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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곡이 재상들에게 글을 주어 이르기를,,,,

천하한량 2007. 2. 28. 20:48

찬성사 박충좌(朴忠佐)ㆍ김영후(金永煦)와 참리(參理) 신예(辛裔)ㆍ지신사(知申事) 이공수(李公遂)를 제조관(提調官)으로 삼았다. 그때에 비록 뭇 소인배들을 북전(北殿))에서 쫓아내기는 하였으나, 신예ㆍ강윤충ㆍ전숙몽(田淑夢) 등이 서로 잇달아 정권을 휘두르매, 불과 몇 달 동안에 그들의 인척(姻戚)과 옛친구들이 경상(卿相)의 대열에 늘어서게 되었다. 대언(代言) 정사도(鄭思度)는 비위를 맞추고 아첨하여 등용되어 오랫동안 정방(政房)에 있으매 나라 안팎에서 온갖 잡배(雜輩)가 몰려들었고, 당시 사람들이 예(裔)를 지목하여 ‘신왕(辛王)’이라 불렀다.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이곡(李?)이 원(元)에 있으면서 재상들에게 글을 주어 이르기를,
“우리 삼한(三韓)은 나라가 나라답지 못한 지가 오래여서 풍속은 무너지고 정치는 어지러워져서 백성들이 생업을 이어나가지 못하게 되었는데, 이제 국왕께서 천명(天命)을 받으니 백성들이 마치 큰 가뭄에 단비를 바라듯 바라고 있는데, 국왕께서 어리신 나이로 겸손하고 공순(恭順)하며 화묵(和?)하신지라 한 나라의 정사(政事)를 제공(諸公)에게 물으시니, 사직(社稷)의 안위(安危)와 인민의 이해(利害)와 선비와 군자의 진퇴(進退)가 모두 제공들에게서 나오고 있습니다.
대저, 군자를 기용하면 사직이 편안해지고 군자를 물리치면 인민이 병들게 되니, 이는 고금의 상리(常理)입니다. 그러므로 인재를 기용하는 것 또한 다스림의 근본이라 할 것입니다. 대개 사람을 그냥 쓰기는 쉬워도 사람됨을 알아보고 쓰기는 어려운 법인데 사악(邪惡)한지 올바른지를 묻지 않고, 존귀하고 비천함도 논하지 않고, 오로지 뇌물을 좋아하고 세력만을 의지하여, 자기에게 빌붙는 자는 비록 간사한 아첨군이라 하더라도 이를 등용하며, 자기 뜻과 다른 자는 비록 염치 있고 삼가는 자라 할지라도 물리친다면, 그 사람을 씀이 가볍다 하지 않겠습니까? 가볍게 사람을 쓰는 까닭에 정치가 날로 어지러워지고, 정치가 어지러운 까닭에 나라가 이에 따라 위태롭고 망해간다는 예는 이를 구태여 옛 역사에서 멀리 구하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바로 눈앞에 밝은 거울이 나타나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도 그러한 것을 알고, 사람을 한 번 등용하고 물리칠 때에는 반드시 그가 행하는 바와 지내온 내력을 살펴보되 오로지 재물에 더럽혀질까 세력에 뜻을 빼앗길까 근심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선한 자와 악한 자가 서로 다투고 옥석(玉石)이 서로 뒤섞이니 그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 어렵다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우리 나라의 습속이 재산이 있는 것을 능하다 여기고, 세력을 가지는 것을 지혜롭다 여기며, 심지어는 조의(朝衣)와 유관(儒冠)의 행동을 창우(倡優)의 잡희(雜?)로 여기고, 곧은 말과 바른 의론을 시골 사람들의 헛소리로 여기게까지 되었으니, 나라가 나라답지 아니한 것도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요사이 듣건대, 제공(諸公)이 이러한 방법으로 정사를 보좌하고 교화(敎化)를 갱정(更正)하는 것이 지난날과 서로 그리 멀지 아니하니, 명색은 비록 어른을 높인다 하지만 젊은 자가 실제로 권세를 주재하고, 명분은 비록 염치를 숭상한다 하지만 실제로 욕심 있는 자가 권력을 잡고 있으며, 악소배(惡少輩)들을 물리치고서도 집권자들은 자신들의 악을 고치지 못하였고, 옛 신하를 갈아치우고서도 새로 들어선 자들이 도리어 옛 신하에게 빌붙었으니, 인재를 알아보는 것을 어렵게 여기지 않고 사람을 가볍게 기용하는 것은 국왕께서 정사를 맡기신 본 뜻이 아닌 듯합니다. 원의 조정에서 이를 듣는다면 불가(不可)하다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으나, 집정(執政)하는 자가 채용(採用)하지 못하였다.

 

 

                                                                                               <동사강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