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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 이색 선생의 위패를 모신 동학사 삼은각

천하한량 2007. 1. 25. 19:28
 


종    목 문화재자료 
제59호 (공주시)
명     칭 삼은각(三隱閣)
분     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인물기념/ 사우
수량/면적 1동
지 정 일 1984.05.17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789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사단법인숙모회
관 리 자 사단법인숙모회
상 세 문 의 충청남도 공주시 문화관광과 041-840-2225
설     명 고려 때 절의를 지킨 포은 정몽주·목은 이색·야은 길재 등 삼은(三隱)의 위패를 모신 건물이다.
정몽주는 고려의 문신이자 학자로서 1360년 문과에 장원하여 1362년 예문관에 들어갔으며 이성계와 함께 여진토벌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색은 고려말의 문신이자 학자로서 충목왕 4년(1348)에 원나라에 가서 국자감 생원이 되었으며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그는 원·명 교체기 때 천명(天命)이 명나라로 돌아갔다고 보고 친명정책을 지지하였으며 유교의 입장에서 불교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길재는 고려말∼조선초의 학자로 공민왕 23년(1374)에 국자감에 들어가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우왕 9년(1383)에는 사마감시에 합격하였다. 창왕 2년(1390)에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선산으로 돌아와 늙은 어머니를 봉양했으며, 후학 교육에 힘썼다. 67세에 죽으니 후일 세상사람들이 이색, 정몽주와 함께 고려의 삼은이라 일컬었다.
이곳은 조선 정종 1년(1399)에 고려 유신 유방택이 삼은의 초혼제를 지냈으며 다음해에 공주목사 이정간이 건물을 세우고 삼은의 제사만를 지내 삼은단이라 하였다. 세조 때에는 유방택과 이숭인, 나계종을 추가하여 6인의 제사를 지냈으나 이름은 그대로 삼은각이라고 하였다.

문화재명 삼은각
이 건물은 고려 때 절의를 지킨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목은 이색(牧隱 李穡)·야은 길재(冶隱 吉再) 등 삼은(三隱)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원래 고려 유신 길재가 월영(月影)·운선(雲禪) 두 스님과 함께 단(檀)을 설치하고, 고려 태조(太祖) 및 충정왕(忠定王)·공민왕(公愍王)의 초혼제를 지내다가 정몽주도 아울러 모셨다. 후에 조선 정종 1년(1399)에 고려 유신 유방택(柳芳澤)이 삼은의 초혼제를 지냈고, 이듬해에 공주 목사 이정간(李貞幹)이 건물을 지어 삼은만 제사를 지내 삼은단이라 하였다. 세조 때 초혼각을 세우고, 광해군 때 유방택을, 순조 때 이숭인(李崇仁)을, 그리고 후에 나계종(羅繼從)을 추가하여 6인의 제사를 지냈으며 이름은 그대로 삼은각이라 한다.

 

 

 

 

 

 

 

 

  
 
석촌의 동학사·선암사

 


 

동학사 三隱閣 충남도 문화재 자료 59호

선암사 降仙樓 문재·꼿꼿함 엿뵈는 수작

◇동학사 삼은각 편액

◇선암사 누각 편액 

석촌 윤용구(石村, 石邨 尹用求·1853∼1937)는 부사를 지낸 윤회선(尹會善)의 아들로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서화가이다. 그는 15세에 돈령부(敦寧府) 직장을 지내고, 19세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또한 그는 후에 규장각에 들어가 상대(常帶), 한림(翰林), 대교(待敎), 직각(直閣), 사인부제학(舍人副提學), 이조참의(吏曹參議), 대사성, 도승지 등의 벼슬을 지내기도 했다.

석촌은 글씨와 그림에 두루 능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난죽(蘭竹)과 구양순(歐陽詢) 풍의 해서, 행서, 그리고 금석문(金石文)을 즐겨 썼다. 석촌은 대한제국 수립 후에도 법부, 탁지부, 내무대신 등으로 10여 차례 임명되었으나, 이를 모두 거절하고 서울 근교의 장위산(獐位山) 아래에 기거하면서 시, 서, 화로 여생을 보냈다. 현재 명승고적과 사당, 재실 등에 많이 전하는 그의 글씨는 대부분 벼슬에서 물러나 필묵으로 소일하던 때에 쓴 것인데, 사찰에 남긴 것으로는 공주 동학사 <삼은각>, <인재문>, 순천 선암사

<강선루> 편액 등이 대표적이다.

공주 동학사 삼은각 편액에는 액판 좌측에 ‘윤용구(尹用求)’라는 관지와 도서가 하나 찍혀 있다. 삼은각은 정몽주(鄭夢周), 이색(李穡), 길재(吉再) 등 고려 고려유신의 위패를 봉안한 전각으로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9호로 지정돼 있다. 좁은 변죽으로 장식한 편액은 액판 바닥을 흰색으로 칠했는데, 이러한 형태로 보아 일제강점기쯤에 조성된 것이 지금까지 전해온 것으로 보인다.

편액의 글씨는 석촌이 쓴 대부분의 글씨와 마찬가지로 수경(瘦勁)한 행서이다.

순천 선암사 일주문 밖의 계곡 옆에 있는 누각에 걸린 <강선루> 편액에는 ‘석촌 윤용구(石邨 尹用求)’라는 관지와 두 개의 도서가 찍혀 있다. 이 편액은 가로 두 개의 쪽판에 새긴 것으로, 1930년 6월 전각을 중수할 때쯤에 석촌의 글씨를 받아 건 것이다. 편액의 글씨는 역시 석촌의 문기(文氣)어린 수경(瘦勁)한 해행(楷行)으로 그의 꼿꼿한 성격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글씨이다.

 

안병인<대한불교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