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스페인 갈래?’ 1년 만에 전화를 걸어 온 친구의 첫 마디였다. 순간 친구 목소리를 닮은 신종 보이스 피싱인가 하고 눈썹을 치켜 올렸다. 부산도 제주도도 아니고 스페인이라니. 우수사원으로 뽑혀 바르셀로나에 교육 겸 포상 휴가를 가게 됐단다. 멋진 호텔에 재워줄테니 따라만 오라고 유혹했다.
얼마 뒤 친구와 나는 거짓말처럼 바르셀로나의 번화가, 람블라스(Ramblas) 거리를 걷고 있었다. 『달과 6펜스』를 쓴 서머싯 모음이 '세계에서 가장 매력 있는 거리'라고 예찬한 람블라스 거리는 카탈루냐 광장에서 파우 광장까지 약 1㎞의 보행자 전용도로다. 가로수로 심어둔 플라타너스 사이로 거리를 활보하는 인파가 물결쳤고, 옆으로는 타파스 바, 카페 등이 즐비했다. 발걸음도 덩달아 경쾌해졌다.
마음 내키는 대로 여유롭게 안토니오 가우디(Antoni Gaudí, 1852~1926)의 건축을 돌아보는 것도 멋진 경험이었다. 유명한 건축물일수록 줄이 길다는 것만 빼고는 말이다. 파도치듯 구불구불한 외관이 파격적인 카사 밀라(Casa Milá) 앞에선 저 안에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궁금했고, 곳곳에 기발한 아이디어가 심겨 있는 카사 바트요(Casa Batlló)를 둘러보고 나선 천재 건축가의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흥분 됐다. 구엘 공원(Parque Güell)의 자유로운 곡선과 화려한 색채는 춤추듯 쏟아지는 바르셀로나의 햇살 아래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
그보다 더 흥미로운 곳은 시장이었다. 현지의 음식을 요것 저것 맛보기에 시장만큼 완벽한 곳은 없다는 핑계로 매일 보케리아 시장(Mercat de la Boqueria)을 들락거렸다. 보케리아 시장은 1836년에 문을 연 바르셀로나 대표 재래시장이다. 색색의 과일, 갓 짜낸 과일 주스, 하몽과 고기, 각종 향신료까지 좌판을 가득 메운 식자재만 봐도 눈이 즐거웠다. 점심에는 몇십 년째 같은 자리를 지켜온 터줏대감 피노초에 앉아 고추 볶음, 크로켓 같은 타파스를 맛봤다. 물론 맥주도 곁들였다. 밤에는 시장 깊숙한 곳의 해산물 전문점에 앉아 철판에 볶은 해산물과 에스트렐라 담(Estrella Damm) 맥주를 마셨다. 스페인으로 ‘별’이란 뜻의 에스텔라 담은 약 140년 역사를 자랑하는 바르셀로나 대표 맥주다.
중세의 흔적이 오롯한 고딕지구 탐방에 나섰다가 현지인들이 더 많이 찾는다는 산타 카테리나 시장도 들렀다. 멀리서 봐도 총천연색 타일로 만든 물결 모양 지붕이 눈이 확 띄었다. 알고 보니 원래 바르셀로나 최초로 지붕이 있는 시장인데, 2005년에 엔리크 미라예스라는 건축가의 디자인으로 재건축하며 더 유명해졌단다. 보케리아 시장보다 규모는 작아도 먹음직스런 식자재가 가득했다. 타파스가 맛있다는 카테리나 바는 분위기도 좋았다. 무엇보다 재래시장 안에도 산뜻한 바가 있다는 게 맘에 들었다. 그렇게 친구는 타파스, 나는 타파스에 어울리는 맥주 맛보기에 열을 올렸다. 스페인어로 ‘덮개’라는 뜻의 ‘타파(Tapa)'에서 유래한 타파스(Tapas)는 술잔 위에 얹어내는 간단한 안주에서 시작된 음식이다. 스페인에서는 하몽, 크로켓, 바게트 샌드위치 등 한 입 거리 요리를 다 타파스라 부른다.
하루는 친구가 학교에 수업을 들으러 간 사이 혼자 보른 지구를 산책하다 ‘엘 보른 씨씨(El Born Centre de Cultura)’란 건물을 발견했다. 딱 봐도 외관이 시장 같기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이게 웬걸 한가운데 고대 유적이 있는 게 아닌가. 원래 이 자리에는 보른 시장이 있었는데, 재개발 중에 로마 시대 유적을 발견해 바르셀로나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는 문화센터로 조성했단다. 그 곁엔 바르셀로나에 대한 책을 파는 서점과 또 다른 바르셀로나 대표 맥주, 모리츠(Moritz) 바가 있었다. 유적지와 서점과 맥주 바의 신선한 조합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서점에서 엽서 한 장 사 들고 바에 자리를 잡았다.
모리츠는 1856년 알자스 지방에서 이민 온 ‘모리츠 트라우만’이 설립한 맥주 브랜드로 바르셀로나에 양조장과 바를 두고 있다. 탭에서 갓 뽑아낸 생맥주는 은은한 레몬 향이 나면서도 는 순하고 산뜻했다. 맥주를 홀짝이며 엽서를 썼다. 우연히 시작된 여행에서 우연히 발견한 바에 앉아 마시는 시원한 맥주, 그리고 나를 스페인까지 견인해준 친구에게 쓰는 엽서 한 장. 이보다 좋은 결말은 없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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