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목을 분(盆)에 심어 가꾸고 즐기는 일. 분재는 분에 심은 수목의 줄기·가지 등을 다듬고, 수형을 인위적으로 변형시켜 자연 경관의 축소판을 연출하는 데에 그 묘미가 있다. 따라서 단순히 식물체 본래의 모양·색조 등을 직접 관상하는 분식(盆植)과는 달리, 작은 분속에 노수거목의 모습이나 산야의 운치를 살아 있는 소재로 재조형한 자연의 축소품인 동시에 하나의 예술작품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명감에 창작성이 가해짐으로써 깊고 단아한 정취를 느낄 수 있으며, 이것이 분재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분재의 역사
분재는 중국에서 전래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당(唐)나라 중종이 장회태자 이현(李賢)을 추모하기 위하여 만든 묘의 벽화에 궁녀와 하인이 들고 있는 분화(盆花) 3점이 그려져 있고, 당나라 시성 백거이(白居易)가 읊은 《신즙신거(新葺新居)》 가운데 <분화(益花)를 난실(暖室)에 들여놓는다>는 시구가 기록되어 있어 중국에서는 이미 600년대 말에 분재를 즐겼음을 알 수 있다. 한국에도 비슷한 시기에 전래되었으리라 짐작되나, 역사적인 기록은 고려 중기 이규보(李奎報)가 지은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가분중육영(家盆中六詠)>이라는 시(詩)가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사계화(지금의 월계화)를 비롯하여 석류나무·대나무·석창포·국화·서상화 등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최자(崔滋)가 지은 문장 속에는 분죽(盆竹)과 석창포에 대해 언급하면서 석창포는 수반에 백사(白沙)를 담아 가꾸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고려 말의 문장가 전녹생(田祿生)은 <영분송(詠盆松)>이라는 시에서 산속에서 몽상을 겪은 소나무를 화분에 옮겨 가꾸어, 서재에 들여와 감상한 감흥을 노래하고 있다. 그 외에 이색(李穡)과 이종학(李種學)은 몇 편의 분매시(盆梅詩)를 남겼고, 고려 말기에 제작된 분재의 모습을 수놓은 네 폭 자수병풍 <사계분경도>도 전해져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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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 이색 선생의 시 (김대일님 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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牧隱先生의 뛰어난 文章力을 讚揚한 詩
桑村 金子粹 作
東國文章集大成 동국문장집대성
동국(東國)의 문장을 집대성하였으니
稼亭父子冠群英 가정부자관군영
가정(稼亭)의 그 부자가 모든 문인(文人)의 으뜸이었네.
山川孕秀今猶古 산천잉수금유고
산천의 품은 정기는 지금도 옛과 다름 없는데,
且問何人繼姓名 차문하인계성명
묻노니 어느 사람이 그 이름을 이을꼬.
※ 가정(稼亭)은 목은 이색(牧隱 李穡) 先生의 부친
이 詩는 상촌(桑村)선생께서 최고의 文章力을 集大成한 牧隱李穡선생의 생각하며 지은 시로
상촌 선생은 본관이 경주김씨(慶州金氏)이며 충정왕(忠定王) 3년(1351)에 태어났고
이름을 자수(子粹)라 하고 자(字)를 거광 이라 하고 호(號)를 상촌(桑村)이다.
공민왕(恭愍王) 23년 (1374)에 과거에 합격한 후 관로에 진출하였다.
20세가 되던 공민왕(恭愍王) 9년 (1370)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학문에 전념 하였으며
좌상시(左常侍)와 형조판서(刑曹判書)로 재직하였다.
(참고문헌:신천식의'桑村先生의 生涯와 思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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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 이색은 고려조 최고 최대 시인이다.
그는 다섯 차례나 과거의 시관을 맡았고 성균관의 대사성을 지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는 과도기에 살면서 우왕과 공양왕에 이르는
고려왕실의 어지러운 모습도 또한 지켜 보았으며
심지어는 조선 건국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제자와 후배들로부터 배척당하고 아들들이 매맞아 죽은 참담한 비극을 겪기까지 했다
이러한 사건들은 모두 그의 시에 들어와 크고 작은 소재가 되었으며
6000수 가까운그의 시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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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목은 이색(1328~1396)
고려말 삼은의 한 사람인 목은 이색은 학자 이곡의 아들로 태어났다.
13세가 되던 1341년, 이색은 성균관 시험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이어 15세 때에는 각촉부시에서 번번이 1등을 했다.
어느 날, 이름난 학자 이제현이 찾아왔다.
얼마 후 이색은 아버지 이곡을 따라 유학을 떠나게 된다.
그러던 중, 먼저 귀국한 아버지 이곡이 죽게 되고, 이색은 즉시 귀국했다.
그 후, 25세가 되던 해인 1353년(공민왕 2). 이 시험에서 장원한 이색은 그 해
가을 정동행성 향시에서 또 장원을 했다.
마침 고려에서 원의 태자 책봉식에 축하 사절단을 보내게 되자
이색은 사절단의 서장관으로 원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색이 묵었던 숙소에서 불이 났고 이색을 책봉 축하문을 두고 나와
결국 그 축하문은 불에 타게 된다.
이색은 궁지에 몰렸으나 이듬해 원의 회시 뿐 아니라
전시에도 급제, 황제를 배알하고 모든 일이 풀렸다.
이색이 귀국하자 정치 혁신을 위해 인재를 구하던 공민왕은 벼슬을 내렸다.
그 후 벼슬이 점차 올라 그릇된 정치를 바로잡은 우간의대부가 되었다.
이에 시기를 느낀 권신들은 이색을 탄핵하는 거짓 상소를 올렸지만
오히려 공민왕은 이색을 승진시켰다.
공민왕이 살해 되자, 이색은 벼슬을 버리고 초햐에 묻히기도 했다.
1392년, 결국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는데 태조 이성계가 그를 회유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게된다.
1396년, 이색은 68세로 숨을 거두었다.
그는 1367년, 정몽주 등과 명륜당에서 처음 성리학을 강론한 이래
문하에 권근, 김종직, 변계량을 배출해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했다.
※삼은: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를 일컫는 말.
야은 대신 도은 이숭인을 넣기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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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九容
1338(충숙왕 복위 7)~1384(우왕 10).
帆急山如走 (범급산여주) : 돗이 빠르니 산이 달리는듯
舟行岸自移 (주행안자이) : 배가 가니 언덕이 저절로 옮아가고
異鄕頻問俗 (이향빈문속) : 타향이라 자주 묻는 풍속
佳處强題詩 (가처강제시) : 절경이라 굳이 짓는시
吳楚千年地 (오초천년지) : 오나라,초나라는 천년의 땅
江湖五月時 (강호오월시) : 강과 호수는 한창 오월
莫嫌無一物 (막혐무일물) : 물건 하나 없다고 서운해 말지니
風月也相隨 (풍월야상수) : 바람과 달이 서로 따르는 것을
-<척약재(巾+易)若齋 金九容님의 시>-
金九容
1338(충숙왕 복위 7)~1384(우왕 10).
고려 말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경지(敬之), 호는 척약재( 若齋). 첨의중찬 방경(方慶)의 현손이며, 상락군(上洛君) 묘(昴)의 아들이다.
16세에 진사가 되고, 18세에 등제하여 덕령부주부를 지냈다. 1367년(공민왕 16) 성균관이 중건되고 나서 민부의랑(民部議郞) 겸 성균직강(成均直講)이 되어, 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성리학을 일으키고 척불숭유(斥佛崇儒)에 앞장섰다. 1375년(우왕 1) 삼사좌윤(三司左尹)으로 있을 때, 정도전 등과 함께 북원(北元)에서 온 사신의 영접을 반대하여 죽주(竹州)로 귀양갔다. 1381년 풀려나와 좌사의대부, 이듬해 대사성·판전교시사가 되었다. 우왕대에 북원과 수교를 재개함에 따라 대명관계는 악화되었다. 이후 명은 고려에 사신을 파견하지 않고 요동을 차단하여 고려 사신을 구금하는 사건이 여러 번 있었다. 1384년 행례사(行禮使)로 요동 통과를 시도하다 체포되어 난징[南京]으로 압송되었다. 명 태조의 명으로 대리위(大理衛)에 유배되던 도중 영녕현(永寧縣)에서 병으로 죽었다. 시가와 문장에 뛰어났다. 이색(李穡)은 그의 시를 가리켜 "붓을 대면 구름이나 연기처럼 뭉게뭉게 시가 피어나온다"고 했다. 〈동문선〉에 그의 시 8편이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 특히 무창시(武昌詩)가 유명하다. 저서에 〈척약재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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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泡弄月한포롱월
李穡이색
日落沙逾白 雲移水更淸
해가 떨어져 모래 더욱 희고 구름 옮기니 물 다시 맑구나.
高人弄明月 只欠柴鸞笙 높은 사람 밝은 달과 노 나니.
오직 자란생(신선이 부는 피리) 만이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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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
이색
"나물굴 오래 먹어 맛을 못느껴
두부가 새로운 맛을 돋우어 주네
이 없는 이, 먹기 좋고
늙은 몸 양생에 더없이 알맞다.
고려 말기의 성리학자 이색은 ‘대사구두부내향(大舍求豆腐來餉·목은집)’이란 제목의 시에서 두부의 맛과 영양을 극찬하고 있다.
“나물죽도 오래 먹으니 맛이 없는데, 두부가 새로운 맛을 돋워주어 늙은 몸이 양생하기 더없이 좋구나”
두부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시기는 분명치 않으나 중국과 가장 교류가 빈번했던 고려 말기, 원나라로부터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두부의 부(腐)자는 썩는다는 뜻이 아니라 중국에서 요구르트를 유부(乳腐)라고 하듯이 고체이면서도 말랑말랑하고 탄력 있는 것을 가리킨다. 두부를 옛날에는 ‘포’라고 불렀는데 주로 절에서 많이 만들었다. ‘포’자가 들어 있는 두부요리에는 석화조포, 연포탕, 동호조포 등이 있다. 석화조포는 씨알 굵은 굴을 데친 후 토란이랑 두부와 함께 꼬치에 꿰어 기름장을 발라 구운 음식이고, 연포탕은 두부와 무, 쇠고기, 북어, 다시마 등을 넣어 끓인 것으로 제사 음식의 탕과 비슷하다.
한의학에서 두부는 소화를 증진시킬 뿐만 아니라 기를 돋워주고 비위를 조화롭게 하며 대장의 더러움을 씻어내는 효능이 있다고 본다. 또 두부의 원재료인 콩은 피로회복, 특히 당뇨병으로 인한 극심한 피로감을 풀어주는 데 효과적이다. 동의보감에서도 “콩은 소갈증(당뇨병)에 좋다”고 얘기하는데, 일명 ‘도랑탕’이라 부르는 약두부탕을 만들면 좋다. 냄비에 두부와 산 미꾸라지를 넣은 후 서서히 끓이다가 미꾸라지가 두부 속으로 들어가면 팔팔 끓여 익혀 먹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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