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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루덴스족(族)'의 금·토·일 "혼자 노는 게 제일 좋아!"

천하한량 2019. 11. 5. 21:05

신동아]

●밀레니얼 세대 70% 이상 ‘홈루덴스족’
●홈무비, 홈카페, 홈트레이닝… 집에서 다 해결!
●늘어나는 1인 가구, 나도 소확행!
●배달 앱·새벽배송 증가도 한몫
●외롭냐고? 독립적 이미지 좋아!

[GettyImage]
올해 서른넷인 직장인 김지연(가명) 씨는 자칭 타칭 '홈루덴스족(族)'이다. 홈루덴스는 '호모루덴스(Homo Ludens·놀이하는 인간)'에서 파생된 신조어로 '홈(home·집)'과 라틴어 '루덴스(Ludens·놀이하는)'를 합쳐 '집에서 노는 걸 좋아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최근 20·30대를 중심으로 홈루덴스족이 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편한 내 집에서, 누구의 방해도 없이, 오롯이 나만의 취향을 즐기며 행복을 느끼는 것, 그것이 홈루덴스족이 추구하는 삶이다. 최근 한 구직 사이트가 20·30대 밀레니얼 세대 4000여 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응답자의 72.3%가 스스로를 홈루덴스족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별로는 여성(76.5%)이 남성(61.4%)에 비해 15.1%포인트 더 많았다. 

집에서 노는 게 별거 있을까 싶지만, 김씨의 일상을 따라가 보면 분명 색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한때 '방콕'이란 단어가 유행한 적이 있다. '방'에 '콕' 박혀 있다는 뜻으로 국어사전에도 '외출하지 않고 방에만 처박혀 있는 상태'라고 명시돼 있다. 방콕과 비슷한 의미의 '건어물족'도 있다. 일본 만화 '호타루의 빛'에서 유래한 말인데, 집에서 편안한 운동복 차림으로 오징어 따위의 건어물을 씹으며 일상을 보낸다고 해 유래한 말이다. 이성에 대한 관심보다는 자기애가 강한 특성을 보인다. 

호모루덴스족은 방콕족이나 건어물족과는 또 다르다. 집에 있되 밖에서만큼 혹은 그보다 더 재미있는 시간을 보낸다. '혼자 놀기의 달인'인 김씨의 주말은 그래서 더 특별하다.

명품 구경보다 즐거운 '마트 쇼핑'

김씨가 가장 좋아하는 요일은 금요일이다. 남들은 '불금'이라며 약속 잡기에 바쁘지만 김씨는 퇴근과 동시에 대형마트로 향한다. 20대 중반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구입한 소형차 모닝은 김씨의 재산 1호이자, 그의 손과 발이다. 모닝을 몰고 대형마트로 간 김씨는 분홍색 주차 라인에 모닝을 세우고, 야구공 사이즈의 천장바구니와 신용카드 한 장을 손에 쥔 채 에스컬레이터에 오른다. 금요일에 장을 보는 이유는 주말 동안 집에서 여러 끼를 해결하기 때문이다. 요리에 제법 소질이 있는 김씨는 자신이 만든 음식이 가장 맛있다고 생각하는 '홈쿡(home cook)주의자'다. 

"마트에서 장 볼 때 정말 행복해요. 백화점에서 신상 백 구경할 때보다요. 20대 후반까지만 해도 명품에 관심이 많았는데, 요즘은 그 돈 모아서 집에서 어떻게 놀까 고민해요. 마트에서 새로 나온 레토르트 식품, 수입 맥주 등을 구경하다 보면 시간이 금방 가요." 

김씨가 쇼핑 목록에서 절대 빠뜨리지 않는 것은 통삼겹살과 냉동 감자튀김, 꼬마 핫도그. 이들의 공통점은 '에어프라이어'로 조리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김씨가 최근 들어 집에서 밥 먹는 횟수가 는 데는 에어프라이어의 공이 크다. 인터넷으로 7만 원을 주고 구입했는데 일주일에 대여섯 번은 쓸 정도로 활용 빈도가 높다. 

유통업계에 따르면 최근 에어프라이어 매출이 전자레인지 매출을 뛰어넘었다. 올해 1~9월 이마트 매출 비중을 비교해보면 에어프라이어 69%, 전자레인지 31%다. 에어프라이어는 기름을 쓰지 않고도 음식을 조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웰빙을 추구하는 소비자의 '가심비'를 충족시킨다. 2016년 창고형 할인매장 이마트 트레이더스에서 10만 원 선을 깬 6만9800원의 에어프라이어가 출시된 이후 빠른 속도로 시장에 안착했다. 

"에어프라이어 용기가 5L가 넘어 삼겹살도 통째로 넣을 수 있어요. 기름기는 쏙 빠지고 겉은 바삭, 속은 촉촉하니 맛있어요. 먹다 남은 치킨을 냉동실에 보관하다 에어프라이어에 데우면 처음 맛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워킹패드 위에서 '홈트레이닝'

7월 16일 LG전자는 캡슐을 이용한 맥주제조기 ‘LG 홈브루’를 출시했다. [김재명 동아일보 기자]
이날 저녁 김씨는 에어프라이어로 잘 익힌 삼겹살을 도톰하게 썰어 요즘 유행하는 금색 테두리 접시에 예쁘게 담았다. 접시 밑에 지난 여름휴가 때 태국에서 사온 라탄 테이블매트를 깔고, 같은 종류의 코스터(컵받침)까지 놓았다. 식탁은 금세 고급 레스토랑으로 변한다. 코스터 위에는 요즘 편의점에서 핫한 수제 캔맥주 '광화문'(같은 시리즈로 '경복궁' '제주백록담'이 있다)이 놓여 있다. 

요즘 수제 맥주에 꽂힌 김씨는 얼마 전 LG전자에서 출시한 가정용 수제맥주 기계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물론 너무 비싸(400만 원 선) 아직 구입할 엄두는 내지 못한다. 맥주 제조 과정 대부분을 자동화한 가전제품인데, 입맛에 맞는 캡슐을 골라 간편하게 맥주를 만들어 먹을 수 있다. 캡슐에 따라 아이피에이, 페일에일, 스타우트, 위트, 필스너 등 5종의 맥주를 즐길 수 있다. 

삼겹살에 맥주로 든든히 배를 채운 김씨는 거실 소파에 앉아 흰색 스크린을 내려 빔프로젝트를 작동한다. 빔프로젝트는 홈무비족, 홈게이밍족이라면 반드시 갖춰야 하는 '필수템'이다. 이날 김씨가 고른 영화는 '알라딘'. 한 손에는 좀 전에 마트에서 사온 '스윗 & 솔트 팝콘'이 봉투째 들려 있다. 

"혼자 조용히 영화를 보다 보면 빔프로젝트 돌아가는 소리가 살짝살짝 들려요. 뭔가 아날로그적 감성이 느껴져 좋아요." 

김씨는 영화를 보고 난 뒤 침대에 누워 다시 스마트폰으로 넷플릭스 드라마를 감상한 뒤 새벽 무렵 잠이 든다. 주말 기상 시간은 보통 오전 10시. 눈을 뜨자마자 김씨는 주방으로 향한다. 평일엔 출근 준비로 아침 식사를 거르기 일쑤지만, 주말만큼은 홈브런치로 근사하게 아침을 맞는다. 며칠 전 인스타그램에서 봐둔 사진을 떠올리며 식사 준비에 돌입하는 김씨. 오늘의 메뉴는 와플 두 조각과 버터플라이피(차의 일종)로 만든 망고칵테일 한 잔이다. 와플은 지난해 TV 예능 프로그램에 선보여 선풍적인 인기를 끈 미니와플메이커로 만들면 된다. 시판용 와플 믹스를 반죽해 메이커에 넣고 굽기만 하면 끝. 망고칵테일은 얼음을 가득 채운 유리잔에 망고주스+밀키스+버터플라이피차를 차례대로 섞으면 된다. 

어제 저녁부터 쌓여 있던 설거지를 후다닥 마친 김씨는 다시 침대에 누워 잠깐의 휴식을 취한 뒤 편안한 차림의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는다. 얼마 전 온라인에서 50% 세일을 해 새로 구입한 8부 레깅스가 딱 맞아 기분이 좋다. 

이것 외에도 김씨는 세 벌의 레깅스를 더 갖고 있다. 살짝 긴 티셔츠에 받쳐 입으면 외출복으로도 손색없다. 한국패션산업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레깅스를 포함한 '슬레저룩(‘애슬래틱(Atheletic)'과 '레저(Leisure)'의 합성어)' 시장 규모는 2009년 5000억 원 수준에서 2020년 3조 원대로 성장할 전망이다. 집에서 운동하는 '홈트족(홈트레이닝)'이 늘면서 러닝머신, 중량 조절형 덤벨, 요가 매트 등의 매출도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김씨는 반으로 접혀 있던 '워킹패드'를 하나로 편 뒤 그 위에 올라 걷기 시작한다. 워킹패드는 러닝머신보다 사이즈가 작고 무게(28kg)도 적게 나가 보관하기 편하다. 워킹패드 위에서 30분 정도 빠르게 걷기 운동을 마친 김씨는 이내 요가 매트를 펴고 유튜브 화면을 보며 스트레칭을 시작한다. 혼자 하는 운동이지만 김씨의 이마에는 어느덧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1인분 배달 가장 많은 날은 '일요일'

배달앱을 이용한 1인분 메뉴 주문은 일요일에 가장 많이 일어난다. [GettyImage]
오후 9시, 친구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김씨는 '홈에스테틱' 시간을 갖는다. 평일에는 시간에 쫓겨 못하는 것들이라, 일주일 중 이 시간이 가장 즐겁다. 비싼 돈 주고 고급 스파에 가지 않더라도 시판용 제품이 잘 나와 있어 집에서도 필링 및 마사지 등을 즐길 수 있다. 얼마 전 큰맘 먹고 구입한 '셀프 뷰티 디바이스'는 미세전류가 피부 깊숙이 전도돼 피부 탄력과 모공 축소 개선에 도움을 주는 제품이다. 

"이때 향초를 켜주면 피로는 물론 스트레스까지 해소되는 기분이 들어요. 그을음이 적게 나오는 천연 왁스와 심지로 만든 파우더리향 캔들을 가장 좋아해요." 

일요일은 김씨가 본격적으로 취미 활동을 하는 날이다. 손으로 만드는 걸 좋아하는 김씨는 요즘 서양자수의 매력에 푹 빠져 있다. 색색의 실로 꽃과 나비를 수놓으며 마음의 평정을 찾는다. 올 초 김씨가 정한 한 해 목표 중에는 '서양자수 강사 자격증 취득'도 포함돼 있다. 요즘 그는 스티치 도안을 자신만의 색감과 모양으로 창작하는 걸 연습하고 있다. 

"집에서 혼자 할 수 있는 취미라는 게 가장 매력적이에요. 손으로 뭔가 만들어내다 보면 복잡했던 머릿속이 깨끗이 비워지는 기분이에요.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자꾸 하다 보니 적성에 잘 맞고, 성취감과 해방감이 동시에 느껴져요." 

늦은 점심을 먹고 서양자수를 시작한 김씨는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이 돼서야 작업을 멈춘다. 한번 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라 고개 한번 쳐들지 않고 자수를 놓느라 목이 다 뻐근하다. 때마침 배에서도 꼬르륵 소리가 난다. 

일요일 저녁은 늘 그렇듯 배달 음식으로 해결한다. 요즘엔 배달 앱으로 유명 식당의 음식도 집에서 얼마든지 즐길 수 있다. 국내 한 배달 앱 통계에 따르면 '1인 메뉴' 주문이 가장 많은 날은 일요일이라고 한다. 김씨가 고른 저녁 메뉴는 얼큰한 낙지볶음.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식당이 있지만, 나가서 먹는 것보다 집에서 해결하는 게 편해 배달 앱을 실행한다. 

김씨와 같은 '혼밥'족이 늘면서 배달 앱을 통한 음식 배달이 날로 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9년 1분기 음식서비스 온라인 쇼핑 거래액은 1조9312억 원으로 전년 동기(1조358억 원) 대비 86.4%나 증가했다. 배달 앱으로 하루 2번, 1인 메뉴를 주문하는 사람 수 또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73% 증가했다. 

적당히 매콤한 양념에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운 김씨의 얼굴에는 '행복감'이 어려 있다. 혼자 먹고, 혼자 놀며 오롯이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느라 외로움이나 고독감 따위가 끼어들 틈이 없어 보인다. 

"집에서 혼자 있으면 심심하지 않으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건 놀 줄 모르는 사람들 얘기죠. 저는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가장 행복해요. 요즘은 혼자 사는 사람을 외롭다고 보지 않아요. 오히려 자유롭고 독립적이라며 부러워하죠. 주말 동안 에너지 비축을 잘 했으니 내일부터 다시 달려야죠."

김유림 기자 mupmup@do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