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산자료실 ▒

김정복 목사

천하한량 2016. 9. 16. 01:24

이미지: 사람 1명

김정복 목사

출 생 일 : 1882. 07. 24 순 교 일 : 1950. 09. 30 교단 : 장로교


한영서원 수학
평양신학교 졸업
성내교회, 삼양교회, 벌교읍교회
고흥읍교회, 길두교회, 소록도교회
순천노회장 역임


김정복 목사는 1882. 7. 24 충남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 306번지 부 金性五와 모 李敬淑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1905. 7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로 이주, 마우리섬 하나(Hana)농장에서 근무하다가 1907년 부활절 세례를 받았다. 1908년 12월, 귀국하여 종지리교회에 출석 집사가 되고, 1909. 3월 한영서원에서 수학하고 1915. 3월 평샹신학교에 입학하여 1923. 12. 19 평양신학교 제17회로 졸업하였다. 1924년 2월 20일 전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1924년 2월부터 제주 성내교회와 삼양교회 목사로 시무했다. 
1926년 순천노회 벌교읍교회를 중심으로 지방교회 시무하며 고흥읍교회와 길두교회에 시무하며 1930. 6. 2일 순천노회장으로 피선되어 1937. 3. 3 길두교회 사임하고 1938. 4. 25일 순천노회 제22회 노회(구례읍교회)에서 신사참배 결의했으나 신사참배를 거부한 김 목사는 1940. 9. 20일 고흥경찰서에 구속 당하였다. 잠시 석방되었다가 두 달후 다시 구속당하고 순천경찰서를 거쳐 1941년 광주형무소에 수감 3개월동안 옥고와 고문을 당하며 1942. 9. 30 광주지방법원에서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1년 징역 언도를 받고 1943년에 3년 6개월의 형을 받고 감옥생활을 한다. 


1945년 해방으로 출옥하여 1946. 4월에 소록도교회를 재건하고 15명의 장로들이 각자 지교회를 돌보면서 소록도 전체를 돌보는 사명을 감당하였다. 김정복 목사는 각 교회 지당회를 조직, 연합예배당을 건립 하는 등 조국통일과 동족구원을 위해 매일 정오에 기도하였다. 교회는 날마다 부흥되고 은혜가 충만했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새벽, 이북공산군이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7월 30일에 인민군 40여명이 소록도까지 침입하여 56일간 공산정권하에 있게 되었다. 병원 내에는 인민위원회, 청년동맹위원회가 조직되고 추종자들과 불신자들이 규합하여 교회를 탄압하기 시작했고, 세례교인들을 강제 이동시켜 교회간판을 내리고 인민공화국 간판을 달고 찬송과 기도를 중지시키는 등, 인민공화국 노래를 가르치게 되었다. 


김정복 목사는 모든 활동을 중지당했다. 교인들은 잠시라도 피신하시라고 눈물로 청원했으나, 목사님은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연약한 양떼를 버릴 수가 없노라"고 거절하시고 "내 늙은 목숨 살자고 도망갈 수 없다"시며 평소에 늘 기도하시던 굴날뿌리동굴에서 금식하며 기도하시다가 평소 그 사실을 알고 있던 원생 청년들의 밀고에 의해 체포되어 강제로 고흥 정치보위부로 끌려가셨으니 그 날이 1950년 8월 28일 이었다. 끌려가는 목사님을 울부짖으며 땅을 치며 통곡하는 성도들을 몇 번이나 뒤돌아 보시며 "사랑하는 소록도 성도들아 신앙절개 굳게 지켜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 하나님이 위로해 주실 것이니 안심하라"하시며 손을 흔들고 가신 길이 소록도 마지막 이별의 길이었다. 


김 목사는 그렇게도 사랑하며 따뜻한 품으로 안아주던 소록도 성도들을 다시 한번 만나보지 못하고 순교의 제단위에 붉은 피를 뿌리며 그 분이 늘 즐겨 노래하던 천국을 향하여 떠나가시니 향년 69세요 그 날이 1950년 9월 30일이었다. 1951년 1월 23일 고대작 목사가 부임하여 3월 3일에 중앙예배당에서 김정복 목사의 순교 초도 예배를 드려, 4천여 성도가 눈물 흘리며 애도했고 김정복 목사의 순교신앙을 계승할 것을 다짐하고 다짐했다. 1977년 9월 30일 27년만에 김두영 목사에 의해 김정복 목사 순교기념비를 중앙예배당 앞 뜰에 세워 그 높은 순교신앙을 영원토록 기리며 계승하고자 하여 그 비문에 "샛별"이란 제목의 시문을 기록했다. 


출처 http://kcmma.org/board/bbs/board.ph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