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산자료실 ▒

한산 인물 정리중

천하한량 2007. 1. 9. 20:46

이종학 

 

■ 출생지

○ 서천군

■ 주요 약력

○ 1361~1392

○ 고려(공민왕10-태조1) 문신

○ 자는 중문(仲文), 호는 인재(麟齋)

○ 곡(穀)의 손자이며, 색(穡)의 둘째 아들

■ 인물 탐구

○ 1374년(공민왕 23)성균시에 합격하고, 1376년(우왕 2) 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여 장흥고사(長興庫使)에 제수되었다. 그 뒤 관직이 밀직사지신사(密直司知申事)에 이름

○ 창왕이 즉위한 직후에는 성균시를 관장하기도 하였으며, 곧 승진하여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가 됨

○ 1389년(창왕 1)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는데, 아버지 색이 정권의 핵심에 있으면서 두 해에 걸쳐 과거를 관장하자 사람들의 시기를 받음. 공양왕이 즉위하고, 색이 탄핵을 받게 되자, 더불어 폄출(貶黜)됨

○ 조선이 개창되면서 정도전(鄭道傳) 등이 손흥종(孫興宗)을 시켜 그를 살해하려고 하였는데, 자기의 문생인 김여지(金汝知)가 판관으로 있어서 그의 비호를 받아 무사하였으나, 장사현(長沙縣)으로 옮기는 도중 무촌역(茂村驛)에서 제찰사, 손흥종이 권세 있는 신하의 뜻에 뇌동되어 목을 매어 죽이니 당시 그는 32세였다.

○ 후에 한산의 문헌서원과 진천의 진현서원에서 배향됨

○ 저서로는 《인재유고》가 있음

■ 본받을 점

  아버지 이색과 함께 고려 말 충신으로 조선 창업에 동조하지 않음으로써 죽임을 당한 절개 있고 충절 있는 고려 말 문신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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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개

 

■ 출생지

○ 서천군 출생, 한산 이씨

■ 주요 약력

○ 1417~1456

○ 자는 청보(淸甫) 백고(伯高), 호는 백옥헌(白玉軒)

○ 조선(태종17-세조2) 절신

○ 훈민정음의 창제에도 참여

○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

■ 인물 탐구

○ 이색의 손자

○ 1436년(세종 18)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441년에 집현전저작랑으로서 당나라 명황(明皇)의 사적을 적은 《명황계감 明皇誡鑑》의 편찬에 참여하고, 훈민정음의 제정에도 참여함

○ 1456년(세조 2) 2월에 집현전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이해 6월에 성균관사예 김질의 고변에 의하여 성삼문 등 육신(六臣)이 주동이 되어 상왕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이 발각되었는데, 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유응부(兪應孚)․유성원(柳誠源)과 함께 국문을 당함

○ 남효온(南孝溫)이 그 당시 공론(公論)에 의거하여 단종복위사건의 주도인물인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 유응부 등 6인을 선정, 〈육신전 六臣傳〉을 지었는데, 이 〈육신전〉이 세상에 공포된 뒤 육신의 절의를 국가에서 공인, 1691년(숙종 17)에 와서 사육신의 관작을 추복(追復)시킴

■ 본받을 점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시킨 사건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죽임을 당한 사육신 중 한 분으로 충절이 높은 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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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산보

 

■ 출생지

○ 서천군, 한산 이씨

■ 주요 약력

○ (1539~1594) - 조선(중종34~선조27) 문신

○ 조선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거(仲擧), 호는 명곡(鳴谷). 증영의정 색(穡)의 7대손이며, 지무(之茂)의 아들

■ 인물 탐구

○ 1567년(명종 22) 사마시를 거쳐 1568년(선조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의 추천으로 춘추관에 들어갔다가 전적․해미현감․정언 등을 지냈으며, 왕명을 받고 순안어사(巡按御史)로 북도(北道)를 순찰하고 돌아와 수찬 교리 지평 헌납 이조정랑 등을 역임함

○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인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대사간의 자리에서 난국을 수습하고, 이듬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또다시 대사헌이 됨

○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扈從)하였고, 대사간․이조참판․이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명나라 군대가 요양(遼陽)에 머물면서 진군하지 않자 그는 명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을 설득하여 명군을 조선으로 들어오게 하는 데 큰 공을 세움

○ 1594년에 대 기근이 들자 동궁의 명을 받고 밤낮으로 구휼에 힘쓰다가 병을 얻어 죽음

○ 1604년 호종공신(扈從功臣)2등에 책록되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한흥부원군(韓興府院君)에 추봉됨

■ 본받을 점

  성품이 소박하고 정직하여 이해득실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으며 시정에는 심신으로 다하였다. 보령의 화암서원(花巖書院), 서천의 건암서원(建巖書院)에 제향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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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초 

 

■ 출생지

 ○ 충남 서천 출생

■ 주요 약력

○ 본명은 응식(應植). 호는 유인(唯仁), 석초(石艸, 石初)

○ 경성제일고보를 거쳐 일본 호세이대학(法政大學) 철학과에서 수학

○ 한국문학가협회 중앙위원 및 한국일보 논설위원 겸 문화부장, 한국시인협회장을 지냄

○ 1967년 예술원상을 수상. [한국일보] 논설위원으로 근무(1957~)하였음. ○ 1975년 3월 8일 사망

■ 인물 탐구

○ 1930년대 초반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카프에 가담(1925~35)하여 평론 <문학창작의 고정화에 향하여>를 발표하였음

○ 카프의 도식주의적 창작방법에 반발하여 박영희의 전향선언(1934)과 함께 탈퇴하였음

○ 1935년경부터 이육사를 알게 되어 1937년 함께 동인지 [자오선]을 발간(1937.11.)하면서 본격적인 시작활동을 펼침

○ 이후 [시학], [문장] 등을 통해 <파초>, <묘>, <검무랑>, <바라춤> 등을 발표했으나, 일제 강점기 말에는 고향에 묻혀 절필함

○ 8.15 광복 후 상경하여 광복 전의 작품들을 모아 [석초시집]을 발간한 이래 [바라춤](1959), [폭풍의 노래](1970), [처용은 말한다](1974), [수유동운] 등의 시집과 [석북집]을 역주하여 발간함

■ 본받을 점

  서천지역의 현대 인물 중 대표적 문인으로 일제강점기에 맞섰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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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벽당 김씨

 

■ 출생지

○ 서천 한산 출생

■ 주요 약력

○ 1492년(성종 23년)~1549년(명종4년)

○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별좌(別座) 김수천(金壽千)의 딸

○ 신사임당, 허난설헌과 더불어 조선조 중기의 3대 여류시인

■ 인물 탐구

○ 조부 김축으로부터 시,문,서(詩,文,書)를 익혔고 이후에는 수예(繡藝)에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함

○ 서기 1683년에 애산 김두명이 중국사행을 다녀오면서 명나라의 목재 전겸익이 편집한 열조시집이란 책자를 가져오면서 임벽당 김씨의 명성이 더해감

○ 열조시집에는 임벽당 김씨의 시 3수가 수록되어 있으며 이를 본 조야(朝野)에서는 그제야 명나라에까지 유명해진 임벽당 김씨의 뛰어난 시재에 경탄과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명인 재상들이 다투어 서문과 발문을 찬하며 임벽당 유고가 높이 평해짐

○ 그의 시는 《열조시집(列朝詩集)》 · 《국조시산(國朝詩刪)》 · 《난설헌집(蘭雪軒集)》에 모두 9수가 실려 있음

○ 시집으로 《임벽당집(林碧堂集)》이 규장각과 일본인 고교형(高橋亨)에게 있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음

○ 묘는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에 있다고 《기계유씨족보(杞溪兪氏族譜)》에 전함

■ 본받을 점

  조선시대 사회구조로 볼 때 여성의 사회진출과 활동이 어려웠을 때 여성의 시가 시집에 실려 있다는 것은 그의 시가 얼마나 뛰어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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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전 

 

■ 출생지

○ 서천 출생

■ 주요 약력

○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부의장(1920)

○ 임시정부 국무원 학무총장 대리 겸 학무차장(1921)

○ 임시정부 제4대 의정원 의장(1922)

○ 상해 인성학교 교장(1922~1923년1월)

○ 1923년 상해동인병원서 작고

■ 인물 탐구

○ 기독교 신자였으며, 34세에 평양신학교에 들어감

○ 1914년 전북노회에서 인수를 받고 서문교회 목사가 됨

○ 전주 3·1 운동에서 중추적 역할을 함

○ 상해로 망명 이듬해인 1920년부터 임시정부에서 의정원 의원이 되고 이듬해 학무총장 권한 대행에 이어 1922년에 제4대 의정원 의장(입법부 수장)에 올랐음

○ 그는 복잡한 구도의 임정내에서 「화해의 사도」로 불릴 만큼 계파에 휩쓸리지 않고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한 임정의 역할 확대에 힘을 기울였음

○ 1922년 한 한·중간 유대 강화를 위한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회의 우리측 대표로 김규식·여운형 등과 함께 참가했고,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 조직을 발기하는 등의 외교활동을 벌이기도 함

■ 본받을 점

○ 서천출신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서 화합을 중시하는 노선으로 임시정부에서 단기간에 높은 지위에 올라간 인물임

○ 현재 우리나라의 지역별, 세대별 격차로 인한 불신의 시대에 다시 한번 음미해볼 인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