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건과 사찰명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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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륵사 다층석탑
신륵사 극락보전 앞에 있는 탑으로, 기단(基壇)을 2단으로 마련한 후,
그 위로 여러 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각 부분의 세부적인 조형방법은 전혀 달라서,
기단에서부터 탑신부까지 전부 한 장씩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바닥돌 윗면에는 연꽃을 돌려 새겼다.
아래층 기단의 네 모서리에 새겨진 기둥조각은
특이하게도 물결무늬를 돋을새김해 두어 눈길을 끈다.
아래층 기단의 맨윗돌을 두껍게 얹어놓아 탑의 안정감을 높이고 있으며,
위층 기단의 모서리에 꽃 모양을 새긴 기둥을 두고
각 면마다 용무늬를 깊이 판 모습은 능숙한 석공의 솜씨를 드러낸다.
탑신부의 각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얇은 한 단이며,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치켜올려져 있다.
8층 몸돌 위에 지붕돌 하나와 몸돌 일부분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층수가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8층 탑신의 아래까지만 옛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각 부분 아래에 괴임을 둔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 석탑 양식을 일부분 남기고 있으나,
세부적인 조각양식 등에서 고려 양식을 벗어나려는 여러가지 표현이 돋보인다.
하얀 대리석이 주는 질감은 탑을 한층 우아하게 보이게끔 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원각사지십층석탑(국보 제2호)과 돌의 재질, 조각양식이 비슷하다.
신륵사는 조선 성종 3년(1472)에 대규모로 새 단장을 하였는데,
이 탑도 이 때에 함께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신륵사 다층전탑
아래로 한강이 굽어보이고 강 건너 멀리 평야를 마주하고 있는
경치좋은 바위 위에 이 전탑이 세워져 있다.
전탑(塼塔)이란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이르며,
우리나라에서는 경기도와 경상북도 안동지역에서 몇 기가 남아 있다.
탑은 기단(基壇)을 2단으로 마련하고,
다시 3단의 계단을 쌓은 후 여러 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기단과 계단은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탑신부는 흙벽돌로 6층까지 쌓아 올렸는데,
그 위에 다시 몸돌 하나를 올려놓고 있어 7층같아 보이기도 하는 애매한 구조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전탑과 달리 몸돌에 비하여
지붕돌이 매우 얇아 전체가 주는 인상이 사뭇 독특하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1∼3층이 2단, 4층 이상은 1단이며, 지붕돌 위로도 1층은 4단,
2층 이상은 2단씩의 받침을 두었는데 이 또한 특이한 형태이다.
꼭대기에 머리장식이 있기는 하나 얇다.
탑의 북쪽으로는 수리할 때 세운 비가 전해오는데,
거기서 ‘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립(崇情紀元之再丙午仲秋日立)’이라는 연대가 있다.
조선 영조 2년(1726)을 뜻하지만 이 때 다시 세워진 것이므로,
지금 탑의 형태는 만들 당시의 원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벽돌에 새겨진 무늬로 보아도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처음 세워진 이후 여러 차례 수리되는 과정에서 벽돌의 반원 무늬 배열상태가 어지럽혀지고,
전체 형태가 다소 변형된 것으로 보여진다.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신륵사 뒷편에 모셔져 있는 나옹의 사리탑으로,
널찍하게 마련된 단층 기단(基壇) 위에 2단의 받침을 둔 후 종 모양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돌을 쌓아 넓게 만들고 앞쪽과 양 옆으로 계단을 두었다.
탑신은 아무런 꾸밈이 없고,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불꽃무늬를 새긴 큼직한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솟아 있다.
고려 우왕 5년(1379)에 세운 것으로,
나옹이 양주 회암사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으로 밀양에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니,
그 제자들이 절 뒤에 터를 마련하여 이 탑을 세워 두었다.
고려 후기의 석종형 부도 양식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다.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비
보제존자 나옹의 탑비이다.
보제존자 나옹은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여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하였던 승려로,
양주 회암사의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을 받아 밀양으로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이후 그를 따르던 문도들이 절안에 터를 마련하여 사리를 안치한 석종과 석비를 세워두었다.
비는 3단의 받침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부분의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겨 두었다.
대리석으로 다듬은 비몸은 양옆에 화강암 기둥을 세웠으며,
지붕돌은 목조건물의 기와지붕처럼 막새기와와 기왓골이 표현되어 있다.
비의 앞면에는 끝부분에 글을 지은 사람과 쓴 사람의 직함 및 이름에 대해 적고 있는데
글의 맨 앞에 적지 않는 것은 드문 예이다.
고려 우왕 5년(1379)에 세워진 비로,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이색이 짓고,
유명한 서예가인 한수가 글씨를 썼는데 부드러운 필치의 해서체이다.
전체적으로 고려 후기의 간략화된 형식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신륵사 대장각기비
대장각기비는 고려말 목은穆隱 이색李穡이 공민왕과 돌아가신 부모님의 명복을 빌고자
나옹의 문도와 함께 대장경을 인출하고 대장각을 지어 봉안한 사실을 기록한 비문이다.
비신碑身은 대리석으로 된 비문을 보호하기 위해 보제존자 석종비와 동일한 수법으로
둘레에 돌기둥을 세워놓고 있다. 비의 형태는 조형면에서 보제존자석종비 보다 훨씬 간략해져 있다.
이숭인李崇仁이 지은 비문은 당시 직제학 권주權鑄가 쓴 자경 2㎝의 해서체로
탑신에 깨어진 부분이 많아 판독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그리고 아쉽게도 비를 세운 연대 역시 탈락이 되어 그 시기를 정확히 밝힐 수는 없으나
대체로 보제존자석종비 제작4년 후인 홍무16년(1383년)으로 추정된다.
본래 신륵사에는 경, 률, 론 삼장을 인출하여 이를 수장하던 대장각이 극락보전 서쪽,
지금의 명부전 근처에 있었다고 전하나 아쉽게도 현재는 그 자취를 찾을 수 없고
다층전탑 위쪽으로 이 비만 남아 있다
신륵사 보제존자석종앞 석등
보제존자석종 바로 앞에 있는 석등은 석종부도를 장엄하기 위한 공양구供養具이다.
사찰에서 석등을 밝히는 이유는 중생들의 어두운 마음無明을 밝히는 의미가 있다.
화강암이 주재료로 사용되었고, 화사석은 대리석재를 사용하여 조각이 용이하도록 하였다.
단순화되고 남성적인 느낌을 주는 석종형 부도에 비해
이 석등은 섬세하고 화려한 느낌을 풍기고 있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석등은 전형적인 8각형 석등의 전통을 이으면서도
세부적으로는 다양한 변형을 모색하여 화려하고 장식적인 면이 강조된
고려말기의 대표적 작품이다.
이 밖에도 신륵사 극락보전이 있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던 공부하는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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