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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하는 양반

천하한량 2016. 9. 21. 00:48
노동하는 양반
번역문
   근세에 모재 김안국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경기도 여주에서 살 적에 친히 나가서 곡식 수확하는 것을 감독하여 쌀 한 톨이라도 타작마당에 버리지 못하게 하면서 이르기를, “모두가 하늘이 내린 물건이다.”고 하였네. 율곡 이이 선생은 황해도 해주에 살면서 대장간을 일으켜 호미를 만들어 내다 팔아서 스스로 생활을 영위하였네. 그러나 이분들은 이것을 고상한 행위로 여긴 게 아니요, 의리상 당연히 해야 할 경우에는 대인(大人)들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했던 것이라네.
   그런데 지금은 세속의 폐단이 도도히 번져서 온 세상이 바람에 쓸리듯 하고 있네. 내가 일찍이 겪어본 일을 가지고 말하겠네. 어릴 때 고향에서 상을 치를 때의 일이네. 마을의 한 어른이 7세 된 종아이를 빌려다가 그를 데리고 밭으로 가는 게 아닌가. 어른은 쟁기를 들어서 아이에게 가리켜 보이면서 이리이리하라고 말해 주고는, 아이가 그대로 해내지 못하면 또 스스로 쟁기질을 하곤 하여, 종일토록 십수 차례나 이렇게 하는 동안에 밭은 이미 다 갈아졌네. 그러니 어른의 뜻은 겉으로 종아이를 가르친다는 명분을 핑계 삼아 몸소 밭을 가는 수치스러움을 가리고자 했던 것일 뿐이네.
원문
近世慕齋先生廢居驪州, 親往監穫, 不使一粒遺棄塲中曰,“盡天物也”. 栗谷先生居海州, 起冶造鋤, 賣以自資. 非敢以是爲高行也, 義所當爲, 大人不恥爲之. 今俗弊滔滔, 擧世靡然, 試以僕所經見者言之. 僕少也, 守喪居鄕. 見鄕丈借七歲奴, 率而往于田, 擧耒指兒曰, 如此如此. 兒不能則又自爲也. 終日如此者十數, 而田已闢矣. 其意外托敎奴之名, 欲掩躬耕之羞耳.

- 이항복(李恒福, 1556~1618), 『백사(白沙集)』 권2 「정자 최유해에게 보낸 편지[與崔正字有海書]」

해설
   낮에 일한 뒤 밤에 시간을 내 공부한다는 주경야독은 노동의 신성함과 공부의 열정을 함께 보여주는 사자성어다. 고대 중국의 성군으로 일컬어지는 순임금이 미천했을 적에 역산(歷山)에서 농사를 지었고, 춘추시대의 명재상으로 꼽히는 관중이 등용되기 전에 장사를 하였다는 이야기는 주경야독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주경야독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노동계층은 육체적 피로와 생계에 쫓기면서 독서할 여력을 갖지 못하고, 공부를 업으로 삼는 계층은 육체를 수고롭게 하는 생산 활동에 쉽사리 뛰어들려 하지 않는다. 조선 시대만 하더라도 독서를 위주로 하는 사대부 계층은 대부분 생업에 종사하지 않았다. 양반이나 사대부도 폐족이 됐거나 몰락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생업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기록으로 남긴 일은 극히 드물다. 백사 이항복이 채록한 모재 김안국과 율곡 이이의 사례는 매우 드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모재집』이나 『율곡전서』에 이러한 기록은 없다. 오죽했으면 손수 밭을 갈아야만 하는 양반이 자신의 노동하는 모습을 숨기기 위해 종에게 쟁기질을 가르치는 것으로 위장하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연출해야 했을까.

 

   조선시대의 양반이 자신의 노동 행위를 당당하게 언급한 사례는 조선 말기의 사상가 백운 심대윤(1806~1872)의 「치목반기(治木盤記)」 정도일 것이다. 이항복보다 한 세대 뒤의 학자인 잠곡 김육(1580∼1658)도 성균관 유생의 신분으로 경기도 가평 잠곡에 내려가 10년 동안이나 농사를 짓고 숯을 팔아 생계를 유지한 적이 있지만, 그의 문집 『잠곡유고』에서 잠곡 시절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사대부 계층이 생업에 종사했던 사례를 남기지 않은 것은 조선이 노동을 천시하는 신분제 사회이었고, 글을 중시하는 우문(右文) 정치를 표방했다는 사실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고 보여진다.

 

   이런 속에서 영의정을 역임한 문인 관료였던 백사 이항복이 노동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나선 일은 이채롭다. 백사는 “천한 자는 아무리 총명하고 특수하더라도 선비가 되지 못하고, 귀한 자는 아무리 둔하고 어리석더라도 농업이나 수공업에 종사하지 하지 않으려는 것이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며 당대에 놀고먹는 유식 계층(遊食階層)이 늘어나는 문제점을 지적했다. 또 “노는 것을 고상한 운치로 여기고, 부지런히 일하는 것을 비속한 것으로 여기는” 풍조를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중요한 점은 백사가 말로만 노동의 중요성을 역설하지 않고 스스로 노동을 통해 생계를 꾸리려 했다는 사실이다. 「최유해에게 보낸 편지」에는 1613년 백사가 인목대비 폐위에 반대하다 파직돼 한강 변의 독포(禿浦)라는 곳에 살 때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 곳(독포)의 땅은 낮고 습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쪽풀[藍]을 심기에 알맞으니, 염료를 채취하여 팔면 충분히 호구를 할 수 있겠다.”고 하였다. 옆에 한 무인(武人)이 있다가 깜짝 놀라며 말하기를,
“어찌 이런 잗다란 일을 한단 말입니까?” 하였다. 나는 처음에 그 사람의 생각이 이토록 심하게 잘못된 줄은 헤아리지 못하고서 응대하기를,
“이제 영화로운 봉록을 받을 수 없으니, 농사를 짓지 않고 무엇을 하겠는가?”
하니, 그 사람이 말하기를,
“어찌 계산(溪山)을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 애써 쪽풀을 심어 가꾸지 않더라도 사람은 절로 살아가는 이치가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내가 뜻을 굳게 지켜 굽히지 않았다.
[厥土低濕. 僕曰宜種大藍. 取染斥賣. 足以餬口. 傍有一武人愕然曰. 何爲此屑屑者耶. 僕初不料其迷謬若是其甚也. 應之曰. 旣辭榮祿. 不種田何爲. 其人曰. 豈可汚辱溪山. 微種藍之勤. 人自有生生之理. 僕持不回.]

   백사 이항복이 독포에서 쪽풀을 재배해 생계를 꾸렸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몇 달 뒤 백사가 거처를 불암산 밑의 노원으로 옮긴 것으로 봐서는 쪽풀을 재배하지는 못했던 같다. 그러나 위의 대화를 보면 관직에서 쫓겨난 백사가 자신의 노력으로 생계를 꾸리려 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때 백사의 나이는 58세. 파직됐다고는 하지만 오늘날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영의정까지 올랐던 백사가 마음만 먹으면 말년의 생을 도모하는 일은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설사 관직을 거치지 않았다 해도 무인의 말처럼 노동하지 않아도 ‘절로 살아가는 이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백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고대 중국의 사상가 순자는 “사, 농, 공, 상이라는 사민(四民)의 일에 종사하지 않는 자는 간민(姦民)이다.”라고 말했다. 사대부가 관직에서 물러나면 농업, 수공업, 상업에라도 종사해야 간사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백사 이항복은 높은 관직을 역임한 사대부일지라도 생산 노동을 긍정해야 하고, 부득이한 경우에는 노동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400년 전 ‘노동하는 양반’이 되어야 한다는 백사의 외침은 ‘노동’이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도 공명되는 바가 적지 않다.

조운찬
글쓴이조운찬
경향신문 후마니타스연구소장

- 경향신문 편집국 문화부장과 문화에디터, 베이징특파원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