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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교과서에 수록된 서천 사람은 누구일까?

천하한량 2007. 1. 24. 02:30


『국사』교과서에 수록된 서천 사람은 누구일까?
고려말 죽부인전의 저자 이곡, 고려 삼은 중 한 분인 목은 이색 , 월남 이상재 선생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한산 사람이며 한산 이씨 문중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다.

이들과 관련된 유적으로는 문헌서원, 이곡 묘, 이색 묘, 이상재 선생 생가 등이 있다.

이들은 국가적인 인물이면서 동시에 우리 고장 서천의 정신적 뿌리를 제공한 인물들이다.

그 정신적 뿌리는 아마도 굳은 의지를 가진 선비 의 기상일 것이다. 선비의 기상은 우리 고장 사람들을 우리 고장 사람답게 만들 수 있는 정신적인 바탕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들이 보여준 삶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한번이라도 생각해 보고 실천해 보려 했는가?
지방 자치 시대를 맞이하여 지방의 정체성을 가져야한다고 하는데, 자치단체에서는 우리 고장의 정체성을 갖기 위해 무엇을 했는지 묻고 싶다. 물론 관광 서천으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언론을 통해 보고 듣고 있다. 그러나 군민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각종 사업을 전개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 고장 서천이 서천다워 질 것이다. 이를 위하여 먼저 서천의 정신적인 뿌리를 찾아야할 것이다. 이에 적합한 역사적 인물로서 가정 이곡, 목은 이색, 월남 이상재 선생 등이 있다. 이 중 목은 이색의 역사적 평가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교과서를 살펴보면“성리학이 고려에 처음 소개된 것은 충렬왕 때 안향에 의해서였다. 그 후, 백이정이 직접 원에 가서 배워 와 이제현, 박충좌 등에게 전수하였으며, 고려 말에 이색, 정몽주, 권근, 정도전 등이 성리학을 발전시켰다.”(국사 상권 147쪽), 또“고려 말 이제현, 이곡, 이색, 이숭인 정몽주 등의 뛰어난 한문 학자가 나와 한시를 비롯한 한문학의 발달에 기여하였다.”(국사 상권 151쪽)라고 하여 두 번에 걸쳐 목은 이색이 등장하고 있다. 

 
이와 같이 교과서에 등장하는 이색(李穡)(1328∼1396)은 고려말의 성리학자이며 여말 삼은(三隱) 중 한 사람이다. 호는 목은. 시호는 문정. 본관은 한산. 죽부인전의 저자 이곡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기가 뛰어나 14세에 성균관시에 합격, 중서사 전부로 원나라에서 일을 보던 아버지로 인해 원나라의 국자감 생원이 되었고 3년간을 유학, 아버지의 상을 입자 귀국하였다. 1352년(공민왕1)에 그의 학문의 경향과 정견의 윤곽을 피력한 의견서를 왕에게 제출하였고, 1353년(공민왕2) 괴과(魁科)에 들었으며 다시 정동성 향시에 장원으로 합격되어 서장관에 임명된 후 원나라에 들어가 다시 문과에 급제, 한림지제고(翰林知制誥)가 되었다. 귀국하여 내서사인(內書舍人)에 올랐으며, 밀직제학동지춘추판사(密直提學同知春秋判事)가되자 이로부터 국정에 참여 1367년(공민왕16) 성균대사성에 정몽주, 김구용 등과 명륜당에서 학문을 강론하니 이에 정주의 성리학이 처음으로 일어났다. 1371년(공민왕 20) 정당문학이 되고 문충보절찬화공신(文忠保節贊化功臣)의 호를 받았으며 1373년(공민왕22) 한산군에 피봉, 다시 1377년(우왕3)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고 우왕의 사부(師父)가 되었다.


공양왕때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가 되었고 그후 오사충(吳思忠)의 상소로 장단, 함안 등에 귀양 갔으나 돌아와 다시 한산부원군에 피봉 예문춘추관사(藝文春秋館事)로 임명되었다 정몽주가 피살되자 관련되어 다시 금천, 영흥, 장흥 등지로 유배된 뒤에 석방되었다. 조선 개국후 태조는 그의 인재를 아끼어 1395년(태조4) 한산백으로 봉하며 예를 다하여 출사를 종용하였으나 끝내 고사하고 ‘망국에 사대부는 오로지 해골을 고산에 파묻을 뿐’이라고 하였다. 다음 해 피서 중 여강에서 갑자기 죽음으로 그 사인에 대하여는 후세에 의혹을 남기고 있다.


후에 서애는 삼국의 위(魏)에 벼슬을 받지 않았던 후한 조의 양팽(楊膨)에 비겨서 그 절개를 특필하고 있다. 문하에 권근, 김종직, 변계량 등을 배출하여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하였으며 한편 불교에 대한 조예도 깊었으며 고려 말기에 학문과 정치에 거족을 남긴 존재였다. 문헌으로는 목은집 55권이 있다.


목은 이색의 평가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이성계 일파는 조민수, 이색 등에 의해 옹립된 우왕의 아들 창왕을 축출하게 됨으로써 목은 이색은 신조(辛朝) 즉 왕씨가 아닌 신돈의 아들 우왕(辛禑) 창왕(辛昌)의 조정에서 벼슬한 사람으로 규정하는 조선초기의 평가와 조선 후기에는 송시열, 이익, 안정복 등이 우왕, 창왕이 공민왕의 아들로 보고 있어 목은 이색을 공민왕의 대를 이어 어린 왕들을 받들고 고려왕조를 어떻게든 존속시키려고 정열을 바친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이에 오늘날 이색은 고려왕조를 존속하기 위한 고행의 길을 걸은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조선 초기에는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아들로 규정하여 고려 말기의 폐단을 지적함으로 조선의 개창을 정당화하였다. 이에 이색이 옹립한 창왕의 폐위는 당연하다고 보고 있으나 이색은 고려왕조를 존속하기 위해서 노력한 인물로 우암 송시열의 글을 통하여 평가하고 있다. 즉 우암은 『고려사』 이색 열전에 기록된 내용을 비판하면서 역성혁명 시기의 글을 그대로 믿을 수 없다 라는 것이다. 따라서 목은 이색은 공민왕의 대를 이은 우왕, 창왕을 받들어 고려를 끝까지 선택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전제개혁의 반대에 대한 평가이다. 고려말의 전제개혁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러나 목은 이색은 전제개혁을 반대한 인물이다.  이로써 목은은 원로대신으로 수구세력과 일체가 되어 전제개혁을 반대했다고 여기고 있다. 또한 한걸음 나아가 혹자는 목은 자기자신의 소유한 많은 전장(田莊)을 보존하기 위하여 전제개혁을 반대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에 오늘날의 연구는 목은의 반대는 전제개혁 그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개혁의 주체가 이성계와 그 추종자들이라는데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이성계는 역성혁명을 통하여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음으로 전제개혁을 단행하면 민심이 이성계에게 돌아 갈 것이 염려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목은은 고려 왕조를 끝까지 존속하기 위하여 전제개혁을 반대한 것이다. 종합하여 볼 때 목은은 고려의 왕조 존속을 부단히 노력한 인물로 조선 개창의 역성혁명을 반대하여 충신불사이군의 절개를 지킨 선비이다.


이와 같은 이색 선생의 정신을 바로 세우기 위해  역사적 재평가를 통하여 서천 정신의 푯대를 세워야한다. 그때만이 우리 고장 서천이 관광 서천으로 아니 문화 서천으로 거듭날 것이다. 이를 위하여 군민과 자치단체, 한산 이씨 문중은 객관적으로 이곡, 이색, 이상재 선생을 서천의 인물 아니 나라의 인물로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군과 문중에서는 문헌서원과 이상재 선생에 대한 유적 관리에만 치중하지 말고 선생의 높은 뜻을 교육하는데 그 비용의 일부를 투자하여 21세기를 이끌어 갈 서천의 큰 인물을 배출하는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