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에서 사신을 보내어 환자(宦者)와 동녀(童女)를 구하였다.
이때 전의 부령(典儀副令) 이곡(李?)이 원에 있었는데, 어사대(御史臺)에 동녀를 구하는 것을 그만둘 것을 청하고 대신 소(疏)를 지어 올리기를,
“옛날 성왕(聖王)께서 천하를 다스릴 적에 피아(彼我)의 구별없이 똑같이 사랑하여, 비록 천하가 통일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풍토에 알맞고 인정(人情)에 숭상하는 것은 반드시 바꾸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사방의 먼 변방은 풍속이 각각 달라, 굳이 중국과 같게 하고자 하면 정이 순조롭지 않아서 형세로 보아 행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옛날 우리 세조 황제(世祖皇帝)께서 천하를 다스릴 때에 인심을 얻기에 힘썼으며, 더욱이 풍속이 다른 원방(遠方)에 대해서는 그 풍습에 따라 다스리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천하의 모든 백성이 기뻐하며 고무되었습니다. 고려는 본래 해외에서 따로 한 국가를 세워 국조(國朝 원을 가리킨다)가 건국하자 맨 먼저 신복(臣服)하여 왕실에 현저한 공훈을 세웠고, 세조께서는 공주를 하가(下嫁)시켰으며 조서를 내리어 장려하기를 ‘의관과 전례는 조상의 풍습을 무너뜨리지 말라.’ 하였으므로 그 풍속이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습니다. 고려의 계책으로 말하면 마땅히 현명한 조서를 공경히 받들어 선조 때 행하던 것을 그대로 이행하고 정교(政敎)를 닦고 밝히며 조회와 빙문도 제때에 행하여 국가와 함께 아름다움을 차지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내 궁중의 나인과 환관의 무리들이 중국에 근거하게 하여 은혜와 총애를 믿고 도리어 본국(本國)을 흔들더니 내지(內旨)를 사칭하고 해마다 동녀를 취하여 황제께 잘 보이고 성지(聖旨)가 있었다고 칭탁하니 어찌 국조(國朝)의 누(累)가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 국조에 있는 고려의 부녀는 후비(后妃)의 열에 있는 이도 있고, 왕후(王侯) 같은 귀인의 배필이 된 이도 있어서 공경 대신에는 고려의 외생(外甥)에서 나온 이도 많으나 이것은 그 본국의 왕족이나 문벌 있는 부호의 집에서 특별히 조지(詔旨)를 받은 것입니다. 그 중에는 자원하여 온 이도 있고 또 매빙(媒聘)의 예를 갖춘 이도 있으니 진실로 흔히 있는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利)를 좋아하는 자들이 그것을 원용하여 예(例)로 삼고 있어 무릇 오늘날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자는 모두 처첩(妻妾)을 두려 하니 동녀를 취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풍문으로 듣건대 고려 사람들은 딸을 낳으면 이를 숨기고 사신이 올 때마다 서로 돌아보고 실색하며, 드디어 군리(軍吏)들이 사방으로 나가 집집마다 뒤지며 찾는데, 이웃까지도 잡아들이고 그 친족을 구속하여 매질을 하고 괴롭혀서 찾아낸 후에야 그만둔다고 합니다. 사신들은 이것을 빙자하여 뇌물을 받고 한 여자를 데려갈 적마다 수백 집을 뒤져 부모와 일가 친척들이 모여 통곡하며, 국문(國門)에서 보내게 되면 옷자락을 붙들고 쓰러지며 비통하여 우물에 몸을 던져 죽기도 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기도 하여 그 폐를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당당한 천자의 나라로서 어찌 후궁(後宮)이 부족하여 반드시 외국에서 데려와야겠습니까? 비록 조석으로 은혜를 입더라도 오히려 부모와 고향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은 사람의 지극한 정인데, 이에 궁궐에 두고서 연기(年期)를 넘겨 헛되이 늙게 하고 때로는 내쳐서 환관에게 시집보내기도 하여 끝내 잉태 한번 못하는 자가 열에 대여섯은 되니 그 원기(怨氣)가 화기(和氣)를 상함이 또한 어떻겠습니까? 원하건대 덕음(德音)을 선포하시어 금지하는 법을 명시하면 이보다 더 다행함이 없겠습니다.”
하니, 원주가 이를 받아들였다.
전에 왕이 5년간 원에 머물면서 우울하여 병이 생겼었다. 조서를 받든 사신이 와도 많이 접견하지 않으려 하여 반드시 그것을 강요한 후에야 만났다. 이때 와서 원의 사신 실리미(失里迷)가 와서 입성(入城)하였는데, 왕이 조서를 맞이하지 않았다고 문책하고 드디어 등암사(燈巖寺)에 가서 왕을 뵈려 하니 왕이 목욕한다고 사절했다가 얼마 후에 만나보고 예로 대하지 않자 사신은 노하여 물러나와 백주(白州)에 머물렀는데, 왕은 찬성사 고겸(高謙)에게 그를 위로하도록 명하였다.
<동사강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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