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稼亭) 휘 곡(穀) 문효공(文孝公)은
자(字)가 중보(仲父), 호(號)는 가정(稼亭)으로
한산이씨 5세조가 되시는 찬성공(贊成公) 휘 자성(自成; ?-1310)의
세 아드님 중 막내로 1298년(충렬왕24)
선조들의 고향인 충남 한산에서 태어나셨습니다.
1310년 겨우 13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님 찬성공을 여의게 되시는데
이후에 공은 고향을 떠나 반대편인 동해 바닷가의
경북 영해에 도착하셔서 그 지방의 토호인
진사(進士) 함창김씨(咸昌金氏) 김택(金澤)의 서랑이 되십니다.
함창김씨 집안은 영해에서 몇 대를 내려오며 살았다고 하고
가정공은 빙장되신 진사 김택(족보의 직함은 鄕校大賢)의 후원으로
도평의사사의 서리로 진출하십니다.
1317년(충숙왕4) 20세의 나이에 성균시,
즉 거자과(擧子科)에 합격하여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이 되시고
3년뒤인 1320년(충숙왕7) 9월 7일 23세때
문과(文科)에 당당히 급제(及第)하십니다.
그러나, 이름난 중앙귀족의 자제들이 수월한 경로를 거치며
평탄한 벼슬생활을 하고 높은 관직에 올랐던 것에 비하면,
지방 중소지주 출신의 신흥사대부셨던 가정공께선
본국에서의 환로진출이 쉽진 않았던 바,
공께서는 원(元)나라 과거를 통해 발신할 뜻을 세우십니다.
그리하여 1332년(충숙왕 복위 1; 원나라 순제 원통원년) 35세때
정동행성 향시(征東行省 鄕試)에 수석으로 합격하심을 시작으로,
이듬해인 1333년 36세에는
제과(制科) 전시(殿試)에 차석(갑과 제2인)으로
당당히 급제하시는데 이때 지은 대책(對策)을
독권관(讀卷官)이 보고 감탄하였다고 합니다.
고려자제로 상등에 급제하기는 또 처음있는 일이었습니다.
[참고: 450년전쯤에 신라시대때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당(唐)나라 과거 전시에 상등으로 급제하며
한반도의 자존심을 세워준 경사 이후로
고려에 들어와서 가정공의 상등급제가 처음이었던 만큼,
중국의 과거시험은 본토 중국인들한테도
어렵기 짝이 없던 것이었습니다.
파천황(破天荒)이란 말은 중국 과거시험과
직접 관련이 있는 말이라고 합니다.
이 벽을 뚫고 가정공뿐만이 아니라
아드님이신 목은(牧隱)도 나중에 원나라 전시에
당당히 상등으로 급제하여
부자2대가 고려와 중국 양국에서 문명을 날립니다.
가정공, 목은공 두 부자와 두터운 친교를 가졌던
순흥안씨(順興安氏)의 안축(安軸), 안보(安輔)
두 부자 역시 려말때 원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한산이씨 집안과 대비되기도 합니다만
상등급제는 아니었습니다]
즉일로 원나라 재상들의 건의에 의하여
공은 한림국사원 검열관(翰林國史院 檢閱官)에 제수되시고,
이로부터 원나라 문사들과 교유하며
원나라와 본국 고려, 양국에서의 벼슬길이 훤히 열리게 됩니다.
1334년 37세때 본국으로부터 학교를 진흥시키라는
조서(詔書)를 받고 귀국하여 가선대부 시전의부령직보문각
(嘉善大夫 試典儀副令直寶文閣)을 제수받으십니다.
이듬해인 1335년 38세때 다시 원나라에 들어가
휘정원관구(徽政院管勾), 정동행중서성 좌우사원외랑
(征東行中書省 左右司員外郎)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습니다.
이때 정동행성을 통해 고려의 내정에 깊이 간섭하고 있던
원나라의 요구중에서도 가장 견디기 어렵고 고통스럽던 것이
바로 다름아닌 공녀제도였는데,
공녀제도는 고려의 조혼풍습까지 유발시키며
그 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에 가정공은 원나라 순제에게 간하여 공녀제도를 폐지케 하였고
고려의 백성들은 가정공의 공덕을 기려
곡도와 감사제를 지내는 풍습까지 생겨났던 것입니다.
공의 17대손 휘 경재(景在) 문강공(文簡公)이 세운 신도비에
공녀폐지에 관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가정공(稼亭公)이 40세 되는 해인
1337년(충숙왕 복위 6) 여름에는,
본국에서 성균관제주 예문관제학 지제교
(成均館提? 藝文館提學 知制敎)의 벼슬을 내려
고려 최고 유학자임을 인정합니다.
이후 고려와 원나라를 오가며 많은 활약을 하시다가
49세 때인 1346년(충목왕 2)에는 밀직부사(密直副司),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 종2품),
진현관대제학( 館大提學),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의 재상직에 오르십니다.
51세인 1348년에는 광정대부 도첨의 찬성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상호군 (光政大夫 都僉議 贊成事 右文館大提學
監春秋館事 上護郡; 정2품) 벼슬에 오르시고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지십니다.
1350년(충정왕 2) 원나라로부터 봉의대부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낭중(奉議大夫 征東行中書省 左右司郎中)을 제수받았고,
이듬해인 1351년(충정왕3) 54세의 나이로 서거하십니다.
공께선 일찍이 성리학(性理學)의 대종으로
원나라에서 문명을 떨쳤고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더불어
麗末 성리학 정착에 공헌한 바 큽니다.
백이정(白?正), 우탁(禹倬), 정몽주(鄭夢周)등과 함께
경학(敬學)의 대가로 꼽히십니다.
이제현등과 함께 민지(閔漬)가 편찬한
《편년강목 (編年綱目)》을 증수하였고,
충렬·충선·충숙 三朝의 실록을 편수하기도 하였습니다.
공은 유학의 이념으로써 현실문제에 적극적으로 대결하였으나,
쇠망의 양상을 보인 고려 귀족정권에서
공의 이상은 아쉽게 실현되지는 못하였습니다.
《동문선》에 수록된 100여편에 가까운 공의 작품들 중에서도
한국 가전체 문학의 시초인 [죽부인전(竹夫人傳)]이
특히 더 유명하며,
그밖에 남기신 많은 시편들은 고려 말기 중국과의 문화교류의
구체적인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기도 합니다.
한산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의 단산서원(丹山書院)등에
배향되었습니다.
저서로는 《가정집》 4책 20권을 남기셨고,
시호는 문효(文孝)입니다.
공은 오로지 본인의 타고난 능력으로 어렵게 발신하신 뒤
지방 호족선계의 한산이씨 집안을
고려말에 신흥 명문세도가의 위치로 일으켜 세운 장본인으로
후손들이 중시조로 떠 받들고 있는 분입니다.
부인은 원나라에서 요양현군,
고려에서는 함창군부인(咸昌郡夫人)으로 봉한
진사(進士; 족보에는 鄕校大賢) 택(澤)의 딸
함창김씨(咸昌金氏)로
슬하에 외아드님 문정공(文靖公) 목은(牧隱)을 두셨는데.
이후에 목은공은 당시 원나라와 고려를 통틀어
최고의 학자요, 당대 최고 정치가로 성장하시는
고려말의 큰 별이 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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