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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稼亭) 이곡(李穀) 선생 생애와 학문(명지대 신천식 교수)

천하한량 2007. 2. 4. 02:00

                    가정의 생애와 학문
 

                                    
  1. 생애

 

  이곡은 한산인으로, 자는 중보이며, 호는 가정이다.
  처음에는 이름을 운백이라 하였으나 후에 곡으로 고쳤다.
  한산리 자성의 아들로, 충렬왕 23년(1297)에
  한산 북고촌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랐으며
  도평의사사의 녹사가 되었다가, 충숙왕 4년(1317)에
  박효수의 문하에서 거자과에 합격하고,
  동왕 7년(1320)에는 이제현-박효수의 문하에서
  최용갑-백문보-윤택-안보 등과 함께 과거에 급제하였다.
 
  이로서 그는 이제현의 문하에서 학문을 더욱 연마하게 되었고,
  이후 백문보-박충좌-이인복 등과 더불어 백이정으로부터
  성리학을 전수받았으며,
  안축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자 복주의 사록참군을 배수받았고,
  충혜왕 원년(1331)에는 예문관검열에 올랐다.
  충숙왕 복위 원년(1332)에는 정동성 향시에
  제1등으로 합격하여 원의 제과에서 제2갑으로 급제하고
  승사랑-한림국사원검열관을 배수받았다. 그는 원에서 벼슬하면서
  그곳의 학자들과 교유하는 과정에서 학문을 더욱 연마하게 되었고

  이로써 그의 학문은 크게 정연되었다.


  이때 그의 글은 문사가 엄하고 뜻이 깊어 전아하고 고고하여
  원의 학자들도 크게 탄복하였다.

  충숙왕 복위 3년(1334) 원에서 내리는 흥학의 조서를 받들고
  귀국하자 충숙왕은 전의부령을 제수하였고,
  다음해에 다시 원에 들어갔다.

  충숙왕 복위 6년(1337)에는 원에서
  정동행중서성의 좌우사원외랑을 제수하였고,
  이 해 여름에 충숙왕은 그에게
  중현대부-성균좨주-예문관제학-지제교를 내렸다.
  이때 그는 원에 상소를 올려 공녀의 부당성을 논하고
  그것을 폐지하도록 건의하여 수용되게 된다.


  이 당시 올린 상소에서
  그가 지닌 사상의 일면을 알 수 있다. [고려사]

  그의 [열전]에는 그가 올린 상소내용은,

  "서경에 이르기를 '필부가 스스로 그 뜻을 얻지 못하면
   임금도 그 공을 이루지 못한다.' 하였으니
   삼가 생각하건데 국조의 덕화가 미치는 바에 의하여
   만물이 비로서 그 뜻을 이루게 되는데
   고려 사람들은 홀로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러한 고통을 받아야 합니까?----
   근년에 고려에서는 수한이 서로 잇달아
   굶어 죽는 백성들이 심히 많으니
   이것은 원한과 탄식이 능히 화기를 상하게
   하였기 때문이 아닙니까?----"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그의 사상이
  이미 성리학의 정도를 깨우쳤음을 보여준다.
 
  충숙왕 복위 8년(1339)에는 판전교시사를 배수하였고,
  충혜왕 복위 2년(1341)에는 원에서
  봉훈대부-중서사전부를 배수하여 6년간을 머물렀다.
  충목왕이 8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그는 재상들에게
  글을 보내어,

  "우리 삼한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한 지가 또한 이미 오래되었다.

   ---
   사직의 안위와 백성들의 이병 및 사군자의 진퇴는
   모두 제공들에게서 나올 것이니
   대저 군자를 추천하면 사직이 편안할 것이요,
   군자를 물리치면 백성들이 병들 것이니
   이는 고금의 진리이다.----
   지금 본국의 풍속은 유재로 유능을 삼고
   유세로 유지를 삼으니 조의와 유관들도 배우처럼 광대놀음을 하고
   혹 직언과 정언이 있다 하더라도 이를 세간의 미친 짓이라고
   화제를 삼으니
   나라가 나라 되지 아니함이 마땅치 않으리오."

  라고 하여, 인재등용의 공정을 당부하고 있다.


  충목왕은 즉위하자 이제현에게 판삼사사를 제수하였고,
  또 영효사관사로 삼아 사부로 등용하였다.
  이때 이제현은 왕에게 폐정을 개혁하고
  유신정치를 실시하도록 건의하였다.

  이곡은 이제현의 문생으로,
  그가 보낸 위의 글에서 이제현은 많은 감명을 받았을 것이며,
  또한 정치개혁의 의지를 굳게 하였을 것이다.

  충목왕 원년(1345)에 그는 원에 있었는데 왕은 그에게
  봉익대부-판전교시사-예문관제학-동지춘추관사-상호군을
  제수하였고,
  또 얼마 후 봉익대부-밀직부사를 제수하였다.

  충목왕 2년에는 원의 조서를 반포하는 임무를 띠고
  고려에 귀국하게 된다.
  이 해 여름에 왕은 그에게 정당문학을 제수하고 한산군에 봉하였다.

 

  귀국 후 그는 이제현-안축과 더불어
  민지가 편찬한 [편년강목]을 증수하고
  또 이들과 더불어 충렬왕-충선왕-충숙왕의 삼대실록을 편찬하였다.


  그는 일찍이 안축의 문하에서 수학한 제자이기도 하였다.

  충목왕 3년(1347)에는 허백과 더불어 과거를 주관하였는데,
  이때의 과거에서 김인관-한수-이강-이무방 등의 문생을 배출하였다.


  이들 문생들은 이후 성리학을 전수하여 학문이 높았고,
  지공거 또는 교관을 역임하는 과정에서 성리학의 보급에 크게
  공헌하게 된다.


  이 해 겨울에는 원으로부터 명을 받아 돌아가니
  중서성의 감창을 제수하였고,
  충정왕이 즉위하자 그는 일찍이 공민왕을 세우고자 하였으므로
  관직에서 물러나 관동지방을로 유람하였다.


  당시 이제현도 공민왕을 지지하였는데,
  충정왕이 즉위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역옹패설]을 지었다.

  충정왕 2년(1350)에 원으로부터
  봉의대부-정동행중서성좌우사낭중을 제수받았다.
  다음해에 돌아가시니 향년 54세였다.
  문효라는 시호를 내렸다.

 


 2. 학문

 

  이곡은 충숙왕 7년에 이제현과 박효수의 문하에서 급제하였다.
  이후 그는 이들 은문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가르침을 받았다.
  또 그의 동연 백문보-안보 등과 교유하는 과정에서 학문의 깊이를
  더하였으며, 특히 그가 원의 제과에 합격한 후 그 곳에서 당시
  원의 석학이던 송본-구양현-왕사점-우문공량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은 더욱 정연되어 갔다.


  이 밖에 권한공-안축-안진-정포-최해 등과도 가깝게 지내면서
  이들로부터도 많은 학문적 영향을 받게 된다.

 

  그의 은문인 이제현은 일찍부터 그의 학문적 능력을 크게 평가하여
  후일에 대기로 성장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원의  제과에 합격하자, 이제현이;

  "내 일찍이 그대의 모골이 다른 사람과 다름을 알았노라
   눈 비비며 청운의 뜻 이루기를 바랐도다
   삼장의 풍뢰(=과거합격)가 한미한 집에서 일어나니
   황제의 은혜가 온 세상을 적시는구나
   압록강의 무성한 버드나무는 떠나는 마음을 사로 잡았지
   오금(=한림원)에 꽃이 피니 마음껏 즐기구려
   술독을 풀어 회포를 논함이 어느날에 있을까
   백두의 몸 푸는 물가에 서노매라"

   라는 시를 지어 축하하고 있는 데서 보인다.

 


  또 충목왕 2년(1346)에 그가 원의 조서를 반포하는 임무를 띠고
  고려에 귀국하였을 때 이제현은 왕에게 글을 올려
  자기를 대신하여 서연강설의 직을 그에게 제수하도록 건의하였다.
  이 때 이제현이 올린 상소문에서
  그의 학문에 대한 일면을 알 수 있다;

 

  "첨의찬성사 안축과 밀직부사 이곡은 청백하고 경개하여
   허식이 없고, 단아하고 방정하여 지키는 바가 있습니다.----
   (이들은) 학문이 동방에서 제일 높고 재명은
   상국을 진동시켰습니다. 이 두 준수한 사람을 가려
   이 어리석은 사람과 교체하시어 중석을 깔고 경의를 담론하면
   문치를 숭상하는 교화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앞에서 이제현이 그의 학문을 '동방 제일'이라고 평가한 바와 같이
  그는 당시 고려사회를 대표하는 학자로 존경을 받았다.
  그의 학문은 성리학의 유학이념을 기저로 하였으며,
  그의 역사인식도 주체적 민족의식을 그 배경으로 하였다. 
 
  그의 사상엔 성과 경이라는 유교적 이념이 전체로 나타나 있다.
  이것은 그의 문인 이양진에게 준 글에서;

  "하늘과 땅의 도는 움직이기도 하고 고요하기도 하면서
   틀리지 않는 것은 성이요, 사물의 이치가 굽기도 하고
   곧기도 하지만 잘못되지 않는 것은 경이다.
   성과 경은 명칭은 비록 다르지만 그 이치는 하나이다.
   역에 이르기를 '경이직내'라 하였으니,
   대개 직이란 것은 이의 당연한 것을 말함이요,
   경이란 것은 직을 배양하는 방법이다.
   이것을 미루어 자기의 덕을 밝히고
   또 백성 다스리는 방법에 응용한다면
   곧 어디를 가든지 하늘의 이치에 어긋남이 있겠는가."

  라고 한데서 보인다.

 

  그는 이 성과 경을 천명을 이행하는
  인간의 수행으로 보았다. 따라서 단순한 지혜라든가 힘으로는
  천명을 받들 수 없다고 파악하였다. 다음의 글을 보자;

  "천명은 지혜로 구할 수 없으며,
   백성의 마음은 힘으로 얻지 못한다. 삼대가 명을 바꿀 때는
   모두 공과 덕을 갖추었기 때문에 천명이 그에게 내렸고
   백성이 그에게 마음을 돌렸다. 그러므로 싸움을 하지 않을 것이나
   싸우기만 하면 반드시 한 번에 이를 차지하게 되었다.
   천명과 백성의 마음이 어찌 다름이 있으랴."

  위에서 그는 백성의 마음을 천명과 일치시키고 있다. 

 


  따라서 군자는 백성의 마음과 자기의 마음을 일치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이것을 인의 실천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송정참군서]에서;

  "한 집이 인을 행하면 한 나라가 인에 흥기하는 것이니
   군자는 자기 일에 극진할 따름이다. 진실로 능히 자기 일에
   극진하여 백성의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삼으면 비록 적중하지는
   못할지라도 멀지는 않을 것이다."

  라고 한 데서 보인다. 이러한 이념하에
  그는 교육을 중시하였고, 또 교육을 맡은 스승의 임무를
  막중하게 생각하였다. 교육과 스승의 임무에 대한 그의 의견은
  주목된다.

 

  "도로 말하면 성인과 현인, 그리고 우인에게도 스승이 있으며,
   위로 말하면 천자-제후-사-서인에게도 스승이 있다.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스승을 의뢰하지 않고
   그 이름을 성취시키는 사람은 없다. 스승이란 사업을 연구하여
   그의 성격을 개조시키고, 인격의 도야와 학술의 연마, 그리고
   문장의 해석도 가르쳐야 한다.


   또 스승은 어구를 해석하면 그 글의 뜻을 익히게 하며,
   학술을 전달하여 실용에 적합하게 하고,
   인격을 높여 그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니
   스승이 스승 노릇하기도 또한 힘든 일이다.----
   옛날 교육제도는 비록 천자나 제후의 아들일지라도
   반드시 학교에 보내어 단정한 사람과 올바른 학자들과 함께
   거처하게 하고, 또 먹고 자게 하여 인격을 도야함으로써
   나이 많은 사람을 높히고 인격 높은 사람을 존중히 여기는 도리를
   알았다.----
   스승이 되려면 반드시 먼저 자기 자신을 바르게 가져야 될 것이니
   자기가 바르지 못하면 남을 바르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가 제시하고 잇는 스승의 임무는
  제자들에게 문장의 해석과 어구의 해석을 가르치는 것 보다는
  이를 통하여 그 글의 뜻을 익혀 인격을 도야하고
  또 이를 생활화할 수 있는 인간상의 배양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영해부 신작소학기] 에서 제생들에게
  부탁하고 있는 말에서도 보인다.

 

  "소학의 법규는 마땅히 무슨 글을 잃어야 하며
   무슨 일을 익혀야 할 것인가? 만일 구두만 익히는 것으로
   그만이라고 한다면 쇄소-응대-진퇴의 절차를 물을 필요가 어디
   있으며, 또 글과 글씨만을 공부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한다면
   예-서-수에 대한 글을 배울 필요가 있겠는가,
   이것이 지금 행해지고 있는 향풍과 촌학의 상이니
   나는 제생들을 위하여 이를 부끄럽게 생각한다.
   제생들은 힘쓸지어다."
   그는 실천적 교육이념으로써 충과 효를 강조하였다.
   다음의 글을 보자:

   "공자는 주역을 서술하면서 이르기를,
   '천지가 있은 후에 만물이 있고, 만물이 있은 후에 남녀가 있고,
    남녀가 있은 후에 부자가 있고, 부자가 있은 후에 군신이 있고
    군과 신이 있은 후에 상하가 있으며,
    상하가 있은 후에 예절이 있다.' 고 하였다.


   따라서 군과 어버이의 관계에 있어서는 그 선후가 없을 수
   없는 것이다. 나가서는 군을 섬기고 집에 들어와서는 어버이를
   섬기는 것은 하늘로부터 받은 본연의 성을 몸으로 실천하는
   것이며, 이것을 하늘과 땅 사이에 우뚝 세우니 이는 바로
   충과 효인 것이다. 이것을 모른다면 짐승이다.
   공자는 또 이르기를,
   '어버이에게 효를 하기 때문에 충을 군에게 옮길 수 있다' 고
   하였고, 맹자는 이르기를,
   '인을 행하는 자로 어버이를 버리는 자 없고 의를 행하는 자로
    군을 뒤로 돌리는 자 없다.' 하였으니
   대체로 충과 효는 인과 의를 실천하는 것이다.
   (충과 효는)일은 두 가지이지만 그 이치는 하나인 것이다."

  그는 충과 효를 실천하는 사람을 군자라 명하였고,
  또 군자에 의한 정치가 이루어질 때 비로서 공자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정치가 실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충숙왕이
  8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즉위하자 재상들에게 글을 보내어
  "대저 군자를 추천하면 사직이 편안할 것이요,
   군자를 물리치면 백성들이 병들 것이니 이것은 고금의 진리이다"
  라고 하면서 "지금 본국의 풍속은 유재로서 유능을 삼고
  유세로서 유지를 삼으니 조의와 유관들도 배우처럼 광대놀음만
  한다"고 개탄하고 있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신하의 유형을 중신-권신-충신-간신-직신-사신의
  여섯 가지로 분류하여 중신-충신-직신이야말로 국가에 필요한
  존재임을 역설하였다. 여기서 그는 중신이란 군주가 어리고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지조를 지켜 일신의 영욕을 버리고 나라를
  구제하는 신하로 표현하여, 그 대표적인 사람으로
  이윤-주공-진평-주발을 들었고,
  충신은 나라를 위하여 공적인 것만을 생각하고 사적인 것을
  돌보지 않으며, 또 왕이 오욕을 당하면 죽음으로써 의를 지키는
  자로 표현하면서, 그 대표적인 사람으로 한의 기신과
  진의 혜소를 들었다. 또 직신이란 왕이 허물이 있을 때는 간언하고
  일에 잘못이 있을 때는 바른말로 직언하여 왕으로 하여금 불의에
  빠지지 않도록 사명을 다하는 자로 표현하면서,
  그 대표적인 자로 용봉과 비간을 들었다. 여기에서 그는 신하로서
  갖추어야 할 도리를 간접적으로 표현하였고, 아울러 군자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는 당시의 시대상에서 성리학적 정통사관을
  문화적 측면에서 이해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현재의 막강한
  원의 세력을 현재적 입장에서 인정하였고, 또 원에 대한 사대적
  의례도 긍정적인 측면에서 이해하였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주체적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이를 수용하고 있었다.
  이것은 충숙왕 복위 6년(1337)에 그가 공녀의 폐지를 원의 조정에
  주청하면서:

  "고려는 본래 해외에서 별도로 한 나라를 세웠으니
   진실로 중국 성인이 있지 않았다면 어떻게 더불어
   상통하였겠습니까. 당태종의 권위와 덕망으로도 두 번이나
   군사를 일으켜 삼한을 쳤으나 공 없이 돌아갔습니다.
   국조가 처음 일어나매 고려가 제일 먼저 신하가 되어 섬기고
   복종하여 왕실에 공적을 나타냈습니다.
   이에 세조 황제께서 공주를 고려에 시집보내고 이어서 조서를
   하사하여 장려하고 훈유하기를,
   '의관과 전법-예의가 조금도 선조의 유풍을 떨어뜨리지 않아
    지금까지도 그 풍속이 변하지 않았구나' 하였습니다.
   지금 천하에 군신이 있고 사직이 있는 것은 오직 삼한 뿐이니
   고려를 위한 계책으로는 마땅히 밝은 조서를 받들어 그들
   선조의 유풍을 행하여 정치와 교화를 밝게 하도록 하고
   조빙을 수시로 행하도록 하여 양국이 화친하여
   다 함께 편안하여야만 옳을 것입니다' 라고 하여 고려의
   자주성을 인정하도록 건의한데서 보인다.

  위의 글에서 원에 대한 사대의 예가 다분히 나타나고 있지만
  그 내용은 고려의 주관을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민족의식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주체적
  역사관은 원의 정동행성이문인 게이충에게 준 글에서도 보인다:
 
  "게군이 나에게 말하기를,
   '정사가 여러문에서 나오게 되면 백성이 명령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은 사해가 한 집안이 되었는데 어찌하여
    중국의 법이 이 나라에서는 행해지지 않는가' 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고려는 옛날 삼한의 땅으로 풍속과 언어가 중국과 같지
    아니하였고, 그들 또한 스스로 만든 의관과 전례가 있어
    하나의 법으로 되어 있었다. 이로써 진-한 이래로 그들은 능히
    이 삼한을 신하로 삼지 못하였다. 지금 성종에 있어서는
    친함으로 말하면 구생이 되고, 은혜로 말하면 부자와 같아
    민사와 형정은 (고려로 하여금) 모두 옛것을 인습하게 하고
    이치에 대하여는 관계하지 아니하였다.'"

  이러한 그의 역사인식은 바로 그의 은문인 이제현으로부터 받은
  영향이기도 하였다. 이제현은 일찍이 충숙왕 10년(1323)에
  유청신-오잠 등이 도당에 글을 올려 고려에 정동성을 설치하여
  고려를 원의 속령으로 편입시키도록 건의하자,
  그는 도당에 글을 올려,

  "사직에 주인이 없고 종묘에 제사를 끊어지게 한다는 것은 사리로
   판단하여 본다 하더라도 마땅한 처사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라고 하여 그 부당성을 극간하고, 또 중용의 글을 인용하여
  "나라를 그들의 나라로 그대로 두고 백성들은 그들 나라의
   백성으로 내버려 두십시오"라고 원을 설득하고 있는 내용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그의 사상과 역사인식은 그의 아들 색에게 그대로 전수되고 있다.
  이색은 그의 사사을 계승하여 성리학을 당시 정치사회의 이념적
  사상으로 정착시키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의 역사인식도
  이색이 지은 [파사부]에서,

  "삼한을 신하로 삼지 않았던 기자의 땅,
   그대로 두어 보존하게 하였음이 역시 득이 아니었을까"

  라는 내용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색에게 계승되고 있었다.

 

 

 

                 

  [한산이씨대동보 7, 8월호에 실렸던 다음의 글은
   명지대 신천식 교수의 저서 
   "목은가학의 성립과 학맥" 중 일부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