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당김정희 ▒

남규재 병철 에게 주다[與南圭齋 秉哲][1]

천하한량 2007. 3. 9. 04:01
남규재 병철 에게 주다[與南圭齋 秉哲][1]

문을 닫고 죽은 듯이 엎드려 무한정 있노라니 무릇 세체(世諦)와는 전혀 서로 어울림이 없고 다만 멀리 쏟는 마음이 일선(一線)의 광명과 더불어 끼고 도는 것 같아서, 아무리 갈고 녹이려 해도 아니 되는 곳이 있으니 이는 앞을 가로막는 산과 바다로도 능히 단절시키지 못하고, 척(尺)이 넘는 편지로도 능히 굽이굽이 다 쓰지 못할 것입니다. 혜서(惠書)를 받고 보니 진실로 막히고 쌓인 것은 실로 보내오신 깨우침과 같으나 저 정전 백수(庭前柏樹)일각(一覺)과 같이 본다면 곧 삽시(霎時)이건 영겁(永劫)이건 많고 적은 것이 없으리니 이에 비하면 지난해 객지에서 만난 즐거움도 어제의 일이라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요. 따라서 보리 익는 매우(梅雨)철에 순선(旬宣) 중의 동정이 두루 안녕하시다니 우러러 위로드리오며 묵은 병은 근자에 더욱 깨끗이 제거되었는지요? 장비뇌만(腸肥腦滿)한 때에 있어 지나가버린 무망(无妄)쯤은 당연히 절로 기쁨이 있을 것이며, 수민(壽民)의 금단(金丹)은 반드시 돌이켜 비추고 스스로 시험할 줄로 상상되옵니다.
매양 멀리 미쳐 오는 선정(善政)의 소문을 들으면 저도 몰래 고개를 들고 흔연히 축하를 마지아니하오니 육기(六氣)의 망녕된 발작이 어찌 남산의 강강(康强)에 손상을 입히오리까.
아우는 어리석고 무딤이 예전과 같으니 정위(精衛)의 목석마냥 갈수록 더욱 원통하고 괴롭기만 하온데, 오직 영감만이 깊은 연민을 가져주실 뿐입니다.
보내주신 철부채는 남다른 관심이 있지 않으면 어떻게 여기까지 미치오리까. 귀신을 이웃한 적막한 속에서 반갑게 받고 보니 느꺼움 더할 나위 없구료. 눈이 어두워 간신히 써 올리며 갖추지 못합니다.

[주D-001]세체(世諦) : 체(諦)는 이(理)와 같은 말인데 불가(佛家)에서 세간법(世間法)을 말함. 출세간법(出世間法)은 진체(眞諦)라고 함.
[주D-002]정전 백수(庭前柏樹) : 공안(公案). 어느 중이 조주(趙州)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조사(祖師)가 서쪽에서 온 뜻인가?" 하니,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라고 하였다.
[주D-003]일각(一覺) : 일오(一悟)와 같은 뜻임. 《금강삼매경(金剛三眛經)》에 "제불여래(諸佛如來)는 항상 일각으로써 제식(諸識)을 돌려 암마라(庵摩刺)로 들어가게 한다." 하였음.
[주D-004]매우(梅雨) : 4월 비를 이름. 매실(梅實)이 누렇게 익어 떨어질 무렵에는 물이 불어나고 흙이 습하여 울증(鬱蒸)한 기운이 비를 내리게 하는데 이것을 말함. 당 태종(唐太宗)의 영우시(詠雨詩)에 "梅雨灑芳田"이 있음.
[주D-005]순선(旬宣) : 관원이 한 도를 순찰하여 왕의 정사를 선포하는 데에 쓰는 말인데, 여기서는 감사(監司)의 직에 해당함. 《시경(詩經)》대아(大雅) 강한(江漢)에 "王命召虎 乃旬乃宣"이라 하였음.
[주D-006]장비뇌만(腸肥腦滿) : 기혈(氣血)이 왕성하여 기억력이 풍부함을 말함. 《북제서(北齊書)》낭야왕전(琅邪王傳)에 "곡률광(斛律光)이 말하기를 '낭야왕이 나이가 젊어서 장비뇌만하다.'고 하였다." 하였음.
[주D-007]무망(无妄) : 기대하고 바란 일이 없는 데도 저절로 얻어진 것을 말함. 《주역(周易)》무망(無妄)의 오효(五爻)에 "無妄之疾 勿藥有喜"라 하였음.
[주D-008]수민(壽民)의 금단(金丹) : 금단은 도사가 금석(金石)을 달구어서 만든 약으로서 이 약을 먹으면 신선이 된다고 함. 송(宋) 나라 사람은 《금단시결(金丹詩訣)》 2권을 남겨 여동빈 (呂洞賓)의 찬이라 불렀다. 정이(程頣)의 시에 "我有神丹君知否 用時還解壽斯民"의 구가 있음.
[주D-009]육기(六氣) : 음양풍우회명(陰陽風雨晦明).
[주D-010]남산의 강강(康强) : 남의 건강을 축하하는 뜻인데 남산은 《시경(詩經)》소아(小雅) 천보(天保)에 보이는 "如南山之壽"에서 나온 것임.
[주D-011]정위(精衛)의 목석 : 정위는 바닷가에 사는 작은 새 이름인데 형상이 까마귀와 같다. 이 새는 늘 서산(西山)의 목석을 물어다가 동해(東海)를 메운다고 함. 옛사람의 말에 "염제(炎帝)의 딸이 익사하여 정위가 되었다." 하였으므로 깊은 원한이 있는 자는 항상 정위전해(精衛塡海)를 들어 비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