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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들의 이야기-박철희 편] '태권도 나의 길'(1부)

천하한량 2014. 8. 19. 00:26

[원로들의 이야기-박철희 편] '태권도 나의 길'(1부)
<정리 = 허인욱 무술전문위원>  (2010-01-14 오후 5:31) ㅣ 추천수:66 ㅣ 인쇄수:84

이 글은 사운당 박철희 선생이 2005년 구술한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관을 중심으로 살펴본 태권도 형성사(2008)'에 수록하였다. 이후 빠진 부분들을 여러 차례 만남을 통해 조금 더 보완하였다. 이 글 또한 가능한 한 구술자의 말을 그대로 옮기려고 했으며, 기존 주장 혹은 사실과 다른 점에 대해서는 「정리자 주」로 보완하였다(정리자 주 : 박철희는 1933년 생으로 YMCA권법부에서 권법을 수련하였으며, 6․25 이후에는 강덕원을 창설하였다. 육군사관학교 태권도 교관, 경무대 무도 사범, 대한태수도협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파사권법'이 있다.)

스승 윤병인 선생

저는 1933년 1월 15일에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창신국민(초등)학교와 당시 6년제였던 경복중학교를 1950년에, 경희대학교 체육학과를 1958년에 졸업하였고, 1962년에는 고려대 대학원(국제정치)에서 2년간의 연수를 마쳤습니다.

제가 처음 태권도(跆拳道)를 접한 것은 경복중학교 때로, 15살의 어린 나이였습니다. 당시 제게 태권도(당시에는 내가 수련을 한 YMCA권법부에서는 권법(拳法)이라고 했다)를 가르쳐주신 분은 윤병인(尹炳仁) 선생님이었습니다. 그 분의 고향은 함경북도 북청입니다. 내가 너무 어려서 선생님에게 감히 연세를 직접 여쭙지 못한 탓에 정확히 언제 태어나셨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여러 정황들을 종합하여 1914년 아니면, 1915년 생으로 생각됩니다. 광복 후에 28세 혹은 29세 정도의 젊은 나이셨고, 고향 후배인 국제태권도연맹을 이끌었던 최홍희(崔泓熙)씨보다 세 네 살이 많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정리자 주 : 이 부분은 박철희 선생의 기억과 다른 기록으로 차이를 보인다. 최홍희는 1918년 생이고, 윤병인은 1920년 생이기 때문이다. 또한 윤병인이 태어난 곳은 만주 장춘이어서 최홍희가 고향후배라는 것도 맞지 않다. 다만, 이들의 서열문제는 일본 유학 중에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무예실력이 높았던 윤병인이 어른 대접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 윤병인(아랫줄 가운데) 관장이 1946년 난지도에서 제자들과 합숙훈련을 하고 있다.

윤병인 선생은 천상 무인이셨습니다. 무예밖에 모르는 정통 무도인이셨죠. 키는 보통이었지만, 무예로 단련된 몸에서는 혈기가 넘쳐 났습니다. 윤 선생님은 제자들에게 무예 수련을 할 때 어떤 명칭이나 동작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별로 하지 않으셨어요. 글이나 말보다는 몸을 움직여 직접 수련하는 것을 좋아하셨죠. 또 멋을 부릴 줄 몰라 신발도 미국 군화를 신고 다녔습니다. 가방은 갈색가방, 일명 ‘채권장수 가방’을 가지고 다니셨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선생님은 수련하실 때 흰 목장갑을 끼시곤 하셨는데, 한쪽 손가락이 온전치 않았기 때문이다. 일설에는 청량리에서 불량배들과 다툼 중 칼을 막다가 손가락이 잘렸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선생은 10대 시절, 그러니까 1930년대에 만주(滿洲)에서 무예를 익히셨습니다. 당시 만주에서는 무예를 배우기가 요즘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처음엔 가르쳐주지 않아서 마당을 매일 쓸어 주는 등 성의를 보였다고 합니다. 교습비도 다른 사람의 2배를 내며 무예를 배웠습니다. 그러나 선생은 당시 어떻게 무예를 배웠는지 또 누구에게 무예를 배웠는지에 대해서는 제자들에게도 잘 말을 하지 않아 정확한 상황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현재 윤 선생님이 전수한 형(型․품새)들을 보면 지금 중국의 동북 삼성(만주일대)에서 전해지고 있는 무술과는 별개의 무예를 다양하게 익혔을 것임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그 후 만주에서 일본에 건너간 선생은 니혼[日本]대학에 다니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 때 우연히 ‘수도관(修道館) 카라테’의 개조로 불리는 ‘도야마 간켄(遠山寬賢)’선생과 만나게 되었죠. 당시 간켄 선생도 윤 선생의 무예 실력을 인정해 서로의 무예를 바꾸어 배웠다고 합니다. 물론 이는 스승과 제자로서가 관계가 아니라 무인과 무인 사이에 이루어진 대등한 교류 차원이었습니다. 도야마 선생의 나이가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교류가 이루어졌던 데에는 도야마 선생의 인격이 훌륭한 점도 작용을 했겠지만 윤 선생님의 탁월한 무술 실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윤 선생님이 도야마 선생과 만나게 된 데에는 약간의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추측에는 일본인 학생들이 윤 선생에게 시비를 걸었다가 혼줄이 났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도야마 선생이 윤 선생을 찾아와 대면하게 되었고, 윤 선생의 무예 실력을 인정하고 교류를 하게 된 것이죠. 도야마 선생은 그 자리에서 윤 선생에게 4단을 인정해 주었다고 합니다(정리자 주 : 도야마 간켄이 저술한 '공수도대보감(학서방, 1963)'에는 5단 이상 고단자에 윤병인의 이름이 올라 있다). 그 후 윤 선생님은 일본대학 카라테부의 사범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시중의 태권도 역사를 서술한 책들을 보면 일본인을 제치고 카라테부 주장을 맡았다고 하고 있는데, 이는 뭔가 잘못 알려진 것입니다. 윤 선생은 주장이 아닌 학생들을 지도하는 사범이었기 때문이다. 부원들을 관리하는 주장과 지도하는 사범과는 분명 다른 것이었으므로 이에 바로 잡아야 합니다. 당시 가라테부 주장은 ‘긴조 히로시[金城 裕]’였습니다.

해방 후 선생은 경성농업학교에서 체육교사로 재직하면서 당신이 배운 무예를 학생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이후 직장을 경동중학교로 옮기셨는데, 이 당시 세계태권도연맹 회장을 맡아 태권도를 세계화시키고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되게 만드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김운용(金雲龍) 씨도 이 학교에서 권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경동중학교에서 건국대학교(당시 낙원동 소재) 학생과장으로, 다시 성균관대학교 학생부 처장으로 교직원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1946년 서울 종로에 있던 YMCA에 권법부(拳法部)를 설치하면서 본격적으로 무예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윤 선생님은 조선연무관(朝鮮硏武館) 권법부에서 전상섭(田祥燮) 선생과 같이 사범으로 계셨습니다. 그러다가 내 친구인 백상기의 형님이신 백용기 씨가 주선해서 YMCA에 권법부를 두게 된 것이다.

YMCA 권법부는 창무관(彰武館)과 강덕원의 파생관을 만들어내는데, 창무관은 윤병인 선생이 개인적으로 사용하던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루는 사범실 앞에서 운동하고 있는데, 윤 선생님이 어느 분이랑 지나가면서 ‘빛날 창(彰)’자 창자가 좋지라고 하면서, ‘호반 무(武)’자를 쓰는 창무관이 좋다고 하셨다. 이를 계기로 창무관이라는 명칭으로 단증을 발급하기도 했죠. 공개적으로 창무관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당시 도장이 YMCA 내에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원로들의 이야기-박철희 편] '태권도 나의 길'은 총 7회에 걸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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