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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스페인대사관 박희권 대사 기고 "카나리아 군도 한인 진출 50주년을 기리며"

천하한량 2016. 7. 1. 13:46



▲ 테네리페에 있는 한국선원위령탑에 헌화하는 박희권 대사(2015년 12월 18일)

[기고] 카나리아 군도 한인 진출 50주년을 기리며

1492년 8월 3일 새벽, 스페인 왕실의 지원을 받은 콜럼버스가 세 척의 배를 이끌고 이베리아 반도를 떠났다. 콜럼버스가 먼저 기항한 곳은 바로 카나리아 군도. 이곳에서 배를 정비하고 필요한 보급품을 공급받았으며 앞으로 있을 대항해의 최종 계획을 점검한 후, 9월 6일 미지의 땅을 향해 본격적인 닻을 올렸다. 유럽에서 다른 대륙으로 항해하기 위해서는 대서양의 관문인 카나리아 군도를 전진기지로 활용해야 한다는 것을 콜럼버스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흘러 1966년 9월 어느 날. 250톤급 원양어선인 제1태평양호에 탄 40명의 우리 선원이 카나리아 군도의 테네리페 섬에 도착했다. 어업 전진기지로서 카나리아 군도에 한국 어선이 첫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50년이 흘렀다.
 
50년 전 한국은 매우 가난하였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를 외치며 나라 전체가 몸부림치던 시절이었다. 당시 우리 선배들은 생존을 위해, 가족을 위해 해외로 나가야 했다. 달러를 벌어 국내에 있는 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해외에 간호사나 광부로 나갔다. 이때 대서양 어장을 개척하여 가족과 조국에 더 나은 미래를 안겨주겠다는 일념으로 도착한 곳이 바로 카나리아 군도였다.

지금은 원양어업이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미미하다. 그러나 제조업이 전무하다시피 하던 60년대에 원양어업은 외화를 벌어들이는 주요수단이었다. 그 중에서도 카나리아 군도가 원양어업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매우 크다. 
 
한국원양산업협회 자료에 따르면, 카나리아 군도 진출 첫해 대서양 선단 8척이 벌어들인 수출액은 252만 달러로 당시 한국 전체 수출액의 1%를 차지했다. 이후 20년간 카나리아에서 벌어들인 외화가 8억 7,000만 달러에 달했다. 이는 파독 광부와 간호사 2만여 명이 15년 동안 고국에 송금한 액수와 비슷하다.
 
카나리아 군도에서의 원양산업이 호황을 누리면서 카나리아 군도의 한인사회도 발전하였다. 1970년대 후반에는 원양어선이 250척, 선원이 8천여 명에 달했고 한인사회 동포 수는 1만 1천명을 넘었다.
 
주요 도서지역인 라스팔마스, 테네리페, 란사로테에 한인회가 구성되었고 한글학교가 문을 열었다. 카나리아 군도의 한인사회는 문화 활동, 사회봉사 활동을 통해 스페인 주류사회와의 유대를 공고히 하였고 그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듯이, 이러한 눈부신 성과는 수많은 원양선원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우리의 원양선원들은 망망대해에서 높은 파고(波高)를 넘어 죽음과 사투를 벌이며 고기를 잡았다. 거칠고 험한 바다에서 조업 중에 숨진 원양선원들은 조국의 땅에 묻히지도 못했다. 라스팔마스 시내 외곽의 '산 나자로' 시립묘지에는 이곳에서 순직한 한국인 선원묘지가 있다.
 
2002년 한인회가 여러 곳에 분산, 안장되어 분실 우려와 관리 문제를 안고 있었던 선원 묘지를 정비해 선원 납골당에 안치하였다. 한편, 테네리페에서는 신현승 전 테네리페 한인회장이 1999년 사재를 들여 한국선원 위령탑을 세웠다. 2015년 해양수산부의 ‘해외 어선원 유해 국내이장사업’의 일환으로 유해 4기가 고국으로 돌아가 가족의 품에 안기면서, 국내에서도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역군이었던 원양 어선원들의 역할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만물은 유전(流轉)한다고 했던가. 1980년대부터 우리의 원양어업에는 적신호가 커졌다.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1982년 유엔해양법협약의 발효였다. 유엔해양법협약에 따라 연안국은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에서 주권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어장이 축소되고 조업료도 급증하였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EU와 환경단체들의 원양어선에 대한 국제 조업감시 시스템이 작동되면서 대서양 원양산업은 쇠락의 길로 들어섰다. 한인사회 동포 수도 800 여 명으로 줄어들고 한국식당, 부식 가게들도 대부분 문을 닫았다. 해마다 고국으로 돌아가는 동포들이 늘어나자, 카나리아 한인사회도 원양어업과 같은 운명에 처한 것이 아닌가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카나리아 군도에 거주하는 동포사회는 특유의 자생력으로 어려운 시기를 헤쳐 나가고 있다. 카나리아 군도에는 세계 각국의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데, 우리 한인사회만큼 현지사회와 활발한 교류를 하며 조화롭게 어울리는 이민사회를 찾아볼 수가 없다.
 
여기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동포 2세들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과 자부심을 가지고 우리의 전통과 풍습을 잘 지켜내면서도 현지문화에도 완벽히 적응했다. 글로벌 시대의 키워드인 문화적 다양성으로 무장한 미래의 리더로서 한국, 스페인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활약하고 있다.
 
2013년에 라스팔마스대학에 개설된 세종학당에는 수십 명의 현지인 학생이 공부하며, 학생교류협력 프로그램을 통해 해마다 많은 학생이 한국과 라스팔마스를 오가며 공부하고 있다. 같은 해에 한-스페인 해양수산연구협력센터도 개소하여 해양플랜트, 수산양식, 해운 항만 분야 등에서 산·관·학 협력시스템을 구축하며 새로운 발전모델을 찾는 중이다. 또한, 카나리아군도의 태양광 및 수풍력 발전, 수소에너지 등 재생에너지 관련 사업도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할 분야이다.
 
“땅 끝 망망대해 푸른 파도 속에 자취없이 사라져 갔지만 우리는 그들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라스팔마스 선원묘지에 있는 박목월 시인의 추모시의 일부이다. 카나리아 군도 한인 진출 5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의 선배들이 카나리아 군도에서 갖은 역경과 시련을 극복하고 새로운 지평을 열었음을 기억하고, 반세기 동안 다져 놓은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우리 동포사회가 제2의 도약을 이룰 수 있도록 대사관과 한인동포사회는 노력을 경주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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