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젓하게
잘 키운 아들과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것은 아들 가진 평범한 아버지들의 로망이다. 이 시를 지은 이규보도 그런 아버지였을 것이다. 다만
그의 아들은 생각보다 너무 일찍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이제 젖니가 났다고 한 걸 보면 아직 술잔을 쥘 힘도 없을 나이였을 테니 말이다.
이규보는 시에서, 벌써부터 술맛들인 아들의 장이 썩을까 봐 또 이름처럼 삼백 잔씩 마셔대다가 몸을 망칠까 봐 걱정한다. 진지한 듯하면서 어떻게
보면 장난스럽기도 한 묘한 작품이다.
사실 이 시는 이규보 자신과 아들에 대한 복합적인 심경을
담고 있다. 이규보는 어려서부터 시로 이름이 났다. 그러나 여러 차례 과거에 낙방했고, 급제한 후에도 무신정권 아래에서 제대로 된 관직을 얻지
못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몹시도 좋아했던 시와 술과 거문고를 즐기며 좌절과 가난을 달래는 것뿐이었다. 자신의 시에 대한 자부심이
컸기에 그만큼 좌절감도 컸다. 자연스레 술이 늘고 몸과 마음이 다 병들어갔다.
그러던 중에 아들이 태어났다. 이마가 잘생기고 총기가
넘치는 아들. 아이는 이규보가 중국의 위대한 시인들도 해내지 못했던, 삼백 개의 운자(韻字)가 들어간 시를 짓던 날 태어났다. 그래서 삼백이라는
아명을 지어주었다. 이 이름에는 이규보의 자부심과 아이에 대한 기대가 함께 담겨있었다. 다른 작품에서 말한 것처럼 그는 아이가 훌륭한 시인이
되어 가문을 일으켜 세우길 기대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걱정이 되기도 했다. 아이가 어른이 될 때쯤엔 세상이 달라져 있을까? 삼백운의 시를 지을
정도의 능력으로 높은 벼슬에 오르고 가문의 이름을 드높일 수 있을까? 혹시나 아비처럼 부질없는 재능을 끌어안고 또다시 좌절하고 마는 것은
아닐까? 아비처럼, 그리고 술 삼백 잔을 마셔버리자던 이태백처럼 늘 술에 취한 채로 미치광이 소리를 들으며 살아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
시에는 이러한 이규보의 자조와 기대와 걱정이 혼재되어 있다.
삼백이라는 아이가 훗날 어떻게 됐는지는 말하기 어렵다.
삼백이 첫째 아들인지 둘째 아들인지 확실치 않기 때문이다. 첫째 아들 관은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고, 둘째 아들 함은 제법 높은 벼슬에
올랐지만 아버지처럼 시로 명성을 떨치지는 못했다. 어느 쪽이든 아버지 이규보의 기대와 걱정은 모두 빗나갔다. 아들 가진 평범한 아버지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