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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더워지면 무엇이든 시원하게 보이는 것을 찾게 마련인데, 여름철 모시옷만큼이나 시원한 의복도 없다. 에어컨도 선풍기도 없었던 옛 우리 선조들은 바로 모시가 있었기에 더위를 이겨낼 수 있었다. 모시는 땀이 잘 배지 않고 통기성이 탁월해 누구나 선호하는 여름의복으로, 그 중에서도 한산모시 하면 예로부터 서민들보다는 양반들의 옷감이었다. 충청남도 남쪽 끝자락에 달려 있는 서천은 이젠 서해안고속도로를 달려 서천 IC를 통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한산 세모시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그 중에도 한산면과 화양면은 한산 세모시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지금도 약 2백여 명의 아낙네들이 잠자리 날개 같은 세모시를 짜고 있다.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에 서는 한산장에서 모시전을 제대로 보려면 새벽부터 부지런을 떨어야 한다. 모시는 반드시 새벽안개 속 백열등 아래 비춰봐야 진품을 가릴 수 있다는 오랜 믿음 때문이다. 한산 모시시장의 최대성수기는 4월부터 6월 사이에 이루어지는데, 이 기간에 5∼6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며, 모시 약 3백 필 정도가 거래되고 있다. 장날(1, 6, 11, 16, 21, 26일)이면 어김없이 새벽 5시쯤 사람들이 몰려들어 해가 뜨는 7시쯤에 파시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반짝 시장이라고도 불린다. 한산모시가 탄생되기까지는 태 모시, 모시 째기, 모시 삼기, 시 날기, 모시 매기, 모시 짜기의 과정을 거친다. 좋은 모시를 짜기 위해서는 재료의 수급이 중요하다. 모시풀을 수확해 잎사귀를 제거하고 바깥쪽을 벗겨내 속껍질을 물에 담갔다 말리면 태 모시가 된다. 태 모시 가닥을 이와 손으로 찢은 다음에 그것들을 서로 이으면 모시를 짜는 재료인 모시 굿이 된다. 모시를 짜기 위해서는 태모시 ‘째기’와 가닥들을 손바닥으로 비벼 연결시키는 ‘삼기’업을 거쳐, 베틀에 걸 날실 길이와 올 수를 맞추는 ‘날기’작업. 그리고 콩가루와 소금을 물에 풀어 만든 콩 풀을 여러 개 날실에 묻히고 왕겻불로 말리는 ‘매기’과정을 거친다. 콩은 풍부한 기름기로 날실의 이음새를 매끄럽게 하고, 소금은 습도조절에 이용된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면 본격적인 짜기 과정으로 날실과 씨실을 엮어 모시를 만드는 '짜기'과정에 접어든다. 발로 베틀의 쇠꼬리채를 잡아당겨 도투마리에 감긴 날실을 벌린 다음, 씨실이 감긴 북을 좌우로 움직여 모시를 완성한다. 서천군 한산지역에서 만드는 모시는 섬세하고 단단하여 예로부터 모시의 대명사로 불려왔다. 모시의 역사를 살펴보면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모시풀 재배와 모시 짜기는 고려·조선시대 농가의 중요한 부업으로 인기를 끌었다. 지금 모시의 인기는 옛날만 못하지만 예전에는 모시를 팔아 학비도 대고 생활도 꾸려나가는 주 수입원이기도 하였다. 한편 이곳 한산면 지현리에는 지난 93년 8월에 개관된 ‘한산모시관’이 자리잡고 있다. 한산모시관은 서천군의 대표적 특산품인 한산세모시의 맥을 잇고 모시명산지를 명소로 가꾸어 한산모시의 우수성을 널리 홍보하고 군민의 휴식공간을 제공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는데, 주요시설로는 전수교육관, 전통공방, 모시가, 소곡주제조장, 상업시설, 어린이놀이터 등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한산모시관에서는 매년 5월∼6월 성수기에 모시문화제도 열린다. 이 문화재는 축제 한마당으로, 전통문화의 계승과 발전을 도모하고자 열리는 지역행사이다. 저산팔굽길쌈놀이, 모시길쌈대회 등 모시 관련 행사를 비롯하여 그네뛰기, 농악경연, 윷놀이, 팽이치기의 민속놀이가 벌어진다.
가격은 고가인 듯 해도 모시 짜는 수고에 비하면, 결코 비싸다고 할 수 없지요." 연평균 기온 12.6도, 연간 강수량 1,000mm 이상으로 저마 재배의 최적지인 서천군 화양면 화촌리에서 모시 짜기에 밤낮이 없는 김정숙 씨(50·041-951-1766). 본래 한산모시가 태동한 화촌리가 고향인 그는 젊은 사람이 먹고 놀지 말고 함께 해보지 않겠느냐는 이웃 아주머니의 권유로 모시 짜기 시작한 것이 어언 25년이 넘었다고. 중국산 모시도 들어오고 하여 가격 경쟁력도 전 같지는 않지만 우리 것의 질에 비하면 아직까지는 품질에서 경쟁이 안 된다. 국산 제품이 좀더 촘촘하여 옷을 해도 예쁘고, 훨씬 시원하며, 견고해서 몇 십 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김 씨는 정부차원에서 우리의 것이 없어지지 않도록 보호육성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