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왕실록 ▒

世宗 16卷 4年 5月 15日 (辛未) 003 / 이발·이수를 북경에 보내어 부고를 전하고 시호를 청하게 하다

천하한량 2007. 3. 23. 02:23

世宗 16卷 4年 5月 15日 (辛未) 003 / 이발·이수를 북경에 보내어 부고를 전하고 시호를 청하게 하다


○遣刑曹判書李潑、左軍同知摠制李隨, 奉表箋如京師, 告訃請諡, 仍齎大行王行狀以行。 文武百官以白衣、烏紗帽、黑角帶拜表, 樂部陳而不作。

訃告表曰:

緣臣薄祐, 遽罹咎殃。 叩地呼天, 五內分裂。 瞻望宸極, 禮謹告終。

箋曰:

自緣薄祐, 遽失嚴顔。 攀呼莫追, 哀痛罔極。 瞻望儲禁, 式虔告終。

請諡表曰:

節惠賜諡, 惟帝王之大公; 易名顯親, 實人子之至願。 冒陳愚懇, 庸瀆聰聞。 竊念, 臣父先臣, 邈處弊封, 幸逢熙運, 恪遵侯度, 常輸執壤之誠; 特荷聖慈, 屢霑自天之澤。 何圖此日, 奄辭盛朝? 若稽成規, 宜請殊號。 伏望敦勸忠之殿, 推恤孤之仁, 誕降德音, 以旌貞魄。 臣謹當夙興夜寐, 思切效於微勞; 地久天長, 祝倍勤於多壽。

箋曰:

聖朝恤典, 惟節惠以勸忠; 人子至情, 在顯親而致孝。 俯彈悃愊, 仰瀆高明。 竊念, 先父叨守邊封, 早承眷顧。 常克勤於述職, 以效微誠; 廼不永於享年, 奄辭昭代。 率由告終之禮, 顒望易名之恩。 伏望記先父嚮慕之深, 憐孤臣哀痛之切, 導宣睿澤, 下慰貞魂。 臣謹當恪守蕃於鯷岑, 恒申祝於鶴禁。

行狀曰:

前國王姓李氏諱某, 字遺德。 母妃韓氏, 以元年丁未五月十六日辛卯生王, 聰明好學, 早有令聞。 洪武十六年癸亥年十七, 中高麗科第。 戊辰十月, 以書狀官, 從門下侍中李穡, 入賀帝正。 辛未九月, 母妃薨, 王廬於墓側, 欲從憂制。 時運旣窮, 主昏政亂, 忌康獻功高德盛, 會康獻墜馬病篤, 謀傾甚急。 王知之, 倡義決策, 洪武二十五年壬申七月, 與諸將相, 翊戴康獻, 化家爲國。 康獻旣卽位, 封王爲靖安君。 甲戌夏, 太祖高皇帝命遣親男入朝, 康獻以王通經達禮, 賢於諸子, 卽遣入朝, 敷奏詳明, 帝優禮遣還。 戊寅九月, 康獻寢疾彌留, 人心危疑, 將相、大臣皆屬望於王, 王以恭靖王嫡長, 請傳位於恭靖, 康獻許之。 恭靖自謂未有繼嗣, 且以王有德有功, 庚辰二月, 冊爲世子, 其年十一月, 以疾傳位於王。 今上皇帝踐祚之初, 王遣使表賀。 永樂元年癸未四月, 帝遣都指揮高得左、通政趙居任, 來賜誥印, 繼使翰林待詔王延齡等賜袞冕九章。 自是十五年間, 寵賚沓至, 天下聳覩。 戊子五月, 康獻卽世, 王哀痛罔極, 居廬五月, 衰服終制。 戊戌六月, 王以世子失德廢之, 請封今王爲後。 是歲八月, 又以老疾, 請傳位于今王。 己亥七月, 對馬島倭賊犯邊, 王分命諸將, 以舟師攻破其島, 得廣東浙江等衛男婦被虜在島者百四十人, 悉送京師。 八月, 帝遣太監黃儼, 齎勑賜宴。 永樂二十年壬寅四月二十二日, 王感疾, 至五月十日丙寅, 薨于正寢, 享年五十六, 在位十九年, 釋位居閑四年。 王勤儉寬仁, 畏天恤民, 崇學毖祀, 親賢樂善。 聽政之暇, 觀覽經史, 每至夜分, 儀章法度, 一遵古昔, 煥然大備。 薨逝之日, 臣民哀慕 如喪考妣云。

세종 16권 4년 5월 15일 (신미) 003 / 이발·이수를 북경에 보내어 부고를 전하고 시호를 청하게 하다


형조 판서 이발(李潑)과 좌군 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 이수(李隨)를 북경(北京)에 보내어, 표·전(表箋)을 받들고 부고(訃告)를 전하고 시호(諡號)를 청하게 하였는데, 대행왕(大行王)의 행장을 가지고 갔다. 문무 백관이 백의(白衣)와 오사모(烏紗帽)·흑각대(黑角帶)로 표·전을 배송하였는데, 악기는 진열하였으나 연주하지 아니하였다. 표에 말하기를,

“신에 대한 하늘의 도움이 박하여 갑자기 재앙을 당했으니, 땅을 치고 하늘을 부른들 오장이 찢어질 뿐이로다. 멀리 황궁을 바라보고 예(禮)에 의하여 삼가 부고하노라.”

하였다. 전에 말하기를,

“인연과 도움이 박하여 갑자기 부왕을 잃게 되었으니, 붙들고 부르짖어도 따라갈 수 없고, 애통한 마음만 한량없도다. 황태자의 궁을 바라보고 법식에 의하여 삼가 부고하노라.”

하였다. 시호를 청하는 표에 이르기를,

“은혜를 베풀고 시호를 내리는 것은 제왕은 큰 일이요, 이름을 바꾸어서 어버이를 나타내는 것은 실로 자식의 지극한 소원이다. 외람하게도 어리석은 청을 진달하여 황제의 귀를 번거롭게 하나이다. 생각건대, 신의 부왕이 멀리 이 강토에 처하여 다행히도 태평성대를 만나, 삼가 문안하는 법을 준수하고, 강토를 지키는 데 정성을 바쳤으며, 특히 황제의 사랑을 받아 여러 번 은택을 입었는데, 어찌하여 이날에 갑자기 성명한 세상을 떠날 줄이야 생각이나 하였으리. 만일 과거의 규례를 상고하면 특수한 시호를 청할 수 있나이다. 바라건대, 충성을 권장하는 집을 두텁게 하고, 상주를 구휼하는 인(仁)를 미루어서, 좋은 소식을 내려 충성한 혼(魂)을 정표해 주소서. 신은 삼가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자서, 미세한 공로나마 세울까 하오니, 천지와 같이 장구하도록 장수를 축원하나이다.”

하였다. 전에 이르기를,

“성조에서 구휼하는 법은 오직 은덕을 베풀어서 충성을 권하는 것이요, 자식의 지극한 정은 어버이를 나타내어 효도를 하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엎디어 정성스러운 마음을 자아내어, 위로 고명한 이를 번거롭게 하는 바이다. 생각건대, 부왕은 외람하게도 변방 국토를 지켜, 일찌부터 〈황제의〉 사랑을 받고, 항상 부지런하게 직무를 수행하여 작은 정성을 바쳤으나, 향년이 길지 못하여 어느덧 문명한 시대를 하직하고, 부고를 보내는 예식에 의하여 이름을 바꾸는 은덕을 바라는 것이니, 부왕의 향모하던 깊은 인정을 기념하고, 외로운 신의 애통하는 마음을 불쌍히 여겨, 밝으신 덕택을 내려 충성한 영혼을 위로하기를 바라오. 신은 삼가 제잠(鯷岑)에서 울타리가 되어 지킬 것이며, 항상 황태자의 궁중에 축복을 올리리다.”

하였다. 행장(行狀)에 이르기를,

“전 국왕의 휘(諱)아무, 성은 이씨요, 자(字)는 유덕(遺德)이라. 모비(母妃) 한씨(韓氏)가 오나라 원년 정미 5월 16일 신묘에 낳으셨다. 왕은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일찍부터 어질다는 소문이 있었고, 홍무(洪武) 16년에 나이 열 일곱 살에 고려의 과거에 합격하고, 무진 10월에 서장관(書狀官)으로 문하 시중(門下侍中) 이색(李穡)을 따라 명나라에 들어가 정조를 하례하고, 신미 9월에 모비가 돌아가자, 왕이 산소 곁에 여막을 치고 상제를 지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때 여조의 운수가 이미 다하여, 임금은 혼미하고, 정치는 어지러워졌으며, 강헌(康獻)의 공이 높고 덕이 성함을 시기하여, 강헌이 말에서 떨어져 위독한 틈을 타서 급히 강헌을 처치하려는 자가 있었다. 왕이 그 사실을 알고 의(義)를 부르짖고 큰 정책을 결정하여, 홍무 25년 임신 7월에 여러 장상과 함께 강헌을 추대하여 임금으로 삼고, 집을 화하여 나라로 만들었다. 강헌이 등극하자 왕을 정안군(靖安君)으로 봉하였다. 갑술년 여름에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가 친아들을 보내어 조공할 것을 명하였는데, 강헌은, 왕이 경서에 밝고 예에 통달하여 다른 아들보다 나으므로, 곧 금릉(金陵)에 보내어 사실을 자세히 진술하니, 명 태조가 특별히 대우하여 돌려보냈다. 무인 9월에 강헌이 병환에 걸려, 인심이 겁을 먹고 의심하고 있을 때, 여러 장수와 정승·대신들이 모두 왕에게 후계를 촉망하였으나, 왕은 공정왕(恭靖王)이 맏이니 공정에게 전위하기를 청하고, 강헌이 또한 허락했다. 공정이 생각하기를 ‘자기에게는 뒤를 이을 사람이 없고, 왕은 덕이 있고 공도 있다.’ 하고, 경진 2월에 세자로 책봉하고, 그 해 11월에 병환으로 왕에게 전위하였다. 영락제(永樂帝)가 임금이 될 때에, 왕이 사신을 보내어 표를 올려 하례하니, 영락 원년 4월에 영락제가 도지휘사(都指揮使) 고득좌(高得左)와 통정(通政) 조거임(趙居任)을 보내어 고명(誥命)과 인신(印信)을 주었고, 계속하여 한림 대조(翰林待詔) 왕연령(王延齡) 등을 보내어 곤면 구장(袞冕九章)을 보내고, 이로부터 15년 동안 황제의 사물(賜物)이 거푸 이르러, 천하에서 부럽게 보았다. 무자 5월에 강헌이 승하하자, 왕이 크게 애통하여 다섯 달 동안 여막에 거처하고, 최복(衰服)으로 상제를 마쳤고, 무술 6월에 왕이 세자 이제가 덕이 없으므로, 이를 폐하고 금왕(今王)을 봉하여 세자로 삼기를 청하고, 그 해 8월에 노병(老病)을 칭탁하고 지금 임금에게 전위하고, 기해 7월에 대마도(對馬島) 왜적이 변경을 침범하므로, 여러 장수를 나누어 보내서 해군으로 그 섬을 함락시켜, 광동(廣東)·절강(浙江) 등 위(衛)의 남녀로서 포로가 되어 섬 가운데 있는 자 1백 40명을 모두 북경(北京)으로 보내니, 8월에 명나라 임금이 태감(太監) 황엄(黃儼)을 보내어 칙서를 가지고 와서 상사(賞賜)하였다. 영락 20년 임인 4월 22일에 왕이 병환이 들게 되어, 5월 10일에 정침(正寢)에서 훙하니, 향년(享年) 56세요, 임금의 자리에 있기를 19년, 상왕(上王)으로 있기를 4년이었다. 왕은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너그럽고 인자하며, 하늘을 무서워하고 백성을 생각하며, 학문을 숭상하고 제사에 정성을 다하며, 어진 이를 친하고 착한 것을 좋아하며, 정사의 여가를 이용하여 경서와 사기를 열람하여 매양 밤중에 이르게 되고, 의장(儀章)과 법도(法度)는 일체로 옛날 제도에 따라서 빛나게 정비되었다. 돌아가던 날에 신민들이 사모하여 마치 부모를 잃어버린 것같이 여기었다.”

하였다.

【원전】 2 집 483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외교-명(明) / *역사-전사(前史) /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