(賜額)을 하였다.

6년 봄에 홍릉(弘陵)을 배알하고 이어 여러 능도 배알했으며, 여름에는 영우원을 배알했다. 오랫동안 가물자 왕은 정전(正殿)을 피하고 친히 우사단(雩祀壇)에 가 기우제를 지냈는데 일산을 떼어버린 보여(步輿)를 타고 단에 이르러 직접 희생과 기물을 살펴보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예복 차림으로 노상에 앉았다가 예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운종가(雲從街)에 이르러 의금부와 형조의 경미한 죄수들을 풀어주었다. 환궁한 뒤에도 오히려 곤룡포를 벗지 않고 난간을 의지해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윽고 과연 비가 내렸다.

가을에는 권홍징(權泓徵)·송덕상(宋德相)·송환억(宋煥億)·문인방(文仁邦)·백천식(白天湜)·이경래(李京來)를 친국하고 해서(海西)에 사신을 보내 신형하(申亨夏)·박서집(朴瑞集) 등을 조사하여 사실을 밝히게 했다. 권홍징은 흉서(凶書)를 투서한 자이고, 형하와 서집은 덕상을 두둔하면서 음흉하고 끔찍한 저의를 가지고 글을 써서 서로 돌리는 자들이었으며, 인방·천식·경래 등은 요사한 글과 말로 서로 붕당을 결성하고 유언을 만들어내면서 난리를 일으킬 음모를 꾸민 자들로서 그들끼리는 부서(部署)가 이미 정해진 상태였고 그들 모두는 덕상을 유일한 의지로 삼고 있었다. 차근차근 친국을 받고 사실을 토로한 다음 홍징·인방·천식·경래는 법에 의해 주륙을 당하고, 덕상은 지레 죽었으며 환억은 먼 섬에 위리 안치되고, 형하 등은 각기 정상을 참작하여 정배했었다. 그런데 그때는 그러한 옥사가 계속해서 일어나고 연루자도 점점 늘어났으며 각도에서 밀계(密啓)하는 글들이 길에 이어져 있었다. 왕은 이러한 일들이 결국 죄없는 백성들에게 화가 미치리라는 것을 깊이 우려한 나머지 윤음을 내려 국영·덕상 등의 범죄상을 포고하고 그 말미에다 이르기를,

“오늘 역옥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급선무로 삼아야 할 것은 진정과 안정[鎭安] 두 글자이다. 그 무리들을 다 찾아내고 숨겨진 내용까지 다 들추어내어 모조리 죽여없애고야 말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내가 듣고 싶어 하는 바가 아니다. 요즘 병영이나 곤수들에게서 올라온 것들이 아뢰지 않아도 될 것을 아뢴 경우가 간혹 있는데 집에다 비결 따위를 간직해둘 경우 그에 따른 처벌 규정이 있기는 하지만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어리석은 백성들이야 그것이 무슨 문서인지조차 모를 것은 이상할 게 없는 일 아니겠는가. 만약 그 켸켸묵은 종이 한 조각까지 요언(妖言)이요 불궤(不軌)로 규정을 한다면 그 얼마나 불쌍하고 동정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외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내 비록 눈으로 직접 볼 수는 없으나 그러나 역졸(驛卒)들의 왕래가 많아 도로가 시끄럽고 추적이다 체포다 하여 마을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다 또 고을마다 돌면서 정탐(偵探)을 하고 우연한 말 한마디까지 적발을 한다면 그것은 결코 국가의 본의가 아닐 뿐만 아니라 인심이 흔들려 안정을 송두리째 잃을 염려도 있으니 너희 크고 작은 신료들은 반드시 상대를 깨우치는 방법과 용서하는 마음을 강구하고 갖도록 각자 명심하고 서로 권면하고 격려하라. 비록 제방도 무너지게 해서는 안 되지만 혹시라도 함정이 넓어지게 말 것이며 차라리 죄인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오직 함께 새로워지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백성을 맡아 다스리기 6년이 되도록 정교가 확립되지 않아 악한 자가 선한 자로 변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고 죄에 걸리는 자만 날이 갈수록 많아져 감옥이 빌 만큼 교화가 이뤄질 희망은 안 보이고 수레에서 내려 울 일만 늘 있으니 내 거듭 부끄럽고 한탄스러운 바이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근일에 역적들이 비결 쪽지를 가지고 백성을 현혹시킬 수 있었던 것은 정학(正學)이 밝지 아니한 소치이다.”

하였다. 이에 유술을 숭상하고 도를 중히 여긴다[崇儒重道]는 윤음을 내려, 이조에서는 문학(問學)의 선비들을 골라 뽑게 하고, 각도의 방백(方伯)들에게는 경(經)에 밝고 행실이 얌전한 자들을 추천하도록 명했으며, 소현(紹賢)·화양(華陽) 두 서원에 사제(賜祭)하였다.

왕은 초기부터 유술 숭상을 급선무로 삼아 문묘(文廟)에 배향된 국조 제현(諸賢)들을 모두 표장(表章)하고 혹 관원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도 했으며, 혹은 그들 유문(遺文)에 대해 친히 제(題)를 쓰기도 했고, 또 혹 그들 자손을 녹용(錄用)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 문하의 여러 유생들까지도 모두 은총을 베풀었다.

경기·호서·영남에 기근이 들자 윤음을 내려 백성들을 위로하고 타이르는 한편 구휼 정책을 강구하도록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도하 백성들 생활 방편이 오로지 기호(畿湖)에 달려 있는데 기호 지방이 흉년이라 하여 내 오래 전부터 도하 백성들 걱정을 해왔던 터이다. 우리 나라 발매(發賣) 제도는 바로 한(漢)나라 때 진대(振貸)와 같은 것이니 한성부 진휼청으로 하여금 미리 호구를 조사하여 쌀 발매 정책을 정확히 세워두게 하라.”

하였다.

9월에 문효 세자(文孝世子)가 탄생했는데 의빈(宜嬪) 성씨(成氏) 소생이었다. 영우원을 배알하고, 겨울에는 《국조보감(國朝寶鑑)》이 완성되었다. 당초 세조(世祖) 정축년에 대제학(大提學) 신숙주(申叔舟)에게 명하여 태조(太祖)·태종(太宗)·세종(世宗)·문종(文宗) 이상 4대의 보감을 찬술하도록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국조보감》이 된 것이다. 그로부터 이후로 계속된 왕조가 이 4조의 뒤를 이어 속성(續成)을 시도했으나 미처 손을 못 대고 있다가 숙종(肅宗) 경신년에 와서야 공조 참판(工曹參判) 이단하(李端夏)가 《선묘보감(宣廟寶鑑)》을 편찬하고, 영조(英祖) 경술년에는 대제학 이덕수(李德壽)가 《숙묘보감(肅廟寶鑑)》을 편찬해 올렸었다. 그러나 여러 국조의 보감이 하나의 통일 체제로 이루어지지는 못했었는데 신축년 가을에 와서 《영종실록(英宗實錄)》이 완성되자, 왕이 대신·각신들에게 말하기를,

“선왕의 50년에 걸친 훌륭한 덕과 위대한 사업은 역사에도 이루 다 기록 못할 것들이지만 실록은 석실(石室) 금궤(金櫃)에 깊이깊이 비장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고 오직 이 보감이라는 것이 비사(秘史)와는 조금 성질이 다르니 체제는 비록 편년체(編年體)를 쓰더라도 되도록 유양(揄揚)하는 쪽에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이다. 지금 실록이 편성되었으니 이제부터 보감을 엮는 일을 시작한다면 나 개인에 있어서도 선왕의 교훈을 빛내고 공업을 천양하는 도리에 있어 유감됨이 없지 않겠는가.”

하였는데, 제신들이 같은 목소리로 찬성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세조 때 이루어진 보감 외에는 선조·숙종 두 국조의 보감이 있을 뿐 그 밖의 12국조는 아직까지 아무런 기록이 없으니 지금 그 모두를 함께 편집하여 이상 세 국조의 보감 및 영묘 보감(英廟寶鑑)을 합쳐 한 책으로 만들어서 영원히 전해지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각 국조 실록들을 강화도에서 모셔오게 하고, 또 12명의 사신(詞臣)을 차출하여 편찬을 각기 분담하도록 했으며, 또 전임 대제학 이복원(李福源)·서명응(徐命膺) 등에게는 교정을 맡겨 무릇 7개월에 걸친 작업 끝에 보감이 완성을 보았는데 총 68권으로 된 책을 활자로 인쇄하였다. 제신들이 전문(箋文)을 갖추어 올리자, 왕은 법전(法殿)에 나아가 친히 받고는 하교하기를,

“우리 나라 고사(故事)에도 매 실(室)마다에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주(周)나라가 종묘에 보기(寶器)를 진열해둔 일, 또는 송(宋)나라가 궁전에다 옥첩(玉牒)을 간직했던 일들을 모방하여 입묘(入廟)할 때 반드시 그것들을 다 봉안해 왔었다. 이 보감도 그 내용이 선왕의 공덕을 들추어내 후손들에게 복을 물려준 내용인즉 사실 서서(西序)의 대훈(大訓)과 그 규모가 같다. 비록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완염(琬琰)이나 제도를 소명하는 새장(璽章) 같은 것으로도 오히려 그 소중함을 비유할 수 없는 물건이다. 다만 그동안 제도가 잘 갖추어지지 못하여 성대한 예를 행하는 데 부족한 바가 있었기에 3백여 년을 두고 아직 궐전(闕典)으로 남아있었던 것이지만 열조(列朝)의 보감이 찬란하게 다 이루어진 오늘에 있어서야 어찌 감히 그를 경건히 비궁(閟宮)에다 바치고 그것을 이 나라 고유의 예로 삼아 우리 자손 만세에까지 영원한 교훈으로 남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이에 책보(冊寶) 올리는 의식 절차를 참고 모방하여 보감을 종묘(宗廟)와 영녕전(永寧殿)에다 친히 올리고 각 실에도 따로따로 두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윤음을 내려 대소 신료의 의견을 물어 영종(英宗)을 높여 세실(世室)로 삼고 원자(元子) 호칭을 정한 다음 백관들로부터 하례를 받고 팔도(八道)와 양도(兩都)에 견휼(蠲恤)의 정령을 내렸으며 이어 대사면령을 중외에 내려 죄수 3천여 명을 석방시켰다.

【원전】 47 집 294 면

【분류】 *왕실(王室) / *역사(歷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