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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장(行狀) 고려국 승봉랑 총부산랑 사 비어대 증삼중공광첨의정승 판전리사사 상호군 기공 행장-이곡(李穀)-

천하한량 2007. 2. 14. 18:08

행장(行狀)
 
 
고려국 승봉랑 총부산랑 사 비어대 증삼중공광첨의정승 판전리사사 상호군 기공 행장(高麗國承奉郞摠部散郞賜緋魚袋贈三重公匡僉議政丞判典理司事上護軍奇公行狀)
 

이곡(李穀)

공의 휘는 자오(子敖)이고, 자도 자오(子敖)인데, 행주(幸州) 사람이다. 처음에는 집안의 공(功)으로 산원(散員)이 되었다. 지원(至元) 경인년에 왕을 배반한 내안(乃顔)의 일당인 합란(哈丹)이 그 무리와 더불어 동쪽으로 진번(眞番)에 달려와 우리 강토에 난입하게 되니, 반역의 기세가 매우 커져서 이르는 곳마다 죽이고 약탈하였다. 충렬왕(忠烈王)이 황제의 딸 안평 공주(安平公主)와 같이 백관(百官)을 이끌고 강화도(江華島)로 들어가 그 칼날을 피하고 주군(州郡)이 모두 험한 지형을 의지하여, 일변 싸우고 일변 지키니, 서울과 중외(中外)가 흉흉하였다. 공이 그때에 중군(中軍)의 편장(偏將)이 되었는데, 큰 깃대를 지고 앞서 달려가 자못 공이 있었다. 적이 평정되매 여러 번 승진하여 총부산랑(摠部散郞)이 되었다가 나아가서 선주(宣州)의 군수가 되자, 직무를 잘한다 칭찬하였으나 떠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스스로 “여러 대를 내려오는 양반인데 벼슬이 그리 현달하지 못하였고, 천성이 또 관후하였으며 상사에게 승진을 구하기 위해서 찾아감을 기쁘게 여기지 아니하였다. 날마다 어진 선비와 대부와 더불어 놀이를 줄기기에 힘쓰고, 집사람과 생산하는 일을 다스리지 아니하였다.”고 생각하였다. 나이 63세로 천력(天曆) 무진년에 집에서 돌아갔다. 부인은 삼한국 대부인 (三韓國大夫人) 이씨인데, 좌복야(左僕射) 벼슬을 지낸 휘 주(溱)의 손이고, 국학 좨주(國學祭酒) 휘 행검(行儉)의 딸이다. 종족이 크게 번성하고 덕이 무성하여 군자의 좋은 짝이었다. 5남 3녀를 두었는데, 지금의 황후는 그 막내이시다, 삼가 기씨(奇氏)를 고찰하여 보면, 국초로부터 무사의 재목으로 일컬어져 대대로 그 공로가 나타났었고, 인왕의 왕비 임(任)씨가 의종(毅宗)ㆍ명종(明宗)ㆍ신종(神宗) 세 왕을 낳으시니, 호(號)하기를 공예왕후(恭睿王后)라 하였는데, 공의 할머니는 실로 왕후의 아우 평장(平章)으로 계시던 유(濡)의 손자요, 판사(判事) 경준(景恂)의 따님이시다. 이로부터 임씨와 기씨 두 성이 더욱 성대해져서 귀히 되었고, 동국에서 제일가게 되었다. 시중 강정(康靖)은 총재(?宰)로서, 의종ㆍ명종ㆍ신종의 세 왕을 도왔고, 의종 말년에 무장(武將) 정중부(鄭仲夫)가 난을 일으켜 조정의 신하를 죽이고 임금 폐립(廢立)을 마음대로 하게 되자, 이때부터 권신이 뒤를 이으니 진신(搢紳)이 겁을 먹었으나, 능히 도로써 종용하여 끝까지 부지하여 옛 물건을 잃어버리지 아니한 것은 시중(侍中)의 힘이 실로 많았었다. 복야(僕射)는 강개(慷槪)한 마음으로 절의(節義)를 지켜, 나라의 어려움을 당하였다. 진양공(晉陽公) 최이(崔怡)가 마음대로 나라 일을 처단함에 공이 비록 권신과 인척이었으나, 아첨하기를 달게 여기지 아니하여, 매양 반역과 순종과 화복의 도리로 깨우쳐 주니 간악함을 나타낼 수 없었다. 최이가 이미 병들자 그 아들 항(沆)이 불초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항에게 가서 붙었으나, 복야는 홀로 이를 미워하였다. 최이가 일찍이 후계자를 사람들에게 물었는데 복야께서 즉시 어진 이를 천거하여 후계자로 하라고 대답하였다. 항이 뒤를 잇게 되자, 앞서의 혐의로 배척을 당하여 한을 품고 돌아가시니 이때 사람들이 아깝게 여기었다. 삼사(三司)께서 처음 휘(諱)는 장(璋)이였으나 뒤에 나라님의 이름을 피하여 고치었다. 처음에 장군으로서 나아가 충주 목사가 되었을 때 오로지 너그럽고 온화함을 숭상하여 엄한 형벌을 쓰지 아니 하시니, 백성들이 차마 속이지 못하였고 정사가 가장 잘 되자 임금이 불러서 상장군으로 제수하였으며 이윽고 응양군(鷹揚軍)으로 승직되었다. 나라 제도에 대체로 군정에서 상과 벌과 장교의 진퇴 문제를 모두 응양의 뜻에 따르게 되었는데, 삼사께서는 은혜와 위엄을 사심으로 하지 않으시고, 움직이기를 예법으로써 하니 군사들이 감복하게 되어 이로 말미암아 갑자기 상부(相府)에 오르게 되었다. 충렬왕은 거실(巨室 지체 높은 집)이요 국노(國老)라 하여 더욱 예우를 더하여 주시게 되니, 슬프고 영화스러움이 이에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공의 부인은 연흥군 부인(延興郡夫人) 박씨이시고, 전법판서(典法判書) 휘 휘(暉)의 따님이며, 시중 이장용(李藏用)ㆍ문진공(文眞公)의 외손이시다. 지원(至元) 원년(元年)에 천자의 조서에 이르기를, “올해에는 왕공과 군목(郡牧)이 모두 상도(上都 천자의 서울)에 모이라.” 하니, 왕께서도 역마를 타시고 조회에 들어가게 되었다. 문진공(文眞公)이 평장(平章)으로 충렬왕을 따라 천자에게 들어가 뵈오니 은총을 내려 대우하심이 보통과 다르시어 문진공의 덕업과 문장이 중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때에 우승상(右丞相) 동평충헌왕(東平忠憲王)이 매우 큰 그릇으로 여기어 소중히 여기고 대접하기를 특별한 예로써 하였다. 앉을 때에는 반드시 오른쪽을 비워 놓으니 한림(翰林) 왕학사(王學士) 여러분이 그 풍도를 공경하여 모두 교제하기를 원하였다. 무릇 아름다운 명(命)을 대답하여 드날린 것과 본국을 위하여 이익을 일으키고 해를 제거한 것은 백성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힘입고 있다. 공의 내외는 모두 이름난 집이시다. 고조(高祖)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수전(守全) 이하로부터 장군과 재상으로 출입하여 공로가 백성에게 베풀어졌으되, 그 공덕을 받지 못하고 낮은 직위에서 끝마쳤으니 하늘이 앞으로 크게 그에게 갚으려 하여 뒤에 오는 사람을 기다림이 있으심인가. 맏이 식(軾)은 공보다 앞서 죽고, 둘째 철(轍)은 첨의 정승(僉議政丞)으로서 지금 덕성 부원군(德城府院君)에 봉하여 있으시고, 셋째 원(轅)은 첨의 찬성사(僉議贊成事)로서 지금 덕양군(德陽君)에 봉하여 있으시며, 넷째 주(?)는 대광원윤(大匡元尹)이시고, 다섯째 윤(輪)은 우상시(右常侍)이다. 장녀는 상의평리(商議評理) 조희충(趙希忠)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전의령(典義令) 염돈소(廉敦紹)에게 시집갔다. 남자 손자는 모두 열하나인데, 맏손자의 이름은 천린(天麟)이고, 아명은 완택보화(完澤普化)이며, 판도총랑(版圖摠郞)으로 들어가 임금을 모셨고, 다음 천기(天驥)ㆍ유걸(有傑)ㆍ전룡(田龍)은 모두 낭장(郞將)이요, 나머지는 아직 벼슬하지 못했다. 손녀는 일곱인데, 맏이는 홍복 도감 판관(弘福都監判官) 홍보환(洪寶環)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공의 집안 대대의 공덕은 국사에 실려 있고, 공의 사업은 빛나서 사람의 눈과 귀에 알려져 있지만, 이제 그 대강을 모아 행장(行狀)으로 삼아서 채택할 것에 대비하였다. 지정(至正) □ 8월 초하룻날 삼가 행장을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