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이명박·박근혜 정부 들어 급격 악화… 최순실 농단이 ‘기름 끼얹은 꼴’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실세’인 최순실씨의 국정농단 사태가 한국 사회에 준 충격은 상상 이상이다. 딸 정유라씨의 이화여대 입학 및 학점 의혹에서 시작된 파문은 정계와 재계, 스포츠, 문화예술, 관료사회까지 전방위로 확대시켰다. 4일 한국갤럽의 여론조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직무수행에 대한 지지율은 5%에 불과했다. 역대 최저인 외환위기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지지율(6%)보다 더 낮다. 세종시의 한 관료는 “대통령을 둘러싼 비선실세 논쟁이야 현 정부가 끝나면 어떤 식으로든 마무리가 되겠지만 정작 우려스러운 것은 한국 사회의 신뢰 추락”이라며 “무너진 시스템을 보완하고, 신뢰를 회복하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주간경향>이 분석해보니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지난 10년간 한국의 사회적 신뢰가 급격히 약화된 것으로 분석됐다. 정부 신뢰도 사회에 대한 신뢰도 동시에 추락했다. 또 언론과 종교에 대한 기대도 하락했다. 사회적 자본 상실은 국가경쟁력 하락으로도 이어졌다. 최순실씨 국정농단 사태는 신뢰 상실로 불난 한국 사회에 ‘기름을 끼얹은 꼴’이 될 가능성이 크다.
최순실씨 국정농단 사태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시민들이 11월 1일 서울 청계광장 근처에 모여 촛불집회를 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
정책결정의 투명성, 34위서 115위로
세계경제포럼(WEF)의 국가경쟁력 분석을 보면 ‘정책 결정의 투명성’은 노무현 정부 마지막 해이던 2007년 34위에서 올해 115위까지 추락했다. 같은 기간 ‘공무원 의사결정의 편파성’은 15위에서 82위로 급락했다. ‘정부 지출의 낭비 여부’도 22위에서 70위로 폭락했다. 노무현 정부 때에 비해 현 정부의 정책 결정과 집행이 매우 불투명하고 일방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의미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의 경쟁력 평가 세부자료도 비슷했다. ‘정책 투명도’는 2007년 34위에서 올해 43위로 9계단 떨어졌다. 이는 2015년(40위)과 비교해도 3년 새 3계단이나 떨어진 것이다. ‘정부 정책의 시행’도 2007년 34위에서 2015년 46위, 올해 47위로 대폭 하락했다. ‘정부 정책의 적절성’(34위→45위→47위)도 비슷하게 떨어졌다. 관료화도 심해졌다. 2007년 38위에서 올해 47위로 악화됐다. 이명박 정부 때는 4대강과 자원외교 논란이 있었고, 박근혜 정부 때는 실체 없는 창조경제가 논란이 됐다. 보수정권 10년을 지나면서 국가 공공조직에 대한 신뢰가 총체적으로 악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청렴성도 개선되지 않았다. WEF의 국가경쟁력 세부지표에서 ‘비정상적인 지급 및 뇌물’은 2010년 51위에서 올해 52위로 한 단계 떨어졌다. ‘공공자금 전용’은 26위에서 66위로 떨어진 뒤 69위까지 밀려났다. IMD도 ‘뇌물과 부정’이 같은 기간 2007년 32위에서 34위로 두 계단 떨어졌다고 밝혔다.
정치에 대한 불신은 커졌다. ‘정치적 불안정 리스크’(IMD 조사)는 35위에서 지난해 43위를 거쳐 올해는 50위까지 추락했다. ‘정치인에 대한 공공의 신뢰’(WEF 조사)는 22위에서 지난해 94위를 거쳐 올해 96위까지 떨어졌다. 정치는 불신을 넘어 혐오로 이어지고 있다.
경찰 등 공권력과 사법부도 국민 신뢰를 잃고 있었다. WEF는 ‘사법부 독립성’은 2007년 35위에서 지난해 69위로, 올해는 72위로 떨어졌다고 밝혔다. 노무현 정부 때에 비해 박근혜 정부의 사법부가 독립적이지 않다는 의미다. ‘경찰서비스에 대한 신뢰성’도 2007년 27위에서 올해 41위로 나빠졌다. 각종 시위에 강경대응을 하고, 쌀값 하락을 항의시위하던 고 백남기 농민에게 물대포를 직사해 사망케 하는 등 공권력 남용을 일삼은 데 대한 불신이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정부지출의 낭비도 22위에서 70위로
문제는 공공과 정치에 대한 신뢰 상실이 사회 전체 정의와 공동체 신뢰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이다. IMD 조사에서 ‘정의’는 2007년 30위에서 지난해 38위, 올해는 43위로, ‘사회적 유대’는 25위에서 43위로 각각 떨어졌다. ‘경제정의’를 의미하는 경쟁법 유효성은 2007년과 같은 41위로 변함이 없었다. ‘경제민주화’가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한국 사회의 낮은 신뢰도는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더 도드라져 보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료를 보면 한국의 정부에 대한 신뢰는 28%로, OECD 평균(42%)보다 크게 낮다. 타인에 대한 신뢰도 27%로, OECD 평균(36%)에 미치지 못한다.
이 같은 낮은 신뢰도는 한국 사회가 총체적인 불신사회로 들어간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낳고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이 지난 8월 23일부터 9월2일까지 1009명에 대해 유선전화로 물어본 설문조사를 보면 ‘처음 만난 사람’에 대한 신뢰도는 10점 만점에 4.0점에 그쳤다. 이웃에 대한 신뢰도도 6.2점에 불과했다. 공동체에 대한 신뢰가 그다지 높지 않다는 의미다. 학계(4.9점)와 언론(4.0점)에 대한 신뢰도도 낮았다. 법조계(3.6점), 재벌대기업(3.5점)은 더 낮았다. 신뢰가 가장 낮은 집단은 정부(3.5점)와 정치권(2.8점)이었다. 그나마 이 조사는 최순실씨 국정농단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한 조사여서 지금은 더 낮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 사회 체제에 대한 평가도 인색했다. 민주주의 성숙도(6.2점)를 제외하고는 기회균등의 보장(4.0점), 소득분배 공정·형평성(3.6점), 공정한 경쟁 가능(3.5점) 모두 바닥권이었다. 가장 평가가 박했던 부문이 ‘능력에 따른 보상’으로 2.8점에 불과했다. 최순실씨가 딸 정유라씨를 이화여대에 특혜입학을 시키고, 자신이 다닌 헬스클럽의 30대 헬스트레이너를 청와대 고위공무원으로 발탁시켰다는 의혹에 대해 여론이 들끓은 이유가 설명이 되는 대목이다.
사회적 신뢰가 중요한 이유는 신뢰는 ‘사회적 자본’이기 때문이다. 선진국일수록 사회적 자본이 탄탄하다. 경제학도 과거 물적 자본과 인적 자본에서 사회적 자본으로 관심이 옮겨가고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사회 신뢰도가 높을수록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높은 모습을 보여서 경제성장에도 중요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박진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최근 한국 경제의 정체는 경제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신뢰 상실의 문제”라며 “권력기구 개혁과 모든 국민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엄정한 법 집행, 계층이동을 돕기 위한 소득격차 축소 등을 통해 사회적 자본을 확충하지 않으면 도약의 기회를 잡을 수 없다”고 말했다.
<박병률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mypark@kyung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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