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당김정희 ▒

사람에게 주다[與人]

천하한량 2007. 3. 9. 18:24
사람에게 주다[與人]

어제 병든 종씨를 살피기 위해 잠깐 강상에 나갔다가 돌아와서 보니 내려주신 편지만이 남아 있어 놀라고 두려웠으나 다만 연궤(硏几)에 상서가 솟고 주정(廚丁)이 기쁨을 알리니 훌륭한 선물을 우러러 받으며 두 손 모아 사례함에 느꺼움이 맺힙니다.
오직 오백 년의 화수(畫壽)와 천 년의 녹수(鹿壽)를 들어 돌려가며 칭송 찬양함으로써 구구한 가는 정성을 표할 따름입니다.
살피지 못한 지난 밤 추위에 체후(體候)가 다시금 어떠하신지요. 계절도 더욱 승도(勝度)가 있음과 동시에 공무(公務)에 나아가는 일도 어제와 같으신지요. 사모 간절한 마음을 놓지 못하옵니다.
석등(石燈)은 이를 어찌 격식만 가지고서 따지겠습니까. 운림(雲林) 대치(大癡) 이래로부터 적묵(積墨)의 한 법이 전하지 않은 비밀로 되어 근일의 중국 사람도 능히 이를 하는 사람은 적다 하더군요. 그것이 힘을 허비하고 붓을 허비하여 공부를 쌓고 쌓아야만 이루어지기 때문에 초초(草草)한 응수(應酬) 같은 것에는 더욱 이를 하는 사람이 없답니다.
화가의 최상승(最上乘)이요 최귀품(最貴品)은 적묵 같은 것이 없는데 일찍이 이 일을 주야운(朱野雲)에게 들었던바 지금 이 폭을 보니 바로 십분의 부합되는 곳이 있습니다.
무슨 신해(神解)와 묘오(妙悟)를 지니셨기에 육칠 년 사이에 이러한 드물게 있는 비체(祕諦)를 이루셨습니까. 손모아 찬탄하오며 더구나 또 평어(評語)가 정중함에리까. 가난뱅이가 보물을 얻은 격이어서 좌·우에 달고 아침저녁으로 쳐다보고 감상하며 다시는 구화(九華)와 구지(仇池)를 친히 못 보아서 한하지 않습니다.
일찍이 순경(荀卿)을 어떠한 사람이라 일렀는가. 순경을 쉽게 보아서는 안 되고말고요. 순경을 자상히 보지 못하고 남의 소리에 따라 말살하고 넘어뜨린다면 곧 소씨(蘇氏 소식을 말함)의 경박한 버릇에 지나지 않으외다. 공문(孔門)의 예를 말하고 악을 말한 것이 오히려 한 오라기나마 민멸되지 않은 것은 이것이 누구의 힘인가. 《대기(戴記)》의 찬철(纂綴)도 곧 순경에게서 얻어 온 것이니 이는 더욱 학을 좋아하고 생각을 깊이 하며 전전긍긍하여 말을 삼가야 할 곳이지요. 세상 일을 경력한 지 하 오래라 이 사이에 늙은 몸이 또 한 번 우견을 제시한 것인데 또 하나의 망발이외다.
특별히 물어 온 서도의 음·양획(陰陽畫)에 대하여는 본시 알기 어려운 게 아니로세. 확실히 일정한 음획 양획은 있으나 음의 가운데도 양이 있고 양의 가운데도 음이 있어 마치 제주(帝珠)가 어울려 끼고 서로 비치어 만·억의 변상(變相)이 이루 다 헤일 수 없는 것 같다오. 지금 이 양획을 음획으로 만들 수도 있으며 음획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하고 좌우로 도는 데에 있어서도 역시 또 그러한데 어떻게 한 위치만 집정(執定)하여 변통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는 교주고슬(膠柱鼓瑟)이요 각주구검(刻舟求劍)인 격이니 시험삼아 다시 묵묵히 생각해 보오.
어제 신발을 챙겨 신고 족하(足下)를 방문할 양으로 이미 매리(梅里)를 지났는데 돛단배가 동으로 날아버렸으니 서글피 바라볼 뿐 어찌하겠소.
배 돌아올 걸 손꼽아 보니 오히려 기일은 없고 비내리는 고각(高閣)에 홀로 앉았자니 더욱 마음 갖기 어렵구려.
예전 서한을 정리하다가 족하의 시찰(詩札)을 발견하여 내리 읊조리며 읽어보니 사지(詞旨)가 애련하고 간절한데 족하에게 갚지 못한 것이 오래였으니 족하가 어찌 섭섭함이 없었겠소.
그러나 나는 족하와 더불어 형(形)은 성글어도 뜻은 친하고 모(貌)는 멀어도 신(神)은 가까워서 전자에 절역(絶域)에 있을 적에도 오히려 때때로 좌우에게 꿈이 오갔는데 하물며 지금 잠시나마 이한(里閈)을 함께 함에 있어서리오.
족하는 이번에 돌아가면 밀친(密親)의 처소에 붙여 있을 텐데 나는 본시 남의 집에 가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족하가 아는 바가 아니오.
그러나 나 역시 본성이 즐거워하는 것은 있어서 일찍이 생각하기를, 황금은 얻기 쉬우나 어려운 것은 마음의 벗이요, 흰 구슬도 오히려 부서지는데 어찌 더구나 뜬 인생이랴 하였소.
그러므로 매양 좋은 놀이를 만나거나 혹은 좋은 반려를 만나면 낮놀이가 부족하여 밤까지 계속했으며 또 근심과 걱정을 하 많이 겪어서 삶과 죽음을 깨쳐 통했으니 처자나 전택(田宅) 따위는 모두가 회포에 걸릴 게 없고 오직 대한 포기 돌 한 덩이 하나의 꽃 하나의 풀이라도 진실로 마음을 붙일 만한 경지가 있다면 함께 세상을 마칠 생각을 가졌지요.
하물며 춘사(春社)의 이후와 상사(上巳)의 이전에 강촌과 수향(水鄕)이 경치가 더욱 기려(奇麗)하여 꽃은 비로소 몽우리가 터지고 새들은 다 둥지를 벗어나며 하늘에는 천청(淺靑)이 뜨고 물은 심록(深綠)을 지으며 만 그루의 배꽃 복사꽃은 붉으락희락 다투어 벌어지고 백리의 제맥(薺麥)은 청황색이 뒤섞여 깔렸는데 이따금 홀로 거닐며 짐짓 들까치를 설레게 하고 왕왕이 노래를 외치며 흰구름을 흔히 뚫고 가지요.
간혹 지구(知舊)를 만나게 되면 그윽하고 먼 데를 마음껏 구경하며 아이들은 술병을 들고 와 늘 깊은 숲에 걸어놓고 들 늙은이는 굽은 언덕에 다달아 자리를 펴며 화조(花朝)와 한식(寒食)을 즐겁게 맞기도 하며 새파란 시냇고기를 굽고 청정한 뒤안 죽순을 꺾어 나물하고 바람 살랑이는 발 앞에 술은 하얗고 눈길에 나무새는 붉은데 낮에는 사(史)를 읽고 새벽에는 경(經)을 공부하며 해가 기울도록 벗을 붙들고 밤중이면 귀신과 얘기하며 주야의 구경을 다하여 임리(淋漓)한 흥치를 실컷 푼다면 그 즐거움이 거의 죽음을 잊을 만도 하지 않겠소.
지난번 농사터로 돌아온 이래로 피복(被服)은 추루[粗陋]하나 다만 자미(滋味)에 있어서는 상기도 다 잊어버리지 않았다오. 그러나 서리 전 생선회는 남들이 그 방문을 본뜨며 비 뒤의 절건(折巾)은 세상이 전하여 법으로 삼으며 매양 마을 저자에 가면 아동들이 따라와 언어를 살피어 다투어 서로 전파하니 또한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지요.
또는 젊어서 훈고(訓詁)를 탐독하여 음영(吟詠)을 대략 알므로 폐백으로 가져온 따오기는 뜰 방에 가득하고 기 자(奇字)를 묻는 술은 마루에 꽉 찼으며 외딴 집에 대를 찾아 극담(劇談)을 많이 남기고 동녘 이웃에 꽃을 묻자 모두 소망에 넘치도록 기뻐하며 비록 쇄소응대(灑掃應對)는 가르침이 서하(西河)는 아니지만 절차마롱(切磋磨礱)에 있어서는 사람이 혹 북면(北面)을 하니 이 역시 얼마나 다행이겠는가.
종전의 불만족했던 것은 평소에 놀이를 좋아하는데도 역내(域內)의 영경(靈境)을 열에 대여섯 군데도 채 못 돌았으니 마땅히 내세(來世)를 기다려야 할 밖에요.
족하의 돌아옴을 기다려서 평소에 가지고 있던 지취(志趣)와 의향(意向)으로 자식 아우도 미처 알지 못하던 것들을 하나하나 족하에게 알리어 거의 후세로 하여금 그 본말을 알게 하고자 할 뿐일세.
곡우가 이미 닥쳐서 뜨락의 꽃이 만개해 있으니 돌아올 기약이 많이 늦어지면 바바람을 만날까 두렵소그려.
북녘에 온 뒤로는 어느 곳인들 넋이 녹고 정이 끌리지 않으리오마는 특히 좌우(左右)에게는 더욱더 간절하여 스스로 마지못하겠구려.
고가(古家)의 봉모(鳳毛)상계(像季)의 인각(麟角)을 누가 알고 위해 어여삐 여겨주겠는가. 적막한 속에 글자를 묻고 심상(尋常)한 곳에 구경을 함께 하는 것이 과히 넘치는 일이 아닌데도 역시 귀신이 아끼고 시기하는 일이 있는지요.
곧 보내온 편지를 받들어 보니 글자마다 폐부(肺腑)를 파고드는 동시에 변방의 구름과 달은 더욱 다시 처량하기만 하오.
다만 예전 병은 근자에 평복되어 장비뇌만(腸肥腦滿)의 기쁨을 누리며 부모님과 형제도 복되고 길하여 천륜(天倫)의 즐거운 일이 이해에 들어서는 더욱 대단원(大團圓)을 이루었는지요. 멀리멀리 우러러 비외다.
견한(遣閒)의 두 전서(篆書)는 근골이 굳세고 건장하여 수자(壽者)의 상(相)을 지녔으니 아무리 육기(六氣)가 밖에서 넘친다 해도 믿어 염려될 게 없소.
누척(累戚)은 지난 설에 갑자기 황달을 앓았는데 지금은 다행히 금신(金身)의 나한(羅漢)이 되기는 면했으나 여전히 성치 못하니 밤에 누워 죄를 뉘우칠 따름이며 다른 것은 어찌 족히 번거롭게 할 게 있겠습니까.
안질은 근자에 돌림병을 더하여 안개 가림이 더욱 심하므로 간신히 창 그림자를 빌려 마구 적으니 글자가 되지 않으며 또 길게 끌 수도 없네.
남으로 북으로 떠도는 신세라서 무릇 세체(世諦)의 변(邊)에는 일체 간섭이 없는데 더구나 깊은 산 속에 파묻혀 있으니 이웃 사람도 와서 묻는 사람이 없다오.
뜻밖에도 자주(慈注)의 거룩함이 이미 내가 이곳에 있을 적부터 가끔 기존(記存)이 있었는데 어안(魚雁)이 빗나가고 와전된 것은 천리 사이의 일이라 괴이하게 생각할 것이 없고말고요.
스스로 생각하면 노후(老朽)하고 퇴잔(頹殘)한 몸이 사람들의 심폐(心肺) 사이에 오가기란 너무도 부족한데 어찌하여 집사(執事)에게 얻은 것이 이와 같단 말인가요.
바로 곧 훌륭한 서찰이 계방(季方)의 소매 속으로부터 나왔는데 요즘 세상에는 있기 드문 일일 뿐더러 여덟 줄의 사이에 은근하고 곡진한 뜻이 지묵(紙墨)의 첨단에 넘치니 몇 번을 되풀이하여 읽는 동안 한서(寒犀)와 냉주(冷珠)를 화택(火宅) 속에서 얻은 거와 같구려.
더구나 늦더위와 늦장마가 윤달로 접어들어 물러가지 않는데 조용한 가운데 체력이 왕성하며 문자도 길리(吉利)하여 모든 것이 뜻과 같으며 청진(淸眞)한 계산(溪山) 역시 비치어 피어남이 있으리니 어찌 그리 융성한지요.
다만 중년의 애락에 대한 느낌에 이르러는 사공(謝公) 같은 이도 오히려 능히 융화시켜 쏟아냈거든 어찌 족히 대인의 경지에야 점오(點汚)될 리 있겠소.
복인(服人)은 원금(冤禽)의 목석(木石)이 갈수록 더욱 병만 드니 죽어야 마땅할 몸이 죽지는 않고 무슨 인연으로 지금까지 실낱 같은 목숨을 버티어 나가는지 모르겠소.
존고(尊藁)는 잠깐 동안 보는 것으로는 능히 이해될 일도 아니어니와 더구나 나의 천소(淺小)한 역량으로는 함부로 헤아릴 수 없으니 아무래도 부탁이 잘못된 게 아니겠소. 송구스럽고 부끄러워 식은 땀이 겹옷에 밸 정도이외다.
아우의 말을 듣건대 북녘 땅에 온다는 기별이 있다고 하니 매우 반가운 일이오. 눈은 어둡고 정신은 어지러워 간신히 이만 적으며 일일이 다 못하외다.
계서(鷄黍)의 근국(近局)은 이미 대호쾌활(大好夬活)을 자랑하는 뜻이 있으니 농장인(農丈人) 촌부자(村夫子)가 무엇을 닦아서 이런 복을 이루었소.
이것은 당음(棠陰)의 비호한 덕택이겠지요. 객지의 식생활도 역시 덕을 입어 혜주(惠州)의 한 그릇 밥도 이와 같이 향기롭고 기름진지요.
곧 또 진귀한 과일을 보내 주셨는데 이는 바로 내전(內典)에 나타난 빈파과(頻婆果)로서 불공(佛供)의 무상품(無上品)이며 겸하여 천연의 선품(仙品)이요 또 군자의 담담한 취미(臭味)에 비하기도 했으니 백물의 과일 중에 이와 같이 구족(具足)한 것은 있지 않은데 더더구나 함경도산(産)은 국내에 제일 좋다는 것이겠소.
택반(澤畔)의 처지로서 이런 과일을 얻었으니 이야말로 하늘이 준 구복(口福)이 아니겠는지요.
목란의 떨어지는 이슬 같은 것에 이르러는 한낱 초췌하여 무료할 뿐이니 가사 좌도(左徒)가 앎이 있다면 반드시 이소(離騷)에 나타내고말고요.
편지를 펴 놓고 내리 읽어감에 역시 향기로운 맛이 종이 사이에 배어 있음을 깨닫겠구려.
서늘한 기운이 날로 더해가는데 영감의 좌후(佐候)가 편안하고 길리(吉利)한지요. 빌고 비외다.
이 몸은 하나도 나은 것은 없으며 어리석고 무딜 따름이요. 사례하기 위하여 대략만 적으며 불선.
습기 찬 하늘에 오랜 비는 마치 미인이 한번 성내면 졸지에 풀어지기 어려움과 같구려. 눈 앞에 해가 반짝하면 비록 잠시의 기쁨은 있으나 서쪽 구름은 오히려 뭉쳐 있고 불 바퀴는 공중을 도니 골짜기에 얹힌 푸른 솔과 적각(赤脚)의 층빙(層氷)이 지금도 생각나외다. 곧 혜서를 받들어 읽고서 아울러 영감의 좌후가 청건(淸健)함을 살폈으니 늙은 가슴이 매우 흐뭇하구려.
누상(累狀)은 달팽이 껍질 속에서 더위도 마시고 습기도 마시곤 하니 가련한 신세라오. 벼루 못에 땀방울이 떨어져 간신히 이만 적으며 불선.
새해 뒤에 변방 달은 하마 현백(弦魄)이 되었소. 새로운 복을 많이 받아 모든 것이 화창하고 무성하리라 생각했는데 곧 정겨운 편지를 받아 보니 너무도 빌던 바와 같구려.
다만 동떨어진 객관에 외로이 앉았자니 정사(情思)가 쓸쓸할 것은 형세로 보아 그럴 듯도 하나 그대로 하여금 잠두(蠶頭)의 아래 제일(第一)의 집에 있어 절각당(折脚鐺) 가의 골졸화(榾椊火) 앞에서 구구소한(九九銷寒)의 모임을 마련한다면 이는 또 어떤 경지라 하겠는가.
그대의 이 걸음 이 놀이는 진실로 경홀히 여겨서는 안 될 걸세. 소년의 예기(銳氣)로서 장비뇌만(腸肥腦滿)한 때 군복 차림으로 혁련(赫連)의 칼을 비껴 차고 다행히 어진 주인에게 의탁하여 발로 옥저(沃沮)의 옛 땅을 밟고 손수 진흥왕(眞興王)의 옛 비(碑)를 모(摹)하며 산해와 관새(關塞)에 웅장한 생각을 드날리고 풍운·아녀(風雲兒女)로 기이한 색채를 쏟아낸다면 쾌히 유산(儒酸)을 갉아내 버릴 수 있으리니 족히 평생에 으뜸 가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반드시 쓸쓸하고 무료함이 보내 온 뜻과 같지는 않으리라 믿네.
나 같은 사람은 해가 갈수록 무디고 둔하며 사리에도 깜깜하여 밤이면 누워서 죄를 참회하여 고고(槁枯)하고 초췌할 뿐이니 불쌍히 여길 것조차 없네.
매양 지난 일을 생각하면 자네 선친 및 형감(逈盦 어떤 사람의 호인데 미상함) 여러 사람과 더불어 질탕(跌蕩)하게 놀면서 형감의 곡항(曲項)의 비파를 들을 적에 자네 집 법주가 매우 독하여 자네 선친이 나에게 초엽배(蕉葉杯) 세 잔을 권하는 바람에 마시고 바로 취하였네. 이 일이 하마 삼사십 년이라 비록 유리전패(流離顚沛)한 나머지가 아닐지라도 이 즐거움을 어찌 얻을 수가 있겠는가. 그때에 당해서는 곧 심상하게 넘겼었는데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니 서글프기만 하네. 우연히 그대를 인하여 말한 것이지 외인에게는 이야기할 것이 못 되네. 눈이 침침하여 창 그림자를 빌려 대략 적으며 나머지는 뒤로 미루고 불선.
잿마루의 흰 구름은 다만 스스로 좋아해야 하며 도원(桃源) 안의 일은 외인에게 이야기할 것이 못 된다는 말이 있는데 나는 이 권(卷)에 대하여 역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니 부디 제이의 눈을 향해 보이지 말고 깊이 상자 속에 비장(祕藏)하게. 이로써 장부(醬瓿)를 덮는다 해도 그것까지는 헤아리지 않겠네. 도원에 비하여 깊이 부탁했는데도 유생(兪生)이 만약 어주자(漁舟子)를 본받아 곧장 무릉관(武陵官)에게 고하여 세(稅)를 매기지 않은 땅에 세를 매기려고 하고 또 두 번째로 유자기(劉子驥)에게 발설하고 또 크게 도연명(陶淵明)에게 번져가서 심지어는 글로 기록하여 천하 만세에 전해졌으니 만약 이와 같이 한다면 그 부탁한 뜻이 어디에 있겠는가. 경망하기로는 어주자 같은 자가 없고 일 좋아하는 무리로는 유자기와 도연명 같은 이도 없어서 거의 도원으로 하여금 낭패의 지경을 만들었네.
다만 도원 사람의 오백 년 동안 숨은 발자국이 비록 하루아침에 드러나긴 했지만 그러나 나 스스로 감춘 것이 워낙 깊었던 까닭으로 지금까지 수천 백년에 다시는 어주자가 들어간 일이 없으니 이는 다행한 일이라 할 수 있네.
그러나 절대로 경망한 어주자도 본뜨지 말고 절대로 유자기나 도연명 같은 일 좋아하는 이들도 본받지 말아주기를 또 부탁하네.
대병(大病)을 앓은 나머지 천리의 먼 길을 떠난다는 것은 옆에서 보는 사람치고 누구나 염려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얕은 소견으로 헤아리면 병사(病邪)는 지금 하마 깨끗이 물러가고 희신(喜神)이 따라서 부위(扶衛)하여 관새(關塞)는 강장(康莊)과 같으려니와 바람도 순하고 해도 잘 비쳐 길에서도 탈이 없고 집에 돌아가서도 길리(吉利)할 것이니 반드시 깊이 염려를 아니해도 될 줄 아네.
다만 조섭하고 삼가기를 반드시 출발의 전후에 갑절을 더 해야만 무사히 도착하여 근심이 없게 될 것이니 이를 특별히 부탁하며 조금도 늦추지 않네.
매양 소유(小愈)의 경계는 소홀하기 쉽고 조망(躁妄)의 움직임은 막을 수 없어 심원(心猿)과 의마(意馬)가 육창(六窓) 속에 끓어오르곤 할 터인데 하마 머리 빗고 세수했다니 이것이 바로 큰 잘못일세.
이로부터는 지나간 거야 어쩔 수 없지만 오는 일에는 미칠 수 있으리니 행여 충분히 경계심을 가져 주기를 천만 번 간절히 비네. 더더구나 와서 작별하고 싶다는 것은 이야말로 소년의 망상일세. 먼젓번에 유생을 대해 입이 닳도록 얘기했으니 필시 납득하였을 줄 믿고 다시 거듭거듭 아니하니 잘 호섭(護攝)을 더하여 태평하게 길에 오르는 것이 어찌 눈앞에 한 번 만나는 기쁨에다 대겠는가. 만번 보색(寶嗇)해 주기를 바라네.
듣건대 윤 노인의 전한 것이 착오가 생겨 윤군(允君 상대방의 아들을 이름)이 자주 책교(責敎)를 받듦으로써 크게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모른다고 하니 어처구니없어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나와 머금은 밥알이 반상에 튀어 나오곤 하네. 윤 노인의 잘못 전한 것이나 좌하의 잘못 인식한 것이나 생각사록 웃음만 나오외다.
비설(鄙說)은 곧 우연한 필하(筆下)의 희언(戲言)에 불과한데 만약 이 말을 능히 담당하여 경계할 줄 아는 자가 향리의 사이에 있다면 오직 공령(功令)의 소기(小技) 곡예(曲藝)만 알고 대도(大道)를 듣지 못한 자들이 저절로 두려워서 경계할 줄 알게 된 거요. 윤군 같은 사람은 아직 이 경계(境界)에 도달하지 못하였으니 윤군으로 하여금 아무리 담당하게 하려 해도 이는 될 수 없는 일일 거요.
전(傳)에 이르기를 ‘아들 아는 것은 아비 같은 이가 없다.’고 했는데 좌하는 윤군이 어떻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말을 담당시키고자 하는 것은 왜지요? 만약 윤군이 능히 이 말을 담당한다면 이는 존문(尊門)의 큰 경사요 향리의 광영일 것이니 전에 말한 아들을 안다는 것도 역시 잘못된 것인지요. 전에 또 말하기를 ‘제 벼가 큰 것은 모른다.’ 했으니 제 벼가 큰 뒤를 기다려 다시 독려를 할 일이요 경정(逕庭)을 가져서는 안 될 것이니 보고서 또한 한 번 웃는 것이 좋을 걸세.
엎드려 헤아리면 행부(行部)가 어느덧 황주(黃州) 봉산(鳳山)의 사이에 도착되었으리니 바라보며 빌기를 실로 다른 때보다 배나 더하옵니다.
바로 곧 하서(下書)를 받들어 삼가 살폈거니와 풍설이 먼 길을 몰아치는데 대감의 기체 동정(動靖)이 노고를 겪으시는 중에도 만안(萬安)하시다니 우러러 생각하오면 왕령(王靈)이 미치는 바라 의당 온갖 신이 부호(扶護)하려니와 첫길이 이와 같으매 나갈수록 다시 길리할 줄 믿으며 이로써 손을 얹고 송축하는 바입니다.
하관(下官)은 슬하를 오래 떠난 나머지에 어버이를 뵈었으니 벅찬 가슴을 어찌 다 말하오리까.
동지사(冬至使)는 현재 자유로이 있으나 하관에게는 위로도 불급(不及)이 되고 아래로도 불급이 되어 끝까지 어색함과 동시에 너무도 몰취미한 일이니 오직 새 집사가 패수(浿水)를 건너기만 고대할 뿐이지요.
연광정 부벽루에 달빛조차 때맞추어 아름답고 좋으니 객의 회포를 쾌히 한 번 풀게 된다면 강산과 우붕(友朋)이 아울러 갖추어졌다 할 것인즉 어찌 너무도 성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관하(關河)에 해가 늦어 어느덧 설밑을 보게 되니 역사(驛使)의 매화 소식은 사람으로 하여금 발돋움하여 기다리게 하더니 곧 영감의 편지를 받들게 됐소.
겨울 날씨가 너무도 따뜻한데 정무의 여가에 체력이 편안하시다니 우러러 하례드리는 바이나 다만 연말을 당한 주묵(朱墨)의 번뇌(煩惱)가 너무도 많아서 원님 노릇 하기도 역시 괴로울 것이라 상상되는구려.
저 동대(東臺)의 옛 놀이를 회상하면 한 가닥의 연운(煙雲)이 정서를 끌어 일으키곤 하니 설니(雪泥)의 홍전(鴻篆)이 오히려 떠나간 벗님들의 막대의 흔적을 남기어 아주 마멸되지나 않았는지요.
아우는 그 사이 서울 길을 떠났다가 중도에서 가친(家親)의 환후를 듣고 길을 돌렸는데 근자에는 다행히도 제절(諸節)이 조금 편안하시며 아우의 걸음은 마땅히 세전(歲前)에 당하여 돌아갈 거외다.
보내온 교시(敎示)는 매우 좋고말고요. 이 논설이 있을진대 당연히 이 변힐(辨詰)도 있어야 할 게 아니오.
예로부터 《상서(尙書)》 금·고문(今古文)을 변별하는 것은 책을 폄으로부터 제일의 의(義)가 되므로 서슴없이 이로써 서로 논란해 왔던 것이지요.
그러나 예전 사람들의 입이 닳도록 변설한 것이 두셋의 가수(家數)에 그치지 아니하니 다시 장황하게 늘어놓을 것은 없으며 예전 사람의 이미 말해 놓은 것에서 찾아본다면 일목요연(一目瞭然)하여 지문(指紋)과 같으니 대개 이 한 관(關)을 뚫어야만 비로소 《상서》를 말할 수 있고 이 한 관을 뚫지 못했다면 또한 책을 덮어 묶어 놓고 이러니 저러니 말을 내릴 필요조차 없는 거외다.
지금 만약 만세의 심학(心學)이라 하여 순·우(舜禹)가 서로 전한 것만 들어 ‘단연(斷然)히 의심이 없다.’는 등의 말로써 하나의 큰 투어(套語)를 만들어 마구 뒤집어씌우며 ‘이는 반드시 이와 같다.’ 한다면 하나의 가공의 설(說)일 따름이며 일찍이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이 아니고 또 입과 입이 서로 전수한 것도 아니니 무슨 증거가 있겠소.
악왕(鄂王)의 막수유(莫須有)라는 한 안(案)이 불행히도 이와 가깝다 하겠으니 천하 만세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소.
이런 까닭으로 후세에 와서 학을 말하는 큰 폐단의 근원이 이에 있어 단지 고두(高頭) 강장(講章)에 나아가 되는 대로 도도평장(都都平丈)을 지껄여댈 따름이라오. 주 선생(朱先生 주자를 말함)이 고문을 의심한 것은 만세의 탁월한 식견으로서 한 가지 심(心)을 말하고 성(性)을 말한 곳에 비륜(比倫)할 뿐이 아니지요.
주 선생이 먼저 이를 의심했기 때문에 후학들이 실마리를 찾고 자취를 더듬어 차츰차츰 세상에 크게 밝혀졌으니 이는 천추(千秋)의 정론(定論)이요 천하의 공설이며 한 시대 한 사람의 말이 아니외다.
지금 단사(單詞)나 척지(隻旨)를 가지고 규방 안에서 떠들어대고자 한다면 너무도 요량 모르는 일이니 고명(高明)이 어찌 혹시라도 이런 말이 나왔겠소. 특히 미처 많이 듣지 못해서이겠지요. 어찌하면 구애(邱厓)의 문(門)을 한번 거쳐 올 수 있을는지요. 거리낌 없이 말을 마구 해서 지극히 죄송[主臣]하외다.
청산(淸山)의 《상서》에 대한 변설은 갈수록 더욱 기괴만 하니 어쩐 일이지요. 청산 같은 혜식(慧識)과 통민(通敏)으로써 이와 같이 구르고 굴러 마괴(魔怪)로 들어갈 줄은 생각조차 못했소.
이는 다름아니라 주 부자(朱夫子)의 이른바 ‘심지(心地)가 겸허하지 못하여 내 주견이 너무 편중하다.’라는 것이 그 큰 병근이 된 거외다.
심·정(心情)에 대한 사분간가(四分間架)는 일찍이 호·락(湖洛)의 서로 옳으니 그르니 하는 등의 문자 속에서 한 번 본 것으로 기억은 되나 어떤 사람의 논(論)인지는 기억되지 않으며 그때도 역시 부지중에 웃음이 터졌는데 청산은 또 어찌하여 그 뱉어낸 찌꺼기를 주워 모으려 하는지요.
이 한 조항에 대해서는 절대로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어떨는지요. 너무도 막히고 걸리는 데가 있으니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될 거외다.
더구나 날더러 하나의 문자를 만들어 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는 이거야말로 극히 손을 움직이기가 어렵소. 그 극히 어려운 곳은 그대 또한 다 통하지 못하면서 경솔히 나를 움직이다니요. 예전 사람의 설이 크게 갖추어져서 뒷사람으로서는 더욱 착수하기가 어렵고말고요. 우선 저 반고(班固)의 서 같은 것도 전혀 유흠(劉歆)의 설을 기록했으니 그를 어찌 믿을 수 있느냔 말이오. 먼저 이것부터 변명(辨明)한 연후라야 말을 내릴 수 있으리니 또 어찌 극히 어려운 것이 아니겠소.
비록 혜·강·단·손(惠江段孫) 같은 여러 사람들이 그 각핵(刻核)한 품은 한(漢)나라 조정의 노련한 형리(刑吏)와 같은데도 여기에 미치지는 않았으며 손(孫)의 서는 또 너무 너그러워서 다만 고금서를 아울러 도입만 시키고 가부를 펼쳐 내고자 않았는데 나의 역량으로 말한다면 손에게 백의 하나도 미치지 못하면서 또 어떻게 갑자기 논할 수 있겠는가. 다만 가슴속이 부글부글 끓어 버섯이 돋아나려고 할 따름이라오.
만약 중국의 이조락(李兆洛)·필이전(畢以田) 같은 사람들을 만나보면 한번 입증할 만도 한데, 이 이하 사람들은 졸지에 말을 이루기 어려우니 아마도 이 생전에는 이 한 건을 마치기는 어려울 것 같으오.
유·반(劉班 유향(劉向)·반고(班固))을 재택(裁擇)함에 있어서는 삼가지 않아서는 아니 되니 자준(子駿)이 만약 그 집에서 전해 온 경(經)의 업을 정성껏 지켰다면 오히려 믿을 만한 점이 있으나 부자(父子)의 사이에 설을 달리한 것은 이미 이것부터 괴상한 일이며 그가 위조한 가화(嘉禾) 한 편은 또 일서(逸書) 십육 편의 밖에 있는 것이지요.
대저 사공(史公)은 다만 십 수로써 말을 했고 확실히 세어서 몇 편이 된다고 하지는 않았는데 자정(子政 유향(劉向)의 자)으로부터 비로소 그 편목을 세어서 십육이 되었으며 가화는 십육 편 안에 들어 있지 않지요.
‘순전(舜典)’ ‘대우모(大禹謨)’ ‘골작(汨作)’ 운운하는 것은 또 그것이 어찌하여 말이 되었는지 알 수 없으며 십육을 또 분명히 지적하여 아무아무편이라 한 것은 자정(子政)에게서 나오기는 했지만 비록 마·정(馬鄭)의 대유(大儒)로도 이 한 조항에 있어서는 역시 그대로 따라 말한 것을 면치 못하여 곧장 유·반의 예전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턱이며 정(鄭)의 빠짐이 없다는 이렇고 저렇고 한 것 역시 다 합당하지 못한 것인데 혜·단 여러 사람들이 또 그 틀리고 다른 곳을 마구 뜯어 고쳐 인합(印合)하게 하였으니 이런 곳은 더욱 말을 삼가고 의심나는 것은 빼버려야 할 곳이외다.
반(班)씨는 경의 업에 있어 역시 허소하므로 그가 한결같이 자정을 따른 것을 어찌 그에 의거하여 믿을 만하다 하겠는가.
반씨의 허소한 곳은 또 한결같이 자정을 따르는 데 그칠 따름이 아니라 삼통설(三統說)에 있어서도 사람이 다 보고 알 수 있는 것이나 그 혹 고서를 끌어대어 증거할 수 있는 것마저도 어찌 전연히 말살할 수 있겠는가.
이랬기 때문에 눈 밝고 세심한 사람이 성실히 보아 가야 하며 범연(泛然)히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외다.
필이전(畢以田)은 저설(著說)이 있고 이조락은 혹 논급한 곳이 있는지 보지는 못했지만 금문(今文)에 대해서는 자못 밝고 진실한 사람이지요. 필씨의 설은 혹 강(江)씨의 서 안에 인재(引載)되어 있으며 추범(秋帆)과는 성이 같으나 그 문하는 아니요, 연원(淵源)은 대동원(戴東原)의 계통이외다.
함흥을 지나다가 지락정(知樂亭)에 올라 ‘산해숭심(山海崇深)’의 액(額)을 쳐다 보니 글자가 심히 기걸하고 웅장하더군요. 예전에 연지(蓮池) 박 정승이 구태여 해(海) 자(字)를 지적하여 말을 했으나 이는 전혀 예법(隷法)을 깨치지 못한 것이니 아연히 크게 웃을 수밖에 또 있겠소.
퇴촌(退村) 두 글자의 대예(大隷)는 팔힘을 다하여 써 올리는데 글씨만을 쓰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필획의 사이에 굴신(屈伸)의 의(義)를 붙였으니 행여 인가(印可)를 입는다면 공졸(工拙)은 헤아릴 것이 없겠소이다. 비록 심상한 작은 문자라도 군자의 증답(贈答)하는 것과 친구끼리의 잠경(箴警)하는 것에는 다 반드시 경계를 붙인 것이 있으며 옛사람은 원래 의미없이 지은 것을 남긴 일은 없었지요.
그렇지 않으면 곧 하나의 완물(玩物)이며 하나의 속사(俗師) 자장(字匠)에 불과하니 무엇이 귀하다 하오리까. 아무리 백아(百鵝)를 얻어왔다 해도 속서(俗書)일 따름이지요.
내 글자는 심히 누(陋)하긴 하지만 이제야 허물을 면할 것을 알았사외다. 내 글자의 모본(模本)은 박군이 이미 공정을 마쳤으므로 이에 감히 원본과 아울러 보내 드리는 바이며 또 내가 세한(歲寒)의 한 편(篇)을 써서 숙맹(夙盟)을 거듭한 것이 있는데 글자 체와 모양이 속(俗)에 들어가지는 않았으나 또 한 꾸지람을 불러 얻을까 두려우니 거의 혹 대감께서 나무라지나 않으시고 산령(山靈)도 꾸지람이 없을는지요.
전자의 개벽(疥壁)이 이미 많았으니 불두(佛頭)를 더럽혔다 해서 무엇이 방해로우리까. 샘을 품평한 한 종이는 역시 감히 대감의 균정(勻定)을 청하여 산중의 고사(故事)에 대비하겠사옵니다.
안진경(顔眞卿)의 서(書) 두 종류는 삼가 영수하였으며 안서에 대한 평교(評敎)도 역시 다 읽었사온바 과연 끝에 가서는 속서(俗書)로 들어갈 염려가 있다는 것은 진실로 보내온 말과 같구려. 매양 그 허완(虛婉)한 맛을 터득하지 못하고 먼저 능각(稜角)을 익힌다면 차츰차츰 거세고 사나운 그 한 길로 나가게 되므로 이는 실상 서가(書家)의 큰 경계인 것이니 그 간가(間架)와 결구(結搆)에 대하여는 부득불 멀리 종·색(鍾索)의 옛법을 거슬러야만 되는 곳이 있고말고요. 구·우(歐虞) 역시 동일한 규모인즉 아무래도 다른 길은 없을 듯한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구·우·저(歐虞褚) 삼가(三家)에 이르러는 한갓 폐단만 없을 뿐 아니라 이를 버리고는 아무래도 다른 길로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며 이 삼가가 곧장 종(鍾)을 뒤덮고 왕(王)을 빼앗을 만하다는 것은 아니외다.
종·왕의 유적은 현재 남아 있는 것이 없으며 근세에 유행하는 악의론(樂毅論) 황정경(黃庭經) 등의 서 같은 것은 송·원(宋元) 시대 이후부터 이미 선본(善本)이 없어지고 오직 구·우의 잔비(殘碑) 두세 본이 오히려 진석(眞石)이 보존되었으니 이것이 아니고는 참을 거스르고 옛을 구경할 길이 없음에 어찌하지요. 때문에 부득불 머리 숙이고 나아갈 수밖에 없는데 우리나라 전배(前輩)들이 너무도 이에 소홀한 것은 실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외다.
경룡종명(景龍鍾銘)은 대단히도 북파(北派)의 옛 식이 있으니 그것이 기체(奇體)라 하여 조금도 경홀히 여길 수 없을 뿐더러 애완하여 차마 손을 놓지 못하겠구려.
시의(詩意)도 또한 가을 기운이 종이에 가득함을 깨닫겠으니 이는 연을 따라 청량한 경계 속에 감현(感現)이 되어 그런 것이 아니겠소. 대범 시란 세상 사람이 이르지 않는 말에서부터 공부하기 시작하여 세상 사람이 늘상 이르는 곳에서 공부를 마쳐 힘을 아울러 설득해야만 바야흐로 둥근 바퀴를 성취하는 것이니 목란(木難)과 산호(珊瑚)는 서역(西域)의 장사치 되놈을 놀라 달아나게 할 만하지만 좀 모자라는 것은 전사(田師)와 농려(農侶)로 한자리에 대작(大嚼)의 함께 하는 그 멋이 있소. 우선 한 걸음 물러가 착안(着眼)하여 면적의 삼척지(三尺地)에 나아가야만 마침내 아름답게 될 거외다.
담계(覃溪)의 족자에 대하여는 상단(上段)은 그릇되지 않아서 바로 그 중년(中年)인 육십 이전의 필(筆)이며 하단은 틀립니다. 위조(僞造)하는 자가 해외에도 역시 일척(一隻)의 노안(老眼)을 갖춘 자가 있다는 것을 생각지 못한 것이니 깔깔대고 한 번 크게 웃을 일이 아닙니까. 이 단은 전혀 비슷도 아니하니 곧 깎아 버리어 어목(魚目)으로 하여금 진주와 섞이지 말게 하면 좋겠습니다.
간필(簡筆)을 구하신다니 나도 몰래 웃음이 절로 나외다. 서도(書道)란 본시 두 이치가 없으니 지금 우군(右軍)과 대령(大令 왕헌지(王獻之)를 말함)으로 하여금 청리(靑李) 내금(來禽) 황감(黃甘) 아군(鵝群)의 제첩(諸帖)을 만들되 따로 한 법을 만들어 난정(蘭亭) 십삼항(十三行)과 달리 되도록 하게 한다면 두 공(公)이 비단 손을 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가가대소할 거요.
나는 글씨에 있어 칭할 만한 것은 없지만 실로 감히 두 솜씨의 글씨는 쓸 수 없으니 행여 양찰해 주소서.
지난번에 우러러 아뢴 바 있었거니와 마침 원우(元祐)의 당적비(黨籍碑)을 얻었기로 이에 감히 숭감(崇鑑)을 번거롭게 하오니 진작 이미 구경하셨을지도 모를 일이오나 이것은 희귀품이므로 이와 같이 올리는 바외다.
반초(半草)의 여러 폭은 억지로 면목(面目)을 바꾸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니 이 역시 자못 심력과 안력을 허비해야만 가능한 거지요. 비록 능각(稜角)을 드러냈지만 스스로 수방(收放)의 묘가 있어야 하며 다만 맨손으로 용을 잡으려 하면 안 되는 것이외다.
기탄없이 마구 말하였으니 형의 포용하는 너그러움으로써 양해하고 봐 주시기 바라오.
편액(扁額)의 종이는 너무 딱딱하여 약호(弱毫)로는 갑자기 먹이 내려가지 않으므로 곧 받들어 써 올리지 못하니 대개 붓과 종이가 서로 맞아야만 시필(試筆)할 수 있으며 역시 억지로 못 하는 것이외다.
진사비(陳思碑)의 필의(筆意)로써 이를 만들었으니 근일에 악의론(樂毅論) 유교경(遺敎經)을 익힌 안목들로는 크게 놀랄 것 같으나 마치 북녘 땅의 파황(破荒) 못한 곳과도 같으니 또한 무엇이 방해롭겠소.
요구해 온 서체(書體)는 본시 처음부터 일정한 법칙이 없고 붓이 팔목을 따라 변하여 괴와 기가 섞여 나와서 이것이 금체(金體)인지 고체(古體)인지 자신 역시 알지 못하며 보는 사람들이 비웃건 꾸지람하건 그들에게 달린 것이니 풀이를 하여 조롱을 면할 수도 없거니와 괴(怪)하지 않으면 역시 서(書)가 될 수도 없으니 말이지요.
구서(歐書)도 역시 괴목(怪目)을 면치 못했으니 구와 더불어 함께 돌아간다면 다시 사람의 말을 두려워 할 게 있으리까.
절차고(折釵股)·탁벽흔(坼壁痕) 같은 것은 다 괴의 지극이며 안서(顔書) 역시 괴이하니 왜 옛날의 괴는 이와 같이 많기도 한지요.
다만 그 괴한 곳이 굴자(屈子)와 같이 온 세상이 다 취한 속에 홀로 깨어 있는 격이어서 깨고 취한 분별에 따라 괴한 바를 웃고 괴한 바를 짖는[呔] 것이라 마땅히 정평(定評)이 있을 거요. 아! 본시 괴를 가식하고자 한다면 참으로 괴이한 일이지요.
가르쳐 준 뜻은 삼가 살폈거니와 지금 만약 첫머리부터 벽파하여 말을 하기로 한다면 그 설이 너무도 길 뿐만 아니라 또 사연이 많아서 차츰차츰 박절한 곳으로 들어가게 되므로 감히 장황하게 말을 하지는 않을 거외다.
대저 양부모(養父母)의 복(服)은 자모(慈母)를 본뜬 것인데 자모의 복은 노(魯) 나라 소공(昭公)으로부터 비롯되었지요.
노 소공이 자모의 상에 복을 입고자 하자 유사(有司)는 말하기를 ‘옛사람의 예에 자모는 복이 없는데 지금 와서 임금이 그를 위해 복을 입는다면 이는 옛날의 예를 거역하는 것이요, 국법을 어지럽히는 것이니 만약 끝내 시행하신다면 유사가 장차 역사에 써서 뒷 세상에 남길 것입니다.’라 하므로 마침내 연관(練冠)으로써 자모의 상을 표시했던 거지요. 기(記)에 ‘자모를 상했다[喪慈母]라 칭한 것은 노 소공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가 바로 이를 이른 것이지요. 옛날 유사는 예방(禮防)에 엄했던 것이 이와 같았던 것이외다.
더구나 ‘양부모(養父母)’라 이른 것은 반드시 먼저 양부모란 어떻게 해야 이것이 양부모라는 것을 확정한 연후에야 이름을 바르게 할 수 있고 복을 제정할 수 있는데 지금 기르게 된 까닭이 어떠했다는 것을 말한 바 있지 않고 다만 양육의 은혜를 입었다는 처지에서 자·참(齊斬 자최(齊衰)와 참최)의 정을 편다는 의(義)는 그것이 선왕(先王)의 허락한 바이었는지 나는 알지 못하며 또 양부모의 복을 제정하게 된 의가 과연 이와 같은 것인지 모르외다.
무릇 ‘양부모 복을 입는다.’라 한 것은 사고(四孤 네 가지 처지에 있는 고아)에 벗어나지 않는데 사고란 곧 병란(兵亂)과 흉년을 만나 자식을 파는 사람도 있고 구독(溝瀆)에 버리는 사람도 있고 나면서 부모가 다죽고 시마(緦麻)의 친(親)도 없어 그 죽을 것은 뻔한 것과 세속 사람이 오월에 아들을 낳으면 해롭다 하여 키우지 않은 것, 무릇 이 네 종류이지요.
이 경우에 있어 끊어져 가는 목숨을 구해주고 꼭 죽을 뼈에 살을 붙여 주었다면 가위 ‘그 어짊은 천지보다 더하고 은혜는 부모를 넘어선다.’ 이를 수 있을 것이니 이는 낳아준 데서 얻지 못한 것을 길러준 데서 얻었기 때문에 양부모라 이르는 동시에 이 사고에 벗어나지 않는 것이외다.
이 사고의 정실이 없는데 이 사고의 복만 행한다면 이것이 무슨 윤리이며 무슨 의리라 하리오.
인륜의 사이란 관계가 너무도 크고 너무도 중하니 제 뜻에 따르고 제 정에 맡겨 망령되이 스스로 복을 만들어 천리(天理)를 덮어놓고 사정(私情)에 따라서는 안 되는 것이외다.
옛날에 형수를 위하여 복을 기년(期年)으로 더한 사람이 있고 백부를 위하여 복을 삼년으로 한 사람이 있었는데 다 선유(先儒)가 허여하지 아니하였으니 왜냐하면 형수와 백부는 다 당연히 길러줄 처지에 있는 것이며 사고 중에 이른바 ‘시마의 친도 없다.’는 것은 역시 시마의 친은 다 당연히 길러주는 처지에 있음을 말한 것이외다.
이 까닭에 선유는 말하기를 ‘족속(族屬)의 상에는 복을 더함이 있어서는 안 되나니 만약 형수가 양육의 은혜를 입혔다 하여 복을 더하게 된다면 이는 형을 대우한 은혜가 지극히 박한 것이 되지 않겠어요. 대저 어미 없는 몸이 형수에게 양육을 받지 못한다면 다시 양육 받을 곳이 없는 것이며 만약 족속의 친이 은혜가 있다고 해서 등(等)을 더한다면 자기를 대우함이 은혜가 없는 곳에는 복을 입지 않아도 된단 말인가?’ 하였으니 선유의 이 논이 엄정하고 명백하여 백세를 기다려도 의혹되지 않을 만한 것이외다.
요새 사람이 은양(恩養)한 것은 아무리 천지망극(天地罔極)의 은혜가 있다하더라도 그 기르게 된 까닭이 사고(四孤)에 나온 것도 아니고 또 옛사람이 형수를 위하고 백부를 위하는 정지(情地)와도 같지 않은데 비록 의로 일으켜 복을 만들고자 한들 어디에서 비례(比例)를 찾는단 말이오.
예술(禮術)은 비례가 있지 않고서는 만들 수가 없는 것이니 나의 의혹은 이 때문에 끝내 버리지 못하는 것이외다. 조(弔)에 대하여 이러이러하다는 가르침에 이르러는 자유(子游)가 미모(彌牟)의 상에 있어서도 역시 조하지 아니치는 않았으니 조하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겠소.
담제(禫祭)를 마친 그 달로 벼슬에 종사(從仕)하는 일은 우리나라 최석정(崔錫鼎)으로부터 시작된 것인데 무조리하기가 이와 같이 심한 것은 없으니 크게 웃을 일이며 절대 훈(訓)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외다.
이는 《상대기(喪大記)》에 ‘담제를 마치면 종어(從御)하고 길제(吉祭)를 마치면 복침(復寢)한다.’는 대문이 있는데, 정주(鄭注)에는 종어를 들어 부인을 어한다 했지요. 이는 맹 헌자(孟獻子)의 ‘담에는 부인(婦人)을 어(御)하기만 하고 침소(寢所)에 들어가지는 않는다.[禫比御而不入]’는 의와 서로 관통되는 까닭이니 대개 담에는 비록 종어하더라도 길제의 후에야 비로소 복침할 수 있다는 것으로서 이 대문의 절차에 있어서는 옮겨 바꾸거나 뒤섞어 놓아서는 안되는 곳이지요.
그런데 두예(杜預)는 마침내 종어를 종정(從政)으로 하였으니 공자의 일컬은 바 ‘맹 헌자는 보통 사람보다 한 등급을 넘었다.’라는 것과 더불어 바로 서로 저촉됨을 몰랐던 것이지요.
비어불입(比御不入)의 비어를 만약 종정이라 한다면 그 아래 불입이란 두 글자는 또 어떻게 풀이해야 한단 말이오. 정의(鄭義)가 너무도 분명한데 후유(後儒)의 무너뜨리고 찢어놓음이 이와 같단 말이오.
진호(陳澔)의 집설(集說)에는 마침내 종어와 복침을 들어 가첩(架疊)을 만들어 두설(杜說)을 따랐으니 뒷사람이 본원(本原)을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 탓이지요.
최와 같은 이는 명색이 예에 익숙하다 하면서 도리어 자신이 웃을 만한 지경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지 못했으니 말이오.
만약 담제의 달 안에 길제를 행했다면 혹은 가하다고 할는지 모르겠으나 이는 더욱 그렇지 않소. 사우례(士虞禮)에는 이 달에 길제를 행하였는데도 오히려 배(配)하지 못했다 했으니 그 오히려 배하지 못했다 한 것은 예가 다하지 못한 것이 있는 때문이지요. 효자의 마음이 어찌 평상시마냥 편안할 수 있겠소.

[주D-001]오백 년의 화수(畫壽) : "畫力可五百年 書力可七百年"의 글에서 나온 말임.
[주D-002]운림(雲林) 대치(大癡) : 운림은 예찬(倪瓚)의 호요, 대치는 황자구(黃子久)의 호임.
[주D-003]주야운(朱野雲) : 중국 화가인데 이름은 학년(鶴年), 호는 야운산인(野雲山人)이며 산 수(山水)를 잘하여 대척자(大滌子)의 풍(風)이 있었다. 도중(都中)의 현사대부(賢士大夫)와 더불어 문주(文酒)로 교유하여 그 화명(畫名)이 더욱 나타났으며, 사녀(士女)·인물(人物)·화훼(花卉)·죽석(竹石)이 가묘(嘉妙)하지 않은 것이 이름임.
[주D-004]구화(九華)와 구지(仇池) : 모두 중국 명산(名山)의 없었음.
[주D-005]제주(帝珠) : 천궁(天宮)의 여의주(如意珠)를 말함.
[주D-006]교주고슬(膠柱鼓瑟) : 한 가지 것에 집착하여 변통할 줄 모르는 것에 비유한 말임.《사기(史記)》염파인상여전(廉頗藺相如傳)에 "王以名使括 若膠柱而鼓瑟耳"이라는 대문에서 나온 것인데, 주(柱)는 비파의 안족(雁足)을 말함.
[주D-007]각주구검(刻舟求劍) : 사람이 미련해서 융통성이 없음을 비유한 말임. 《여씨춘추(呂氏春秋)》찰금(察今)에 "초(楚) 나라 사람이 강을 건너는 일이 있었는데, 그 사람의 칼이 주중(舟中)으로부터 물에 떨어지자 바로 그 배에 떨어진 위치를 각(刻)해 놓으며 여기가 내 칼이 떨어진 데라고 하였다. 배가 멈추자 그 새겨놓은 곳으로부터 물에 들어가 칼을 찾았는데, 배는 이미 옮겨가서 칼은 없었다."고 하였다.
[주D-008]춘사(春社) : 이월에 첫 번째 돌아오는 갑일(甲日)을 이름.
[주D-009]상사(上巳) : 사월 상순에 첫 번째 든 사일(巳日)을 가리켜 상사라 하는데, 이는 상기 (上己)를 오인(誤認)한 것임. 왜냐하면 천간(天干)과 지지(地支)가 수를 같이 하지 않기 때문임.
[주D-010]절건(折巾) : 절각건(折角巾)의 약칭임. 곽임종(郭林宗)이 일찍이 비를 만나서 건(巾) 일각(一角)이 쳐졌었는데, 당시 사람이 짐짓 건의 일각을 휘어서 임종건(林宗巾)으로 만들었음. 《後漢書 郭泰傳》
[주D-011]기 자(奇字)를 묻는 술 : 한(漢) 나라 양웅(揚雄)이 고문(古文)의 기이한 글자를 많이 알므로 때로는 호사(好事)하는 자가 있어 술을 싣고 찾아가 물었음. 그래서 지금 사람들이 남을 찾아가 수학함에 있어 흔히 이 말을 쓰고 있음. 소식의 시에 "聞道携經問奇字"의 구가 보임.
[주D-012]서하(西河) : 중국의 지명인데, 황하(黃河)의 서쪽에 있어서 이름이 된 것임. 춘추 시대 자하(子夏)가 서하에 거(居)하여 사람들을 많이 교수(敎授)하였으므로 흔히 강석(講席)에 사용됨.
[주D-013]북면(北面) : 제자가 스승에게 공경하는 예임.《한서(漢書)》우정국전(于定國傳)에 "우정국이 정위(廷尉)가 되었는데, 스승을 영접하여 《춘추》를 배우면서 몸소 경(經)을 가지고 북면하여 제자의 예를 갖추었다." 하였음.
[주D-014]고가(古家)의 봉모(鳳毛) : 송 효무제(宋孝武帝)가 사봉(謝鳳)의 아들 초종(超宗)을 차상(嗟賞)하며 자못 봉모(鳳毛)를 지녔다고 하였음.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남의 집안의 문채 있는 자손을 보면 봉모라고 예찬함. 《南史 謝超宗傳》
[주D-015]상계(像季)의 인각(麟角) : 말세에 훌륭한 인재가 났다는 뜻임. 인각은 《시경(詩經)》주남(周南) 인지지(麟之趾)의 "麟之角 振振公族"에서 인용한 것임.
[주D-016]적막한……묻고 : 주 218) 참조.
[주D-017]육기(六氣) : 음양(陰陽)·풍우(風雨)·회명(晦明)임.
[주D-018]누척(累戚) : 누(累)는 초(楚) 굴원(屈原)을 상루(湘累)라 이르므로 후세에 와서는 귀양 간 사람의 자칭(自稱)으로 쓰여지고 있음. 척은 친척의 척임.
[주D-019]금신(金身)의 나한(羅漢) : 황달병이 퇴황(褪黃)이 되었으므로 비유하여 칭한 것임.
[주D-020]집사(執事) : 상대방을 바로 부르지 않고 집사라고 말한 것은 옛사람의 남은 높이고 자 기는 겸손하는 통례임.
[주D-021]원금(冤禽)의 목석(木石) : 정위(精衛) 새가 원한을 품고 목석을 물어다가 바다를 메운 고사를 인용한 것임. 제4권 주 47) 참조.
[주D-022]계서(鷄黍)의 근국(近局) : 농촌의 풍경을 말한 것임.
[주D-023]대호쾌활(大好夬活) : 주희(朱熹) 시의 "家家有廩高如許 大好人間夬活年"의 구에서 나온 것인데, 풍년을 표시한 것임.
[주D-024]당음(棠陰) : 《시경(詩經)》소남(召南) 감망(甘棠)에서 나온 것으로 감사(監司)의 은택을 예찬한 말임.
[주D-025]혜주(惠州)의 한 그릇 밥 : 이는 아마 상대방이 적거(謫居)하여 있으므로 쓴 말인 듯함. 소식(蘇軾)이 혜주로 귀양가서 식사 뒤에는 일과삼아 연명(淵明) 시를 화작(和作)하였으므로 황정견(黃庭堅)은 "飽喫惠州飯 細和淵明詩"라는 구를 지은 바 있음.
[주D-026]내전(內典)에 나타난 빈파과(頻婆果) : 내전은 불전(佛典)을 이름이고 빈파과는 지금의 사과를 이름. 중국에서는 지금도 빈과(蘋果)라 칭함.
[주D-027]택반(澤畔) : 유배지를 말함. 《초사(楚辭)》어부사(漁父辭)에 "屈原旣放 遊於江潭 行吟澤畔"의 구가 있 음.
[주D-028]목란의 떨어지는 이슬 : 굴원의 《이소(離騷)》의 "朝飮木蘭之墜露兮 夕餐秋菊之落英"에서 나온 것임.
[주D-029]좌도(左徒) : 굴 좌도(屈左徒)로 즉 굴원을 말함.
[주D-030]현백(弦魄) : 현은 달의 상현(上弦)·하현(下弦)을 말하고, 백은 월체(月體)의 흑처(黑 處)를 말함.
[주D-031]잠두(蠶頭) : 남산(南山)을 말함.
[주D-032]절각당(折脚鐺) : 다리가 흰 냄비.
[주D-033]골졸화(榾椊火) : 장작불을 말함.
[주D-034]구구소한(九九銷寒) : 《제경경물략(帝京景物略)》에 "동짓날에 흰 매화 한 가지를 그리고 꼭지 81개를 만들어서 하루에 한 꼭지씩 물들이면 꼭지가 다 끝나는 날 구구(九九)가 나오는데, 그렇게 되면 봄이 깊어진다. 그러므로 구구소한도(九九銷寒圖)라 이른다." 하였음. 생각해 보면 동지 뒤 81일은 모두 한 절기에 속하기 때문에 이른 것임.
[주D-035]혁련(赫連) : 번호(蕃胡)의 성(姓)으로서 그 땅을 말함.
[주D-036]옥저(沃沮) : 우리나라 함경도 일대임.
[주D-037]진흥왕(眞興王)의 옛 비(碑) : 함경도 황초령(黃草嶺)에 있는 비.
[주D-038]풍운·아녀(風雲兒女) : 양(梁) 나라 종영(鍾嶸)의 시품(詩品)에 "장화(張華)의 시는 그 체(體)가 화려하여 흥탁(興託)이 기이하지 않고 문자만을 교묘하게 써서 곱게 다듬는 것만을 힘쓰니 비록 일대에 이름은 높았지만 통달한 선비들은 그 시를 일러 아녀(兒女)의 정이 많고 풍운의 정은 적은 것이 한이다." 하였음. 여기서는 시의 작(作)을 말한 것임.
[주D-039]유산(儒酸) : 글 읽은 사람은 빈한하고 검소한 자가 많아서 유산이라 이름. 소식의 시 에 "豪氣一洗儒生酸"의 구가 보임.
[주D-040]잿마루의……하며 : 양(梁) 도홍경(陶弘景)의 시에 "此中何所有 嶺上多白雲 只可自怡 悅 不堪持贈君"이라 하였음.
[주D-041]도원(桃源)……못 된다 :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此中人語云 不足爲外 人道也"라는 대문이 있음.
[주D-042]장부(醬瓿)를 덮는다 : 한(漢) 양웅(揚雄)이 태현(太玄)·법언(法言)을 저술하였는데, 유흠(劉歆)이 일찍이 보고서 양웅에게 말하기를 "공연스레 스스로 괴로움만 보는 거요. 지금 학자가 녹리(祿利)는 있지만 그러나 능히 《주역(周易)》도 밝히지 못하는데 또 현(玄)에 어쩌자는 말이오. 나는 뒷사람이 장부(醬瓿)를 덮는 데 쓸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자기의 저술이 보잘것없다고 겸언(謙言)할 경우에 항상 이 말을 씀. 《漢書 揚雄傳》
[주D-043]어주자(漁舟子) : 무릉도원(武陵桃源)을 처음 발견한 사람임. 《桃花源記》에 "晉太元中 武陵人捕魚爲業 緣溪行 忘路之遠近……林盡水源 便得一山……"이라 하였음.
[주D-044]강장(康莊) : 대로(大路)를 이름. 《이아(爾雅)》석궁(釋宮)에 "五達爲之康 六康爲之莊"이라 하였음.
[주D-045]소유(小愈)의 경계 : 고어(古語)에 "病如於小愈"가 있음.
[주D-046]육창(六窓) : 불가의 용어인데, 안(眼)·이(耳) 등의 육근(六根)을 비유한 것임.
[주D-047]경정(逕庭) : 과차(過差)와 같은 말임. 또한 곧장 가고 돌아보지 않는다는 뜻도 됨. 《장자(莊子)》소요유(逍遙遊)에 "大有逕庭 不近人情"이라는 대문이 있음.
[주D-048]관하(關河) : 먼 변방을 말함. 《사기(史記)》소진전(蘇秦傳)에 "秦四塞之國 被山帶渭 東有關河 西有 漢中"이라 하였고, 사조(謝脁)의 수왕고취곡(隨王鼓吹曲)에 "飛艎遡極浦 旌節去關河"라 하였음.
[주D-049]역사(驛使)의 매화 소식 : 송(宋) 육개(陸凱)가 범엽(范曄)과 더불어 서로 좋아했는데 강남(江南)으로 매화 한 가지를 부치고 아울러 시를 주며 이르기를 "折梅逢驛使 寄與隴頭人 江南無所有 聊贈一枝春"이라 하였음.
[주D-050]설니(雪泥)의 홍전(鴻篆) : 홍전은 홍조(鴻爪)와 같은 말로서 정처없는 행종(行踪)이 우 연히 서로 만난 것에 비유한 것임. 소식의 화자유민지회구시(和子由澠池懷舊詩)에 "人生到處知何似 應似飛鴻踏雪泥 雪上偶然留爪印 鴻飛那復計東西"라 하였음.
[주D-051]만세의 심학(心學) : 《서경(書經)》위고문(僞古文) 대우모(大禹謨)의 "人心惟危 道心惟微"를 들어 송(宋) 진덕수(眞德秀)는 만세 심학의 근원이라 하였음.
[주D-052]악왕(卾王)의 막수유(莫須有) : 송(宋) 진회(秦檜)가 악비(岳飛)를 죄로써 무함하여 죽 였는데, 한세충(韓世忠)이 진회에게 가서 그 실상을 힐문하자 진회는 "악비의 아들 운(雲)이 장헌(張憲)에게 준 편지가 있는데 비록 분명치는 않으나 그 사체가 막수유(莫須有)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한세충은 말하기를 "막수유 세 글자가 어떻게 천하 사람을 납득시킨단 말인가."라 하였음.
[주D-053]도도평장(都都平丈) : 촌 학구(學究)가 욱욱호문(郁郁乎文)을 잘못 알고 도도평장으로 읽었다는 말임.
[주D-054]구애(邱厓) : 미상임. 대고(待考).
[주D-055]죄송[主臣] : 《사기(史記)》 陳丞相世家》에 "陳謝曰主臣"이라는 대문이 있고, 그 주에 "주는 격(擊)이요, 신은 복(服)이니 그 격복(擊服)하고 황공함을 말한 것이다." 하였음.
[주D-056]청산(淸山) : 김선신(金善臣)의 호임. 자는 계량(季良). 통신사(通信使) 김죽리(金竹里)의 서기(書記)로서 일본에 수행했던 사람임.
[주D-057]혜·강·단·손(惠江段孫) : 혜동(惠棟)·강영(江永)·단옥재(段玉裁)·손성연(孫星衍)을 이름.
[주D-058]자준(子駿) : 유흠(劉歆)의 자. 유향(劉向)의 아들임.
[주D-059]삼통설(三統說) : 문질(文質)의 삼통으로 하상흑(夏尙黑)·은상백(殷尙白)·주상적(周尙赤)을 말함.
[주D-060]필이전(畢以田) : 청(淸) 나라 사람 필형(畢亨)임.
[주D-061]추범(秋帆) : 청(淸) 필완(畢沅)의 자. 호는 영암산인(靈巖山人)이며 건륭(乾隆) 진사로관(官)은 호광총독(湖廣總督)에 이르렀다. 저서(著書)하기를 좋아하여 연참(鉛槧)이 손에서 떠나지 않았으며, 경사(經史)·소학(小學)·금석(金石)·지리(地理)의 학에 두루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주D-062]백아(百鵝) : 왕희지 당시에 산음현(山陰縣)에 도사(道士)가 있어 거위 기르기를 좋아하였다. 희지는 가 보고서 그 거위를 사자고 하니 도사가 하는 말이 "나를 위하여 도경(道經)을 써주면 있는 대로 다 주겠다." 하니, 희지는 당장에 다 쓰고 거위를 다 가지고 돌아왔다. 그래서 뒤에 한유(韓愈)는 석고가(石鼓歌)를 쓰면서 "羲之俗書趁姿媚 數紙尙可博百鵝"라 하였음.
[주D-063]개벽(疥壁) : 《유양잡조(酉陽雜俎)》 어자(語資)에 "선사(禪師) 현람(玄覽)이 형주(荊州) 척기사(陟屺寺)에 머물렀는데, 장조(張璪)가 고송(古松)을 재벽(齋壁)에 그리고 부재(符載)가 찬(贊)을 짓고 위상(衛象)은 시를 지으니 역시 한때의 삼절(三絶)이었다. 현람이 여기에다 백토(白土)를 바르자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말하기를 "일없이 내 벽에 부스럼을 만들었다."고 하였음.
[주D-064]불두(佛頭)를 더럽혔다 : 불두착분(佛頭着糞)과 같은 말임. 《전등록(傳燈錄)》에 " 최 상공(崔相公)이 절에 들어가서 조작(鳥雀)이 부처머리 위에 똥을 갈기는 것을 보고 사(師)에게 묻기를 "조작도 불성(佛性)이 있는 겁니까?" 하자, 사(師)는 있다고 말했다. 최는 "왜 부처머리에다 똥을 갈기지요?" 하니, 사는 "그러기에 새매 머리 위에는 갈기지 않지 않소." 하였다. 송(宋) 구양 수(歐陽脩)가 《오대사(五代史)》를 지었는데 혹(或)이 서(序)를 지어 그 앞에 붙이려고 하자, 왕안석(王安石)이 말하기를 "佛頭上 豈可着糞"이라고 하였다.
[주D-065]북파(北派) : 서가(書家)의 남북파를 말함. 청(淸) 완원(阮元)이 서법의 유파(流派)를 논하여 남북 양파(兩派)로 갈라놓았는데, 동진(東晉)·송(宋)·제(齊)·양(梁)·진(陳)은 남파가 되고, 조(趙)·연(燕)·위(魏)·제(齊)·주(周)·수(隋)는 북파가 되었다. 남파의 서법은 소방(疏放)하고 연묘(姸妙)하여 전예(篆隷)의 유의(遺意)를 많이 변하였으며, 북파는 서법이 구근(拘謹)하고 졸루(拙陋)하여 전예 초서의 유법이 되었음. 《揅經室集》
[주D-066]청리(靑李)……아군(鵝群) : 청리와 내금은 우군(右軍)의 글씨요, 황감과 아군은 대령(大令)의 글씨임.
[주D-067]십삼항(十三行) : 왕헌지의 낙신부(洛神賦) 십삼항을 말한 것임.
[주D-068]원우(元祐)의 당적비(黨籍碑) : 원우는 송철종(宋哲宗)의 연호임. 이때 당인(黨人)은 정승 사마광(司馬光)을 으뜸으로 삼고 여공저(呂公著)·문언박(文彦博)·소식(蘇軾)·정이(程頤)·황정견(黃庭堅) 등이 우익(羽翼)이 되어 당시 문인과 학자를 결합하여 모두 1백 19명으로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반대하였다. 신종(神宗) 때에 사마광의 구당(舊黨)이 왕안석의 신당과 더불어 대립하여 당쟁이 격렬하였는데 숭녕(崇寧) 원년에 증포(曾布)·채경(蔡京) 등이 휘종(徽宗)에게 주청(奏請)하여 구당 1백 20인을 간당(奸黨)으로 삼아 단례문(端禮門)에 돌을 각(刻)하여 이듬해에 원우 당적비가 세워졌음.
[주D-069]진사비(陳思碑) : 진사왕(陳思王) 조자건(曹子建)의 비를 이름.
[주D-070]절차고(折釵股)·탁벽흔(坼壁㾗) : 모두 서법의 용어임.
[주D-071]굴자(屈子)와……격 : 굴원의 어부사(漁父辭)에 "衆人皆醉我獨醒"이라는 대문이 있음.
[주D-072]괴한……것 : 유종원(柳宗元)의 답위중립서(答韋中立書)에 "邑犬群吠 吠所怪也"라는 대문이 있음.
[주D-073]자모(慈母) : 여기는 부엄모자(父嚴母慈)의 자모와는 달라서 아비의 첩을 말한 것인데, 그가 아비의 명에 의하여 자기를 무육(撫育)하여 성취시킨 것을 이름. 《의례(儀禮)》 상복(喪服)에 "慈母如母"라는 대문이 보임.
[주D-074]연관(練冠) : 상포(喪布)가 아닌 다듬은 베로 만든 건(巾)을 이름.
[주D-075]구독(溝瀆) : 사람이 내왕하지 않는 으슥진 언덕 밑이나 도랑을 이름. 《논어(論語)》 헌문(憲問)의 "豈若匹夫匹婦之爲諒也 自經於溝瀆而莫之知也"에서 나온 것임.
[주D-076]시마(緦麻)의 친(親) : 시마의 가장 경(輕)한 복에 해당하는 친을 이름인데, 즉 사종(四從) 이내를 말한 것임.
[주D-077]자유(子游)가……않았으니 : 《예기(禮記)》 단궁(檀弓)에 "司冠惠子之喪 子游爲之麻衰牡麻絰 文子辭曰子辱與彌牟之弟游 又辱爲之服 又辱臨其喪 敢辭"라 하였음.
[주D-078]최석정(崔錫鼎) : 초명(初名) 석만(錫萬), 자는 여화(汝和), 호는 명곡(明谷)으로 영상 명길(鳴吉)의 손자임. 숙종 때 영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문정(文貞)임.
[주D-079]복침(復寢) : 정주(鄭注)에 의하면 빈소(殯所)에서 자지 않고 평일의 침소(寢所)로 돌아온다는 뜻이라고 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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