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왕실록 ▒

純祖 19卷 16年 正月 21日 (辛丑) 002 / 혜경궁 지문

천하한량 2007. 3. 23. 03:26

純祖 19卷 16年 正月 21日 (辛丑) 002 / 혜경궁 지문


惠慶宮誌文:

惠嬪, 思悼綏德敦慶弘仁景祉章倫隆範基命彰休, 莊獻世子之配, 我寧考正宗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之本生母也。 寧考以英廟, 命爲思悼孝章世子嗣, 故寧考卽位, 遵英廟遺敎追尊孝章爲王。 賢嬪爲后, 奉之宗廟, 示民不貳本。 乃惟所生之義, 至尊至大, 追諡思悼莊獻, 稱廟曰景慕宮, 祭儀下宗廟一等, 稱墓曰園。 而進嬪宮號曰惠慶, 恒言稱慈宮凡尊奉之禮, 進獻之節, 亦下大妃一等。 於是國人, 服寧考之孝, 而事嬪擬於長樂者, 四十年如一日矣。 我聖上嗣服之十五年乙亥十二月十五日乙丑, 嬪薨于昌慶宮景春殿, 春秋八十有一。 大臣閣臣獻議, 引程正公論濮園禮, 上及王大妃服大功, 中宮服小功, 王世子服緦。 有司攷諡法, 聰明睿智曰獻, 夙夜儆戒曰敬, 遂上諡曰獻敬, 明年丙子三月初三日, 祔于莊獻顯隆園, 禮也。 園舊號永祐, 在楊州治之拜峯山。 寧考己酉, 以風水不叶吉, 移奉于水原府花山癸坐之岡, 改今號陵墓。 追祔多同兆而異封, 是園之法方中也, 寧考命虛其左, 爲合墳之制曰, ‘予之情事異於人也。’ 至是因其制以相役, 嗚呼! 慟哉! 上, 以臣祖淳夙事寧考, 地又屬肺腑, 命進幽宮之誌, 而慈殿又書下行錄于廷, 俾撰詞者, 得以徵信。 臣承命悸懼欲辭, 而情又不敢, 則乃拜手稽首而撰次焉。 謹按嬪姓洪氏, 系出安東豐山縣。 上祖之慶, 高麗國學直學, 自是世有顯人。 入我朝, 有諱履祥, 復大顯, 官大司憲, 贈領議政諡文敬。 再轉而爲永安尉文懿公柱元, 尙宣祖貞明公主。 高祖諱萬容, 禮曹判書, 諡貞簡, 曾祖諱重箕, 司僕寺僉正, 贈左贊成, 祖諱鉉輔, 禮曹判書贈領議政, 諡貞獻。 考諱鳳漢, 遭際英廟, 官至領議政, 諡翼靖。 娶韓山李氏高麗韓山之後, 觀察使之女。 以英廟十一年乙卯六月十八日丙戌, 生嬪于盤松坊外氏第。 前夕, 翼靖公夢黑龍蟠寢上, 金鱗照耀, 厥明嬪乃降。 自幼孝友慈仁, 莊重溫和, 未嘗違父母志, 甫四五歲, 卽不出中門之外。 戲嬉不事, 不喜芬華, 見同輩兒衣飾華麗, 泊然無歆艶色。 七歲, 貞獻歿時, 外氏因婚而宴。 或請與往觀, 不肯曰, ‘身有祖父服, 何忍與吉事? 其人以 ‘七歲不受服’, 强之, 嬪曰, ‘吾雖不受服, 父親在縗絰中, 不可赴也’, 聞者大奇之。 癸亥, 英廟莊獻擇配, 嬪方九歲, 膺三揀。 英廟翼靖公, 授《小學》《內訓》《御製訓書》等書于別宮, 嬪一聞輒通, 其義記誦無遺, 我寧考嘗語筵臣曰。 ‘我慈宮, 自少凡耳目之所經涉, 終身不忘, 自宮中故事, 以至國朝典憲, 人家氏族, 靡所不記。 予或有所疑, 未嘗不仰質, 仰質未嘗不歷歷指敎, 聰明博識, 予不敢仰企也。’ 甲子正月, 冊爲世子嬪, 是月行嘉禮, 朝見于英廟仁元大妃, 貞聖后祥和之貌, 渾然天成, 進退周旋禮儀。 棣棣六宮, 觀者無不動色, 三殿相賀曰, ‘得此佳婦, 國家之福也。’ 旣上奉三殿及暎嬪, 洞屬如不及, 問寢必坐而待曙。 恪遵英廟訓誨, 盡力服行, 待諸翁主, 友愛篤洽, 諸主亦皆誠心輻輳。 雖鄭致達妻之性狡難化者, 不敢露纖芥之色, 而嬪之所以推誠處之者, 驩然有餘裕也。 〔庚〕午冬懿昭世孫生。 未幾薨。 三殿大傷疚。 嬪恐其增戚也, 進見之際, 色辭如常。 至壬申九月我寧考誕降英廟喜甚謂嬪曰: ‘汝以貞明之孫, 嬪于王家, 今有大功於宗社, 奇幸何可勝也?” 嬪愈小心恭愼, 不敢自懈撫愛。 寧考, 極其慈恩, 然敎導必以義方, 衣服飮食, 務從儉約, 勸學勉德, 每以聖人爲期。 我寧考邃學峻德, 實由天縱, 而蒙養之正, 蓋有賴耳。 及至庚戌大慶, 睿齡已近六旬, 而保抱看護, 不憚晝夜, 殷勤劬勞。 若寧考, 初寧考每曰: ‘慈宮至誠, 上格神明, 有此邦慶, 誕辰同日, 天意豈偶然也?” 丁丑, 貞聖仁元兩后, 相繼禮陟, 嬪悲慕哀痛, 九時哭泣, 未嘗一闕。 祭奠必皆躬執曰, ‘不於此時, 少伸微誠, 何以報眷愛之恩也?” 自兩后之喪, 內政無統攝, 嬪嚴束宮人, 不敢失舊規, 奉承英廟, 尤致誠敬, 英廟嘉賞不已, 常稱孝婦。 己卯貞純后入宮嬪執婦道如事貞聖。 旣而二外家不相能(搆)〔構〕釁日深往往事有至難言者, 嬪恭怡遜默, 和氣藹然, 宮中上下, 至今悅服, 以爲難也。 壬午閏五月, 莊獻薨, 嬪抱穹壤之痛, 懷宗社之憂, 屛俟私第。 不遠而復, 則銜恩制義, 黽勉人世, 祗見之日, 和敬彌著。 英廟大感歎, 手書扁曰, 嘉孝堂, 命揭寢室。 由是思媚兩殿, 導迪聖胤, 茹茶如甘, 履艱愈泰, 終乃措國本於磐石, 垂令名於無窮, 苟非至誠動天地, 至性盡人倫, 則何以有此? 嗚呼! 偉哉! 是年賜號惠嬪。 丙申英廟昇遐, 嬪號慕罔極, 哀毁過制, 見者感動。 寧考二年戊戌, 進號孝康, 七年癸卯, 加上號慈禧, 八年甲辰, 加上號貞宣, 十九年乙卯, 以莊獻及嬪寶甲載回, 加上號徽穆。 二月寧考奉慈駕, 詣顯隆園, 祗謁仙寢, 還至水原府, 行大宴禮于行宮。 問高年賜士庶米推恩, 賜六十一歲及七十以上爵。 上及百官, 皆簪花入都, 光輝之盛, 簡牒所未有也。 明年丙辰六月, 寧考行內宴于迎春軒, 命戚臣之與宴者, 皆得仰瞻。 每歲誕日, 必進饌以开慶, 寧考常稱朱文公但願年年似今日之句曰, ‘晦翁先獲我心也。’ 庚申六月, 寧考开有司備饌, 俄忽弗豫, 竟至賓天, 天乎冤哉? 嬪以七旬之齡, 遽嬰逆理之痛, 崩霣冤酷, 幾不能保。 自此不復進常膳, 惟以粥飮度日也。 今上服闋, 將加上尊號, 力拒之曰, ‘吾遭庚申之變, 而不死亦頑矣, 何忍受號?” 爲甲子以冊禮舊甲, 上自內進饌, 而命詞臣撰樂章及致詞, 其後又再行, 八年之間, 三擧是禮焉。 乙丑元日, 以寶齡望八廷賀。 是月貞純后禮陟, 是時已及大耋, 不能行步, 猶哀慕如丙申。 乙亥, 以望九如乙丑禮。 是秋患痰眩, 設議藥廳, 彌月少瘳, 遂撤直擧賀儀, 未幾疾旋篤。 及奉諱日, 衣襚衿冒, 以至巾帷之微, 皆嘗預具曰, ‘他日無煩民市也。’ 嗚呼! 盛哉。 誕二男二女, 長懿昭世孫, 次卽寧考妃。 卽今王大妃殿下父淸原府院君靖翼公金時默, 女長淸衍君主, 下嫁光恩副尉金箕性, 次淸璿郡主, 下嫁興恩副尉鄭在和。 寧考二男二女, 宜嬪成氏文孝世子, 一女未周歲卒。 今上殿下及淑善翁主皆綏嬪朴氏誕生。 中宮金氏永安府院君祖淳, 主下嫁永明尉洪顯周, 今上一男, 卽王世子, 一女幼未封。 嬪天姿愷悌, 識慮高明, 非禮勿動, 處事惟愼。 事莊獻, 克敬克順, 濟以箴警, 莊獻甚敬重之。 時有諮議, 多所裨補, 厥或違忤, 從容理奪。 關雎鍾皷之樂, 近代罕比。 己巳以後, 莊獻受命代理, 則深存憂懼, 十四年間, 審〔幾〕察微, 彌綸調護者, 百千其方, 寧考每與筵臣, 語及當時事, 未嘗不慼然改容也曰, ‘慈德慈功, 外人何以能盡知也?’ 孝純后宮人, 有竊毁莊獻法服者, 事覺, 宮中悚慄, 將聞於上。 后大慼其人, 自分必死, 嬪和顔謂后曰, ‘下輩無識, 卽何足責? 願勿慼也,’ 戒宮人無敢洩, 不令上知之。 后終身感德之, 而后家人道此事, 至有泣下者, 德性之寬和如此。 國榮之稔惡也, 納其妹於宮中, 號爲元嬪, 覬覦匪分, 中壼幾危者數, 逆折奸〔萌〕, 極力保護, 終底於安泰。 而宮中事秘, 莫有知者, 故不逞之人, 反倡邪說, 以爲 ‘中壼之瀕危, 慈宮有力焉。’ 嗚呼! 其謂天可誣也, 已是不可以不辨也。 莊敬之心, 至老不已, 奉先之誠, 根於天性, 故恒居必早御盥櫛, 齊整端肅, 雖末疾沈篤之時, 尋常昏囈, 亦皆侍奉貞聖貞純兩聖母之語。 而至英廟誕辰, 夜中命侍者, 扶起而坐曰, ‘今日行眞殿酌獻, 吾何敢偃臥乎?’ 時不能轉側者, 已有日矣。 今上克繼寧考之志, 奉養如昔日, 兩宮慈孝, 融融洩洩, 而上每過宮則喜溢于色, 必設饌以勸也, 常以不得日日見爲恨。 及大漸之朝, 上, 侍側而已, 不能省矣, 嗚呼! 痛哉。 臣竊伏惟念日月之光, 非摸〔畫〕可得, 瀛海之深, 非測蠡可窮。 然今臣之所述, 非臣之所敢揄揚也。 英廟而爲之舅, 寧考慈殿而爲之子若婦焉, 二考, 也, 慈殿, 也。 聖人而媺其婦, 聖人而顯其親, 言可以耀千秋, 行可以爲萬世。 則又何加焉? 若夫正壼儀於貳極, 啓長發之嘉祥, 天也, 居其實, 無其名, 巍巍乎有而不與, 亦天也, 天之所作爲, 非人之所敢知也。 雖然, 有侐閟宮幷宗廟而饗之, 於千萬年, 本支昌熾, 聖子神孫, 繼繼繩繩者, 皆嬪之德之功之賜也。 豈曰不顯, 又誰曰不然? 嗚呼! 盛哉, 嗚呼! 痛哉。【檢校提學金祖淳製。】

 

순조 19권 16년 1월 21일 (신축) 002 / 혜경궁 지문


혜경궁 지문(誌文)에 이르기를,

“오직 혜빈(惠嬪)은 사도 유덕 돈경 홍인 경지 장륜 융범 기명 창휴 장헌 세자(思悼綏德敦慶弘仁景祉章倫隆範基命彰休莊獻世子)의 배필(配匹)이며, 우리 선왕 정종 문성 무열 성인 장효 대왕(正宗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의 본생모(本生母)이시다. 선왕께서는 영묘(英廟)의 명에 따라 사도 세자의 형이신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후사가 되었기 때문에 선왕께서 즉위하시자 영묘의 유언에 따라 효장 세자를 왕으로 추존하고 현빈(賢嬪)을 왕후로 삼은 다음, 종묘에 받들어 모시어 백성에게 근본이 둘이 아니라는 뜻을 보였다. 그러나 낳아준 의리가 지극히 높고 크므로 사도 세자께 장헌(莊獻)의 시호를 올리고 묘호(廟號)를 경모궁(景慕宮)으로 한 다음, 제사의 의식은 종묘보다 한 등급을 낮추고 묘(墓)를 원(園)으로 하였다. 그리고 빈궁(嬪宮)의 칭호를 혜경(惠慶)으로 올려서 평소 말할 때 자궁(慈宮)으로 일컬었고, 무릇 존봉(尊奉)하는 의절과 진헌(進獻)하는 절차 또한 대비(大妃)에 비하여 한 등급을 낮추었다. 이에 온 나라 사람들이 선왕의 효성에 감복하여 혜빈을 장락(長樂)처럼 섬기되, 40년을 하루같이 하였다. 우리 성상께서 왕위를 계승한 지 15년 을해 12월 15일 을축에 혜빈이 창경궁(昌慶宮)의 경춘전(景春殿)에서 서거하였는데, 이때 춘추 81세였다. 대신과 각신(閣臣)이 건의해서 송(宋)나라 정공(正公) 정이(程頣)가 논의한 복원례(濮園禮)를 인용하여 성상과 왕대비는 대공복(大功服)을 입고 중궁(中宮)은 소공복(小功服)을 입었으며, 왕세자는 시마복(緦麻服)을 입었다. 유사(有司)가 시법(諡法)을 상고해 보니, 총명 예지(聰明睿智)는 헌(獻)이고, 숙야 경계(夙夜儆戒)는 경(敬)이었으므로 시호를 헌경(獻敬)으로 올리고, 이듬해 병자년 3월 3일에 장헌(莊獻)의 현륭원(顯隆園)에 합봉하였는데, 예(禮)에 따른 것이다. 원(園)의 옛 이름은 영우(永祐)였는데, 양주(楊州)의 배봉산(拜峯山)에 있었다. 정조 기유년에 묘소의 자리가 좋지 않다고 하여 수원부(水原府) 화산(花山)의 계좌(癸坐)에 이장하고 나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능묘(陵墓)를 뒤에 부장(祔葬)할 때에 대부분 같은 자리에 봉분(封墳)만 따로 만드는데 이 원(園)의 공역(工役)이 한창 벌어졌을 적에 선왕께서 그 왼쪽을 비워 합분(合墳)의 제도로 만들고 이르시기를, ‘나의 사정은 남과 다르다.’고 하시었다. 이때에 이르러 그 제도에 따라 역사(役事)를 하였으니, 아! 슬프다.

성상께서 신(臣) 김조순(金祖淳)이 일찍이 선왕을 섬긴데다가 왕비의 지친이라고 하여 무덤에 넣을 지문(誌文)을 지어 올리라고 명하시고, 자전(慈殿)께서 또 행록(行錄)을 써서 조정에 내려 글을 짓는 사람으로 하여금 근거로 삼게 하셨다. 신이 명을 받들고 두려워서 사양하고 싶었지만 사정이 또 감히 사양할 수 없었으므로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삼가 상고하건대 빈(嬪)의 성은 홍씨(洪氏)인데, 본관은 안동(安東) 풍산현(豊山縣)이다. 시조 홍지경(洪之慶)은 고려의 국학 직학(國學直學)인데, 이로부터 대대로 현인(顯人)이 있었다. 우리 조정에 들어와서 홍이상(洪履祥)이 다시 크게 현달(顯達)하여 벼슬은 대사헌(大司憲)에 이르고, 영의정에 증직(贈職)되었으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두 번 전(轉)하여 영안위(永安尉) 문의공(文懿公) 홍주원(洪柱元)은 선조(宣祖)의 따님 정명 공주(貞明公主)에게 장가들었다. 고조(高祖) 홍만용(洪萬容)은 예조 판서이며 시호는 정간(貞簡)이요, 증조(曾祖) 홍중기(洪重箕)는 사복시 첨정(司僕寺僉正)이며 좌찬성에 증직되었고, 할아버지 홍현보(洪鉉輔)는 예조 판서이고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정헌(貞獻)이다. 아버지 홍봉한(洪鳳漢)은 영묘(英廟)의 예우를 받아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고 시호는 익정(翼靖)이다. 한산 이씨(韓山李氏)에게 장가들었는데, 고려의 한산백(韓山伯) 이색(李穡)의 후손이고 관찰사 이집(李潗)의 딸이다. 영묘(英廟) 11년(1735) 을묘 6월 18일 병술에 반송방(盤松坊) 외갓 집에서 빈(嬪)을 탄생하였다. 전날 저녁 익정공(翼靖公)의 꿈에 흑룡(黑龍)이 침실 위에 서려 있어 금비늘이 빛나는 것을 보았는데, 그 이튿날 빈(嬪)이 탄생하였다.

어려서부터 효우 인자(孝友仁慈)하고 장중 온화(莊重溫和)하여 부모의 뜻을 어긴 적이 없었으며, 4,5세가 되자마자 중문(中門) 밖에 나가지 않으셨다. 놀이를 일삼지 않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화려한 옷을 입은 같은 또래를 보아도 담담하게 부러워하는 빛이 없었다. 일곱 살에 할아버지 정헌공(貞獻公)이 죽었는데, 그때 외가에서는 혼인을 치르고 잔치를 베풀었다. 어떤 사람이 같이 가서 구경하자고 하였지만 좋아하지 아니하면서 ‘몸에 할아버지의 복제(服制)가 있는데 어찌 차마 길사(吉事)에 참여하겠는가?’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 사람이 ‘일곱 살에는 복제를 입지 않는다.’고 하면서 억지로 가자고 하니, 빈(嬪)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비록 복제를 입지 않았지만 부친이 상복을 입고 계시므로 갈 수 없다.’고 하였으므로, 듣는 이가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계해년에 영묘(英廟)께서 장헌(莊獻)의 배필을 간택하였는데, 빈(嬪)이 아홉 살로 삼간택에 뽑혔다. 영묘께서 익정공을 명하여 《소학(小學)》·《내훈(內訓)》·《어제훈서(御製訓書)》 등의 책을 별궁(別宮)에서 가르치게 하였는데, 빈(嬪)이 한 번 들으면 그 뜻을 이해하고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외우셨다. 우리 선왕께서 일찍이 경연의 신하에게 이르시기를, ‘우리 자궁(慈宮)께서는 젊어서부터 〈한 번〉 보거나 들으신 것은 종신토록 잊지 않으셨으므로 궁중의 고사로부터 국가의 제도, 타성의 씨족에 이르기까지 기억하지 못한 바가 없으셨다. 내가 혹시 의심스러운 바가 있으면 질문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질문하였을 경우 역력히 지적해 가르치지 않은 적이 없으셨으니, 총명과 박식은 내가 감히 따라갈 수 없다.’고 하셨다. 갑자년 정월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이달에 가례(嘉禮)를 치르고 나서 영묘와 인원 대비(仁元大妃)·정성 왕후(貞聖王后)를 뵈었는데, 상서롭고 화평한 모습이 혼연(渾然)히 천연적으로 이루어져서 나아가고 물러가는 절차와 예의가 세련되었다. 이에 육궁(六宮)의 보는 이들이 너나없이 태도를 변하였으며, 삼전(三殿)도 서로 하례하시며 ‘이런 아름다운 며느리를 얻었으니 국가의 복이다.’라고 하셨다. 이미 위로 삼전과 영빈(暎嬪)을 받들면서 미급한 것처럼 삼가고 조심하며 아침 문안을 드릴 적에는 반드시 앉아서 날이 새기를 기다리셨다. 영묘의 가르치심을 각별히 준수하여 힘을 다해 실행하셨으며, 옹주(翁主)들에게 돈독한 우애로 대하니, 옹주들도 모두 성심을 다하였다. 비록 정치달(鄭致達)의 아내처럼 성품이 간교하여 교화하기 어려운 사람도 감히 조금도 불평한 기색을 드러내지 못하는데, 빈(嬪)이 정성을 미루어 처리하는 바가 기쁘게 하여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오년 겨울에 의소 세손(懿昭世孫)이 탄생하였다가 얼마 안되어 죽자 삼전(三殿)이 매우 슬퍼하셨다. 빈(嬪)은 그들이 더욱 슬퍼하실까 염려하여 나아가 뵐 적에 얼굴빛과 말씀이 평상시와 같으셨다. 임신년 9월에 우리 선왕께서 탄생하자 영묘께서 몹시 기뻐서 빈(嬪)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정명 공주(貞明公主)의 후손으로서 왕가의 빈(嬪)이 되었는데, 이제 종사(宗社)에 큰 공을 세웠으니 기특하고 다행함을 어찌 이루 다 형언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셨는데, 빈(嬪)이 더욱 공순하고 조심하며 감히 게을리하지 않으셨다. 선왕을 매우 사랑하고 사랑과 은혜를 극진히 하였으나 반드시 옳은 방법으로 가르치고 의복과 음식은 되도록 검소와 절약의 쪽으로 따르게 하였으며 학문을 권하고 덕(德)을 힘쓰게 하면서 늘 성인(聖人)이 되기를 기약하셨다. 우리 선왕의 깊은 학문과 높은 덕은 실로 하늘이 내신 것이지만, 어려서 바르게 기르신 것에 힘입은 것이다.

경술년에 이르러 지금 성상께서 탄생하셨는데, 이때 춘추가 이미 60세에 가까웠지만 밤낮을 꺼리지 않고 보살피어 마치 선왕이 막 탄생하셨을 때처럼 정성을 들였다. 선왕께서 매양 이르시기를, ‘자궁(慈宮)의 지극하신 정성이 위로 신명(神明)을 감동시켜 나라에 이와 같은 경사가 있어서 같은 날 탄신(誕辰)하였으니, 하늘의 뜻이 어찌 우연이겠는가?’라고 하셨다. 정축년에 정성(貞聖)·인원(仁元) 두 왕후께서 잇따라 승하하셨는데, 빈(嬪)께서 사모하고 애통해 하여 하루 아홉 차례의 곡(哭)을 한번도 거른 적이 없었다. 제사나 전(奠)을 드릴 때 반드시 모두 몸소 보살피면서 ‘이때에 작은 정성이나마 조금 펴지 않는다면 어떻게 사랑하신 은혜를 보답하겠는가?’라고 말씀하셨다. 두 왕후의 상(喪)을 당한 뒤로 내정(內政)을 통솔할 자가 없었다. 그런데 빈(嬪)께서 궁인(宮人)을 엄히 단속하여 감히 옛 법도를 잃지 않게 하고 더욱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영묘를 받들자 영묘께서 그지없이 가상히 여겨 항상 효부(孝婦)라고 칭찬하셨다. 기묘년에 정순 왕후(貞純王后)가 궁에 들어오시자 빈(嬪)께서 며느리의 도리를 지켜 정성 왕후를 섬기듯이 섬겼다. 그런데 얼마 안되어 두 외가(外家)가 서로 심하게 불화가 생겨 왕왕 말하기 어려운 일이 있었는데, 빈(嬪)이 공손하고 온화하며 겸손하고 침묵하여 화기(和氣)가 넘쳐흘렀으므로 궁중의 상하(上下)가 지금까지 기뻐하고 복종하면서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임오년 윤5월에 장헌(莊獻)이 승하하자 빈(嬪)이 천지가 무너진 듯한 슬픔과 종사(宗社)의 근심을 안고서 사제(私第)로 물러가 기다리셨다. 그러다가 얼마 안되어 〈영묘께서〉 뉘우치시자 은혜를 생각하고 의리에 따라 애써 목숨을 부지하고 영묘를 뵙는 날에 화순(和順)과 공경이 더욱 드러났다. 그러자 영묘께서 매우 감탄하시고 가효당(嘉孝堂)이란 편액(扁額)을 손수 쓰시어 침실에 걸라고 명하시었다. 이로 말미암아 두 전(殿)의 뜻을 받들고 세손을 지도하면서 괴로움을 달게 여기시어 마침내 나라의 근본을 반석처럼 튼튼히 하고 아름다운 이름을 영원히 남기셨는데, 진실로 지극한 정성으로 천지를 움직이고 지극한 성품으로 인륜을 다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아! 거룩하도다. 이해에 혜빈(惠嬪)의 칭호가 내려졌다. 병신년에 영묘가 승하하시자 빈(嬪)이 그지없이 울부짖고 사모하여 예제(禮制)에 지나치도록 수척해졌으므로 보는 이가 감동하였다. 선왕 2년(1778) 무술(戊戌)에 존호를 효강(孝康)으로 올리고, 선왕 7년(1783) 계묘(癸卯)에 자희(慈禧)라는 존호를 더 올렸으며, 선왕 8년(1784) 갑진(甲辰)에 정선(貞宣)이란 존호를 올렸고, 선왕 19년(1795) 을묘(乙卯)에 장헌(莊獻)과 빈(嬪)의 회갑이 돌아오매 휘목(徽穆)이란 존호를 더 올렸다. 2월에 선왕께서 자궁(慈宮)을 모시고 현륭원(顯隆園)에 나아가 선침(仙寢)을 배알(拜謁)하고 돌아오는 길에 수원부(水原府)에 들러 행궁(行宮)에서 큰 연회를 베풀었다. 그리고 고령자(高齡者)를 물어서 사서(士庶)에게는 쌀을 하사하고 은혜를 미루어서 61세와 70세 이상에게는 관작을 내리고 나서 성상과 백관이 모두 꽃을 꽂고 도성으로 들어왔는데, 이처럼 성대한 영광은 간첩(簡牒)에 없는 것이었다. 이듬해 병진년 6월에 선왕께서 영춘헌(迎春軒)에서 내연(內宴)을 설행하고 연회에 참여한 종실의 신하들에게 모두 우러러보도록 명하였다. 매년 탄일(誕日)에는 음식물을 올려 경사를 장식하였고 그때마다 선왕께서 항상 ‘다만 해마다 오늘과 같기를 원한다[但願年年似今日]’는 주 문공(朱文公)의 글귀를 일컬으시며 이르시기를, ‘회옹(晦翁)이 내 마음을 먼저 얻었다.’고 하셨다.

경신년 6월에 선왕께서 유사(有司)를 신칙하여 음식물을 준비하게 해 놓고 갑자기 병이 나 결국 승하하시고 말았는데, 천명인가? 원통하다. 빈이 칠순의 나이에 갑자기 아들을 먼저 여읜 슬픔을 당하시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혹독한 원통함이 심하여 거의 보존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때부터 다시 수라를 들지 못하고 오직 죽을 마시며 나날을 보냈다. 지금의 성상께서 복제(服制)를 벗고 장차 존호를 더 올리려고 하자, 극력 거절하시기를, ‘내가 경신년의 변(變)을 당하여 죽지 않은 것도 모질은데 어찌 차마 존호를 받겠는가?’라고 하셨다. 성상께서 갑자년 책례(冊禮)의 돌[舊甲]이 돌아왔다고 하여 대내(大內)에서 음식을 올리고 사신(詞臣)에게 명하여 악장(樂章)과 치사(致詞)를 짓게 하였는데, 그 뒤에 또 두 번 행하여 8년 사이에 세 번 이 예(禮)를 거행하였다. 을축년 정월 1일에 보령(寶齡)이 71세가 되었다고 하여 조정에서 하례를 드렸다. 이달에 정순 왕후가 승하하였는데, 이때 71세의 고령에 이르러 행보하지 못하시면서도 병신년과 같이 애모(哀慕)하셨다. 을해년에 81세가 되었다고 하여 을축년과 같이 예를 행하셨다. 이해 가을에 담현증(痰昡症)을 앓아 의약청(醫藥廳)을 설치하였는데, 한달을 끌다가 조금 나았으므로 숙직을 철수하고 하례를 드렸으나 얼마 안되어 병환이 위독하셨다. 승하의 날에 이르러 수의(襚衣)·금모(衿冒)와 건유(巾帷)의 작은 것까지 모두 미리 갖추어 놓고 이르시기를, ‘후일 민간의 저자를 번거롭게 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하셨으니, 아! 거룩하시다. 2남 2녀를 낳았는데, 맏이는 의소 세손(懿昭世孫)이고 다음은 곧 선왕[寧考]이시다. 선왕의 비(妃)는 바로 지금 왕대비 전하(王大妃殿下)로, 부친은 청원 부원군(淸原府院君) 정익공(靖翼公) 김시묵(金時默)이다. 맏따님은 청연 군주(淸衍郡主)인데 광은 부위(光恩副尉) 김기성(金箕性)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청선 군주(淸璿郡主)인데 흥은 부위(興恩副尉) 정재화(鄭在和)에게 시집갔다.

선왕께서는 2남 2녀를 두셨는데, 의빈(宜嬪) 성씨(成氏)는 문효 세자(文孝世子)를 낳고 한 따님은 1년이 못되어 죽었다. 지금의 상전하(上殿下)와 숙선 옹주(叔善翁主)는 모두 수빈(綏嬪) 박씨(朴氏)가 낳았다. 중궁(中宮)은 김씨(金氏)이신데, 부친은 영안 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이고, 옹주는 영명위(永明尉) 홍현주(洪顯周)에게 시집갔다. 지금의 성상께서는 1남을 두셨는데 바로 왕세자이시고, 1녀는 어려서 아직 관작을 봉하지 않았다. 빈(嬪)께서는 타고난 자품이 화평하고 격식과 사려가 고명하여 예(禮)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고 일을 신중히 처리하셨다. 장헌(莊獻)을 지극히 공손히 섬기면서 경계하여 도우시니, 장헌께서 매우 존중하셨다. 때로 의견을 물으면 도운 바가 많았고 혹시 어기고 거스림이 있으면 조용히 이치로 해명하셨는데, 금슬의 즐거움이 근대에 드물 정도였다. 기사년 이후 장헌께서 대리 청정의 명을 받자 근심과 두려움을 깊이 가지셨는데, 14년 동안 기미를 살피며 온갖 방법으로 어루만져 보호하셨다. 선왕께서 경연의 신하들과 같이 당시의 일을 언급하실 때면 슬픈 표정을 지으시면서, ‘자궁(慈宮)의 공덕을 외인(外人)이 어찌 다 알 수 있겠는가?’ 하셨다. 효순 왕후(孝純王后)의 궁인 중에 장헌의 법복(法服)을 훔쳐다 훼손한 자가 있었는데, 일이 발각되자 궁중이 두려워하여 장차 위에 아뢰려고 하였다. 효순 왕후께서 그 사람이 반드시 죽을 것을 알고는 매우 슬퍼하자, 빈(嬪)께서는 온화한 얼굴로 효순 왕후에게 말하기를, ‘아랫것들은 무식합니다. 책망할 것이 있겠습니까? 슬퍼하지 마소서.’라고 하고, 궁인들에게 누설하지 못하게 경계하여 성상께서 모르게 하였다. 이에 효순 왕후가 종신토록 그 덕에 감복하였고 효순 왕후의 가인(家人)들이 이 일을 말하며 눈물을 흘리는 자까지 있었는데, 그 덕성의 너그럽고 온화함이 이와 같았다. 홍국영(洪國榮)의 악(惡)이 무르익었을 적에 그 누이동생을 궁중에 들이고는 원빈(元嬪)이라고 일컬으면서 분수에 벗어나는 일을 넘보았으므로 중궁이 누차 위태로운 지경에 놓였으나, 〈빈께서는〉 간사한 싹을 미리 꺾어 극력 보호함으로써 마침내 안전하게 되었다. 그런데 궁중의 일은 은밀하여 아는 이가 없기 때문에 불만을 품은 무리가 도리어 간사한 말을 퍼뜨리기를, ‘중궁이 위험에 빠진 것은 자궁이 주장하여 꾸며낸 일이다.’라고 하였다. 아! 이는 하늘도 속일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니, 분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근엄하신 마음은 늙을 때까지 변하지 않고 선조를 받드는 정성은 천성으로 타고나셨다. 그러기 때문에 평상시에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를 빗어 몸을 단정하게 하셨으며, 비록 병환이 위중하실 때에나 보통 잠꼬대하실 적에도 모두 정성(貞聖)·정순(貞純) 두 성모(聖母)를 모시고 받드는 말씀이었다. 영묘의 탄신에 이르러서는, 밤중에 수종드는 자에게 〈자신을〉 부축하여 일으켜 앉혀 달라 하시고 이르시기를, ‘오늘은 진전(眞殿)에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할 것인데 내가 어찌 감히 누워 있겠는가?’라고 하셨다. 이때 몸을 움직이지 못하신 지 이미 여러 날이 되었다. 지금의 성상께서는 선왕의 뜻을 이어받아 옛날 양궁(兩宮)의 자효(慈孝)처럼 화기 애애하여, 성상께서 궁에 들를 때마다 기쁨이 얼굴에 넘쳐흘렀으며, 반드시 음식을 차려 놓고 권하면서 항상 날마다 보지 못하는 것을 한스러워하셨다. 병환이 위독한 아침에 이르러 성상께서 곁에 모시고 있었으나 이미 알아보지 못하셨으니, 아! 애통하다.

신은 삼가 생각하건대 해와 달의 빛은 그림으로 나타낼 수 없고 바다의 깊음은 표주박으로 측량할 수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지금 신이 서술한 바는 신이 감히 찬양할 바가 아니다. 영묘를 시아버지로 삼으시고 선왕과 자전(慈殿)을 아드님과 며느님으로 삼으셨는데, 두 선왕은 요순(堯舜)과 같은 분이시며 자전은 임·사(任姒)와 같은 분이시다. 성인(聖人)이 그 며느님을 칭찬하고 성인이 그 어머님을 드러냈으니, 말씀이 천추(千秋)에 빛날 것이며, 행실이 만세에 법이 될 것이다. 또 무엇을 더할 것이 있겠는가? 대체로 세자의 배필이 되시어 장구한 아름다운 상서를 열은 것은 하늘이요, 그 실상은 있으나 그 이름은 없고 높은 덕(德)은 있으나 그 지위(地位)를 주지 않은 것 또한 하늘이니, 하늘이 하는 바는 사람이 감히 알 바가 아니다. 그렇기는 하나 고요한 사당에 종묘와 아울러 제사를 지내니 천만년에 이르도록 본손과 지손이 창성하여 성자 신손(聖子神孫)이 계승(繼承)하는 것은 모두 빈(嬪)의 덕망과 공적으로써 내리신 것이니, 어찌 빛나지 않겠으며, 또 누가 그렇지 않다고 할 것인가? 아! 거룩하며, 아! 애통하다.”

하였다.【검교 제학(檢校提學) 김조순(金祖淳)이 지었다.】

【원전】 48 집 91 면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어문학-문학(文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