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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 이색선생이 공민왕과 부모의 명복을 빌고자 지은 대장각기비

천하한량 2007. 1. 8. 20:40

종    목 보물  제230호
명     칭 신륵사대장각기비(神勒寺大藏閣記碑)
분     류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수량/면적 1기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여주군  북내면 천송리 282 신륵사
시     대 고려시대
소 유 자 신륵사
관 리 자 신륵사
설     명

신륵사에 세워져 있는 비로, 극락보전 서쪽 언덕에 있었던 대장각(불경을 만들어 보관하던 곳)의 조성에 관한 여러 가지 기록을 적고 있다.

길쭉한 사각형의 바닥돌 위에 받침돌을 놓고, 그 위로 비몸을 세운 후 지붕돌을 얹은 모습으로, 비몸 양 옆에 돌기둥을 세워 비몸을 단단히 지탱하도록 하고 있다. 이렇듯 비몸 양 옆에 돌기둥을 세우는 형식은 고려 후기에 이르러 보이는 현상으로 주목되는 부분이다.

권주(權鑄 )의 글씨로 새긴 비문은 비몸이 크게 파손되어 전체의 내용을 파악할 수는 없다. 비문의 뒷면에는 불경(경률론)을 만들고 비석을 세우는데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

비를 세운 시기는 고려 우왕 9년(1383)이다. 거북 모양의 비받침, 용의 머리가 새겨진 비머리가 고려 후기로 오면서 사각형 받침과 지붕 모양의 머릿돌로 간략화되는데, 이 비도 그러한 예이다.

 

문화재명 신륵사대장각기비
이 비석은 장방형(長方形)의 지대석(地臺石) 위에 대석(臺石)을 놓고 비좌(碑座)를 마련하여 장방형 홈을 파서 대리석 비신(碑身)을 꽂았으며 그 좌·우에 석주(石柱)를 세워 지주(支柱)를 삼고 개석(蓋石)을 덮은 것이다. 이렇듯 양지주를 시설한 형식은 고려말(高麗末)에 보이는 것으로 주목된다.

대석에는 복련(覆蓮)과 귀꽃문 등으로 장식하고 개석의 낙수면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게 했다. 이곳 신륵사는 원래 대장각(大藏閣)이 있어서 고려말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승려 나옹(懶翁)의 문하생(門下生)들이 발원하여 경률론(經律論)을 만들어서 수장(收藏)하던 집이었는데,

이 비는 대장각의 조성에 따른 제반 기록을 새긴 석비로서 고려 우왕(禑王) 9년(1383)에 세워졌다. 비문은 이숭인(李崇仁)이 짓고 권주(權鑄)가 썼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명문(銘文)이 많이 마멸되어 판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신륵사 대장각기비

보물 제230호
소재지 :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천송리 282

이 비는 신륵사 대장각을 세운 내력을 새긴 것이다. 목은 이색이 공민왕과 부모의 명복을 빌고자 보제존자 나옹의 제자들과 함께 발원하여 대장경을 인쇄하고 이를 보관하기 위해 이 곳에 2층의 대장각을 지었다. 비문은 예문관제학인 이승인이 짓고, 글씨는 진현관제학인 권주가 썼다. 뒷면에는 대장경 인쇄와 대장각 건립에 참여한 승려와 신도들의 명단이 적혀 있다. 비는 연꽃 무늬를 새긴 대석 위에 비몸을 세우고 양옆에 기둥을 댄 다음 그 위에 지붕 모양의 개석을 올렸다. 이러한 형식은 고려 말기에 나타난 것으로 조선 시대 초기의 비 형식에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