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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어질 직업'에 매달린 우리의 노동

천하한량 2019. 10. 26. 14:54

[경향신문]

Pixabay

‘인간은 필요 없다.’

2014년 미국의 유명 유튜버 CGP 그레이가 자동화로 인해 일자리가 사라지는 현실을 고발하기 위해 제작한 영상 제목이다. 러닝타임 15분에 불과한 영상은 조회수 1100만을 넘어서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인공지능학자 제리 카플란 미 스탠퍼드대 교수는 이듬해 그레이의 영상 제목을 인용해 발간한 책 <인간은 필요 없다>에서 기술의 진보로 인한 노동의 소멸을 경고했다. 더 늦기 전에 인간과 기술이 공존할 수 있는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공통된 견해다.

인간은 정말 필요 없는 존재가 될까. 앞서 세 차례 산업혁명을 겪은 뒤에도 인간의 노동은 살아남았다. 1900년대 40%에 이르던 농업종사자는 2%대로 줄었지만 그보다 생산성이 높은 새 일자리를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기술의 진보는 산업의 성장을 이끌었다. 주류 경제학자들은 4차 산업혁명도 비슷한 길을 걷게 될 것으로 본다. 기술 진보의 과도기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대량실업과 부작용도 혁신기술이 해결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인간과 기계, 노동과 기술의 최종 승자는 누구일까. 국내에서도 같은 주제를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그 사이 기술을 등에 업은 자본은 노동시장과 산업구조를 바꾸는 작업에 돌입했다. 사람 대신 기계를 쓰는 노동절약형 기술을 앞다퉈 도입했다. 자동화·무인화 바람에 밀려 일자리를 잃는 노동자가 늘고 있다. 소규모 영세한 산업군은 ‘악’ 소리도 못내고 사라졌다. 한국은 이미 ‘예견된 미래’로 접어들었다.

기술로 인한 노동자 떠밀림 현상은 4차 산업혁명 대세론에 눌려 수면 위로 떠오르지 못했다. 더구나 자동화의 첫 번째 타깃은 이미 불완전 고용에 시달리던 이른바 하위 노동자들로 한국 산업구조에서 이들의 실직은 새삼스러운 게 아니었다. 조용히 확산되던 노동자 떠밀림 문제는 한국도로공사 톨게이트 수납원의 정규직 전환 문제를 계기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도로공사가 톨게이트 수납인력을 직접고용하라는 법원의 판단을 거부하면서 내세운 명분은 ‘자동화 시스템’이었다. 도공은 “수납시스템(하이패스) 자동화로 수납인력을 고용할 수 없다”며 되레 한국 사회에 “하이패스 시대에 수납원은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에 대해 경제계는 “수납원의 도태는 기술 진보로 인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며 “수납원은 필요 없다”고 답했다.

“어차피 없어질 직업” 발언 파문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정부의 뜻을 물었다. 노동계는 정부가 전환의 속도와 방향을 조절해줄 것을 기대했다. 청와대의 답은 기대와 달랐다. 이호승 청와대 경제수석은 청와대 브리핑에서 “도로공사 톨게이트 노조의 수납원들이 (투쟁을) 하지만, 톨게이트 수납원이 없어지는 직업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동안 정부는 4차 산업혁명과 혁신성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기술 진보로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해서는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민간기업과 노동시장에서 발생하는 노동자 떠밀림 현상에 대해서도 묵인했다. 노동 존중과 4차 산업혁명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놓치고 싶지 않은 정부의 전략적 선택이었다.

이호승 수석의 발언으로 정부의 입장은 명확해졌다. 정부는 노동절약형 기술 진보를 택했고 ‘없어질 직업’에 대해서는 개입할 뜻이 없음을 밝혔다. 민간이든 공공이든 정부는 전면에 나서지 않겠다는 것이다.

없어질 직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겪을 떠밀림은 개인이 감당해야 할 몫으로 남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인간이 필요 없어지게 된다’는 경고에 대해 한국 사회는 ‘어차피 없어질 직업일 뿐’이라고 답했다. 공은 기업과 자본에 넘어갔다. 어떤 일이 벌어질까.

톨게이트 수납업무와 결이 같은 일자리는 이미 소멸위기에 처해 있다. 올해 2분기 이마트는 연결 영업손실 299억원으로 적자를 기록했다. 분기 실적이긴 하지만 이마트가 적자를 낸 것은 2011년 신세계로부터 법인이 분리된 이래 처음이다. 이마트는 ‘대형마트 업황 부진과 전자상거래 업체의 저가 공세’를 적자의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이마트의 설명대로 이커머스(전자상거래 업체)는 유통시장에서 대형마트의 지분을 가져갔다. 유통구조는 오프라인에서 온라인 중심으로 재편됐다. 20여년 전 소매점과 전통시장을 평정하고 차지한 ‘유통 공룡’ 자리를 이커머스에 빼앗길 판이다. 이마트도 가만있지 않는다. 온라인 부문 강화를 위해 지난 3월 이마트와 백화점 온라인사업부를 분할해 통합 온라인몰 SSG닷컴을 출범시켰다. 새벽배송 시장 판에도 뛰어들었다. SSG닷컴에 대한 공격적인 투자는 2분기 영업손실이 늘어난 이유 중 하나다.

CGP Grey 유튜브 Humans Need Not Apply 캡쳐

이마트가 진행하는 체질개선의 한 축은 구조조정이다. 구조조정은 자동화와 무인화를 전제로 진행된다. 지난 6월 13일 국내 1호점인 서울 창동점은 리뉴얼 작업을 마치고 다시 문을 열었다. 무인계산대 16대를 설치하고 직원이 있는 계산대를 12대에서 2대로 줄였다. 창동점을 시작으로 전국 이마트 139개 점포에서도 무인계산대를 도입한다.

유통산업 변혁기에 위기를 맞이한 이마트의 출구전략은 기계가 노동을 대체하는 ‘자동화 시스템 도입’이다. 이른바 노동절약형 기술 진보 방식이다. 새로운 기술로 인건비를 줄여 효율성을 높인다.

이 같은 이마트의 방침을 두고 노동자들은 반발하고 있다. 무인계산대 확대가 고용불안과 일방적인 인력감축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이마트 노조(민주노총 마트산업노동조합)는 사측이 무인계산대 도입을 빌미로 계산업무를 해온 노동자를 예고 없이 다른 직무에 배치해 퇴사를 유도하고 있다고 본다. 직무전환에 실패한 노동자가 퇴사한 뒤에도 충원을 하지 않는다. 남은 인원의 노동강도를 높여 퇴사율을 높이는 방식이다. 전수찬 이마트 노조위원장은 “2년쯤 지나면 더 많은 무인계산대가 우리 일자리를 잠식해 나갈 것”이라며 “산업의 변화를 거부하겠다는 게 아니라 시기와 방법에 대한 대화 없이 일방적으로 이뤄지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이마트 측은 ‘무인계산대 도입은 소비 트렌드 변화와 고객 편의를 위한 선택’임을 강조한다.

혁신을 앞세운 자본의 공세

이마트는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자동화·무인화 가속 페달을 밟은 것일까. 신세계그룹 전체를 보면 그림이 달라진다. 이마트의 영업손실은 증가했지만 이마트가 속한 신세계그룹 전체가 실적 부진에 빠진 것은 아니다. 신세계 IT기업인 신세계I&C(아이앤씨)는 매출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신세계 아이앤씨의 전체 매출 가운데 77%(2866억원)는 내부거래에서 나왔는데 이 중 절반가량(1410억원)은 이마트와의 거래에서 발생했다.

신세계 아이앤씨는 이마트 내 무인계산대와 전자가격표시기를 공급한다. 이마트의 무인계산대 도입이 확대되면서 신세계 아이앤씨의 매출이 증가한 것이다. 올 3분기 신세계 아이앤씨의 매출액은 1184억원으로 전년 같은 기간 대비 33.6% 증가했다. 이마트는 자동화·무인화를 통해 인건비를 감축하고 이 과정에서 다른 계열사는 일감을 얻어 전체 그룹의 몸집을 불리는 구조다.

신세계의 방식은 경쟁사인 롯데그룹에서도 볼 수 있다. 롯데 IT계열사인 롯데정보통신은 롯데 계열 편의점·마트의 무인시스템을 구축해 매출을 올린다.

신세계와 롯데그룹의 이 같은 움직임은 자동화로 인한 기술적 실업이 단순히 인간과 기계의 대립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국 산업구조에서 대기업 자본은 자동화·무인화 시스템을 구축하고, 판매하며, 구매까지 할 수 있는 존재다. 신기술 도입 시기와 방식도 스스로 정한다. 요컨대 일자리 전쟁이란 게임으로 치면 대형자본은 게임에 참여하는 플레이어이자 게임의 방식과 규칙을 정하고 조정하는 코디네이터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만든 판에서 노동자는 언제든 버리고 바꿀 수 있는 말로 전락한다.

그렇다면 자동화 바람 속에서 현장에 남은 노동자들은 어떤 모습일까. 한국철도공사(코레일)의 자회사 코레일네트웍스 소속 ㄱ씨(32·여)는 서울역 매표창구에서 일한다. 기차표 발권업무만 8년째 하고 있는 그는 요즘 퇴사를 준비하고 있다. 더 이상 고객 응대를 감당할 수 없겠다는 판단에서다. ㄱ씨는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까지 고객을 응대한다. 식사를 포함한 휴식시간 2시간을 제외하고 꼬박 8시간을 쉼없이 일한다.

코레일 어플과 역내 무인발권기 확대 이후 현장 발권업무는 폭언과 폭행에 시달리는 감정노동이 됐다. 자동화 시스템 도입 이후 매표창구가 줄어들면서 창구 앞은 항상 긴 대기줄이 생긴다. 대기시간이 길다보니 ㄱ씨와 만날 때쯤 고객들은 대부분 화가 나 있다. 기계를 통한 발권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 고객들이 많기 때문에 직원에게 쉽게 짜증을 낸다. 카드를 집어던지고 행패를 부리는 고객도 적지 않다. 스마트폰과 무인발권기를 이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노인과 장애인이 토로하는 불평·불만도 창구 건너편에 있는 ㄱ씨의 몫이다. 임신을 계획 중인 ㄱ씨는 “이런 환경에서는 도저히 태교를 할 수 없다”며 “임신을 해도 유산이 잦아서 퇴사를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5월 8일 이마트 노조원들이 서울 이마트 본사 앞에서 무인셀프계산대 확대 중단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사람은 줄고, 노동강도는 세지는 악순환

자동화 과정에서 발생한 기술비용은 남아있는 감정노동자가 떠안아야 한다. 버티지 못한 동료가 떠나서 생긴 감정노동의 부채는 남은 노동자가 갚아야 한다. 비용절감을 이유로 회사는 자동화·무인화 확대 방침을 세웠기 때문에 인력 충원은 이뤄지지 않는다. 갈수록 사람은 줄고 노동강도는 더 심화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런 현상은 은행 창구와 콜센터, 패스트푸드점처럼 무인자동화 기계가 사람 대신 들어선 노동현장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은 “현재 한국에서 진행되는 기술의 진보는 사라질 일자리로 불리는 곳에 남아있는 서비스 노동자의 희생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며 “정녕 인간을 위한 기술인지, 그렇다면 인간에게 고루 혜택이 돌아가는 기술인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비숙련 노동과 단순업무를 주로 하는 하위 노동자를 집어삼킨 자동화의 파고는 제조업과 사무직, 전문직 등 직종과 직무를 가리지 않고 확산될 조짐이다. 한국노동연구원의 연구(‘기술 진보에 따른 노동시장 변화와 대응’·2014년)에 따르면 우리나라 노동시장 전체 일자리의 55∼57%가 향후 수십 년 사이에 기계에 의해 대체될 확률이 높은 고위험군에 속한다. 미국(기계 대체 고위험군 일자리 47%)과 비교해도 기술적 실업에 취약한 구조다. 김세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원은 “기술 진보에 대한 정책적 대응책을 철저히 마련하지 않으면 커다란 경제적·사회적 혼란이 초래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정부와 기업은 기술 진보를 둘러싼 경고를 귀담아듣지 않았다. 사회적 논의절차 없이 노동절약적 기술 진보를 택했다. 그 결과는 수치로도 나타나고 있다.

통계청(KOSTAT 통계플러스 2019년 가을호)에 따르면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 국가들의 자본심화지수를 분석한 결과 한국의 자본심화지수는 주요 7개국(G7)보다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자본심화지수는 노동시간에 대한 자본투입량을 수치화한 것으로 자본심화지수가 높을수록 노동이 자본(기계)으로 대체되는 경향이 두드러진 것으로 본다. 한국이 영국·미국을 비롯한 기술 진보 수준이 높은 주요 국가보다 사람을 기계로 대체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 것이다.. 특히 제조업과 서비스업 등을 포괄하는 비정보통신기술 분야에서 한국의 자본심화지수(2017년 기준)는 125로 영국(101.1)과 미국(99.5)을 웃돌았다. 정규승 통계개발원 경제사회통계연구실 서기관은 “미국과 유럽에서는 기업이 노동자를 내보내고 기계를 늘리면 언론과 시민으로부터 강한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며 “노동 존중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기술 진보의 방향을 노동친화적으로 바꾼 것”이라고 말했다.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