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왕실록 ▒

光海 55卷 4年 7月 11日 (癸卯) 006 / 전 동지중추부사 최립의 졸기

천하한량 2007. 3. 23. 03:08

光海 55卷 4年 7月 11日 (癸卯) 006 / 전 동지중추부사 최립의 졸기


○前同知中樞府事崔岦卒。 立之, 號東皋。 自知讀書, 力學不倦。 擢嘉靖辛酉科壯元, 諸承宣, 以院中草木花石四十種, 令各賦一律, 俄頃而成, 語多警拔。 累典僻邑, 益肆力於文章, 讀《班史》數千遍, 遂成一家。 前後除官, 皆以文藝擢授, 至拜承文院提調, 三赴京師, 呈文禮部, 諸學士擊節歎賞, 劉賛畫黃裳, 每見其文, 必薰盥乃讀。 至撰出咨奏, 則大臣以下, 點竄紛然, 殆無完句, 以是深恨。 沈潛易學, 自以爲深得本旨, 宣廟朝, 授《周易》校正之任, 不肯拜, 上疏乞便邑, 以卒其業。 遂得扞城郡, 至官專意成書, 不恤官務, 詞訟至前, 輒曰: “借汝郡成我書耳。” 麾之不顧, 書成上進, 以微與傳義乖異, 不果行。 其文始取法於班固韓愈, 以爲至工, 晩乃酷喜歐子文, 動止自隨。 家世甚微, 而爲人簡亢, 未嘗許可一世士。 雖藝苑宗匠之作, 一覽便擲, 傲然無一言, 以是多得謗議。 本京城人, 末年取妾于箕城, 遂寓居焉。 號其堂曰簡易, 卒年七十四, 子東望擢第, 無子。

【史臣曰: “我東國文獻之盛, 有自來矣。 新羅以上, 邈矣。 自崔承老以下, 彬彬多士, 李相國奎報, 最號大家, 至季葉, 牧隱李穡之洋肆, 亦擅當家。 入我朝, 文風益煽, 若卞季良李承召姜希孟金守溫金宗直成俔金馹孫, 近世盧守愼輩, 不爲不多。 雖大小闊狹之不同, 俱足以擅一代之華。 然審其體格, 不無可議, 與中朝諸大家, 猶之華夏之別也。 崔岦之文, 刻意湛思, 繩墨頗峻, 意過深而寧晦, 語過奇而寧澁, 遂成一家體度。 論其涯涘, 雖若狹迫, 而準法揆, 則實有獨至之工焉。 詩亦矯健有致, 得句法, 而用意太深, 削除華藻, 唯陳言之務去, 故語多拘强, 專乏詩人風致。 爲晋州牧使六年, 只賦一律而歸, 其繩削如此。 嘗有怪石一絶曰: “窓間懸一蝨, 三歲車輪大。 我有一拳石, 不向華山坐。” 大致如此矣。】

광해 55권 4년 7월 11일 (계묘) 007 / 전 동지중추부사 최립의 졸기


전 동지중추부사 최립(崔岦)이 죽었다.

최립의 자는 입지(立之), 호는 동고(東皐)이다. 글을 읽을 줄 알면서부터 힘써 배우며 게을리하지 않았다. 가정(嘉靖) 신유년 과거에 장원으로 뽑혔는데, 여러 승선(承宣)이 원중(院中)의 초목(草木)과 화석(花石) 40여 종으로 각각 1수의 율시(律詩)를 짓게 하자, 잠깐 사이에 완성하여 사람을 놀라게 하였는데 탈속한 시구가 많았다. 누차 궁벽한 고을을 맡으면서 더욱 문장에 힘을 쏟았고, 반고의 《한서(漢書)》를 수천 번 정독하여 드디어 일가를 이루었다. 전후 관직의 제수는 모두 문예(文藝)로 발탁되었는데, 승문원 제조에 임명되고 나서는 세 차례나 경사(京師)에 가 예부(禮部)에 글을 올림으로써 여러 학사(學士)들이 무릎을 치며 탄복하였고, 찬획(贊畫) 유황상(劉黃裳)은 그의 글을 볼 때마다 반드시 향을 피우고 손을 씻은 후에 읽었다. 자주(咨奏)를 찬출(撰出)함에 이르러서는 대신 이하가 어지러이 지우고 고치며 수정하여 자못 완전한 글귀가 없었으므로 최립은 이것을 몹시 안타깝게 여겼다. 또한 역학(易學)에 심취한 나머지 스스로 깊이 그 본지를 터득하였다고 생각하였는데, 선묘조(宣廟朝)에 《주역(周易)》 교정의 책임을 맡기자, 맡으려 하지 않고 상소하여 편한 고을을 얻어 그 일을 마칠 수 있게 해주기를 빌었다. 마침내 간성(杆城) 고을을 얻었는데, 부임하자 책을 완성하는 데 전심하고 관청 사무는 생각지 않아, 송사가 앞에 이를 때마다 그는 늘 ‘너의 고을을 빌어 온 것은 나의 책을 완성하기 위한 것이다.’고 말하면서 물리치고 돌아보지 않았다. 책이 완성되자 위로 올렸는데, 전의(傳義)와 약간 괴리되었기 때문에 결국 널리 유통되지는 못하였다. 그 문장은 처음에는 반고(班固)와 한유(韓愈)를 법받아 이를 지극한 공부로 삼았고, 만년에는 구양자(歐陽子)의 문장을 몹시 좋아하여 항상 그 글을 가지고 다녔다.

최립은 가세가 몹시 한미하였으나 위인이 교만하여 일찍이 당시의 선비를 허여한 적이 없었다. 비록 예원(藝苑) 종장(宗匠)의 저작이라도 한번 보고 내던지며 교만스럽게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음으로써 비난을 많이 받았다. 최립은 본래 경성(京城) 사람인데, 만년에 기성(箕城)에서 첩을 얻어 마침내 그 곳에서 살았다. 그 당호(堂號)는 ‘간이(簡易)’이고, 74세로 졸하였으며, 아들 최동망(崔東望)은 급제하였으나 아들이 없다.

사신은 논한다. 우리 나라 문헌(文獻)의 성대함은 그 유래가 있다. 신라의 최치원·설총 이상은 막연하나, 고려 시대에는 최승로(崔承老) 이하 많은 선비가 즐비하였으니, 상국 이규보(相國李奎報)가 가장 대가로 이름났고 말기에 이르러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성대함이 또한 대가로 자처하였다. 아조(我朝)에 들어와 문풍(文風)이 더욱 치성하여 변계량(卞季良)·이승소(李承召)·강희맹(姜希孟)·김수온(金守溫)·서거정(徐居正)·김종직(金宗直)·성현(成俔)·김일손(金馹孫) 같은 이와 근세의 노수신(盧守愼) 같은 무리가 적지 않게 있다. 비록 대소 활협(大小闊狹)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당대의 성대함으로 자처하기에는 충분하였다. 그러나 그 문체를 살펴보면 논의의 소지가 없지 않아 중국의 여러 대가와는 화이(華夷)의 차이가 있었다. 최립의 문장은 날카로운 의지와 담박한 의사로 그 격조가 자못 뛰어나, 의사가 지나치게 깊은 것이라면 차라리 감추고 말이 지나치게 기이한 것이라면 차라리 난삽하게 하여 드디어 일가의 체도를 이루었다. 그 결점을 논한다면 좀 협착한 느낌이 있으나, 법규를 준하면 실로 독특하고 진지한 공(工)이 있다. 시 또한 교건(矯健)한 운치가 있어 황산곡(黃山谷)과 진후산(陳后山)의 결구 방법을 얻었는데, 의미의 부여가 너무 깊고 수식어를 제거하면서 오직 진언(陳言)을 없애는 데만 힘쓰므로 경색한 말이 많아 시인의 풍치는 없었다. 진주 목사(晉州牧使)로 있던 6년 동안 다만 1수의 율시를 짓고 돌아갔으니, 그의 다듬질과 수정이 이와 같았다. 일찍이 괴석(怪石)을 시제로 한 절구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창문 사이에 달린 이 한 마리만한 돌 3년 만에 수레바퀴처럼 컸네 나에게 주먹만한 돌 한 개 화산을 향하여 앉지 않네 라고 하였다. 큰 운치가 이와 같았다.

【원전】 32 집 85 면

【분류】 *인물(人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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