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윤병인 선생. 태권도 5대 기간 도장의 하나인 YMCA권법부 창설자.
한국 태권도의 뿌리인 5개 도장(청도관, 송무관, 무덕관, 조선연무관, YMCA권법부) 중 창무관, 강덕원의 모체가 된 YMCA 권법부를 창설한 것이 윤병인 선생이다.
윤병인 선생은 만주 권법과 오키나와 가라데를 배웠고 1945년부터 1950년까지 서울 YMCA 권법부에서 권법과 가라데를 가르쳤다.
윤병인의 대표적인 제자로는 창무관의 이남석과 김순배, 강덕원의 박철희와 홍정표 등을 꼽을 수 있다. 국기원장과 세계태권도연맹 총재를 역임한 김운용도 윤병인의 제자라고 할 수 있다. 윤병인은 경동중학교에서 체육교사를 하며 학생들에게 권법을 가르쳤는데, 이 때 경동중학교를 다니던 김운용도 윤병인으로부터 권법을 배웠다.
윤병인 선생에 대해서는 비교적 알려진 것이 적다. 6.25때 납북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미국 휴스턴에 거주하고 있는 김병수 사범이 오랜 기간 윤병인 선생에 대한 연구와 취재를 통해 소중한 정보를 담은 내용을 자신의 홈페이지(www.kimsookarate.com)를 통해 공개했다. 김병수 사범은 강덕원 박철희, 홍정표 선생의 제자다.
윤병인 선생은 북한에서 어떤 활동을 했을까? 윤병인 선생이 배웠다는 만주 권법은 무엇일까? 윤병인 선생과 도야마 간켄과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여전히 연구해야 할 과제가 많지만, 기존에 알려진 윤병인 선생에 대한 정보 외에는 새로운 연구가 전무하다시피한 한국 태권도학계에 김병수 사범의 수년에 걸친 노력은 소중한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이에 김병수 사범의 허락을 얻어 윤병인 선생에 대한 글 전문을 번역하여 소개한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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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자들과 함께 한 윤병인 선생(왼쪽에서 3번째). 김순배(왼쪽 끝),홍정표(오른쪽 끝)선생이 보인다.
그랜드마스터 윤병인 - 김병수
<윤병인의 가족>
윤병인은 1920년 5월 18일 만주 봉천(현재의 요녕성, 역자 주) 무순(撫順)에서 사설 양조장을 운영하는 윤명근의 3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윤병인의 할아버지인 윤영현은 조선의 양반 출신이었다. 조선 말기에 윤영현은 경남 통영과 거제도에서 고을 수령을 지냈다.
1909년 제국주의 일본이 조선을 점령하자 윤영현은 고을 수령의 자리에서 쫓겨났다. 윤영현은 일제와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가족을 데리고 만주로 이주했다.
윤영현은 윤명근, 윤종근, 윤보근 세 아들을 두었다. 윤영현의 가족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나중에 장남인 윤명근이 양조장을 운영하면서 가족은 가난을 벗어나 살림이 윤택해졌다. 윤명근은 윤병두, 윤병인, 윤병권 세 아들을 두었다.
<윤병인의 유년시절과 교육>
윤병인은 신경소학교와 연변중학교를 다녔다. 소학교에 다니던 시절 윤병인은 몽골족 선생으로부터 권법(拳法)을 배웠다. 윤병인의 둘째 사촌인 윤병부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대부분의 권법 스승은 몽골에서 왔다고 한다. 윤병부는 윤병인에 대해 “매우 총명하고 진솔하며 침착하고 다른 사람을 잘 도왔다. 전형적인 무인이었다”고 표현했다.
윤병인은 그의 권법 수련을 중학교에서도 지속했다. 윤병부는 “윤병인은 매우 강했다. 싸워야 할 때가 있으면 상대를 심하게 다치게까지 하지 않았다. 상대의 행동을 제지할 수 있을 정도까지만 했다”고 덧붙였다.
윤병인은 비교적 평온한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오른손에 심각한 상처를 입어 고생했다. 어느 겨울날 윤병인은 동네에서 피워놓은 석탄불을 뛰어넘다가 불덩이를 향해 넘어졌다. 그는 넘어지기 직전 오른팔을 불덩이 쪽으로 뻗어 몸 전체가 화상을 입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당시에는 그 지역에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손가락의 절반을 잃어야 했다.
윤병인은 이 상처를 보이지 않기 위해 대중 앞에 서거나 무술 지도를 할 때 항상 하얀 장갑을 끼었다. 나중에 그의 제자들은 스승에 대한 존경을 표하기 위해 스승을 따라 하얀 장갑을 끼기도 했다.
1938년, 윤병인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족에 의해 일본 동경의 니혼(日本)대학교로 유학을 가게된다. 니혼대학교는 당시 명문이었고 이를 볼 때 윤병인은 학업 성적도 뛰어난 학생이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동양문화에서는 장남이 특별한 대우를 받으며 해외 유학도 장남이 가게 된다. 그러나 윤병인의 가족은 장남이 아나라 둘째인 윤병인을 선택했다. 윤병인은 그의 집안에서 일본 유학을 간 유일한 사람이다.
윤병인은 니혼대에서 1939년부터 1941년까지 농학(colonial agriculture)을 전공했다. 윤병인은 니혼대에 다니던 중 가라데의 명인인 도야마 간켄(遠山寬賢)을 흥미로운 사건으로 만나게 된다.
- ▲ 도야마 간켄. 도야마 간켄의 한국인 제자로는 윤병인을 비롯해 전상섭, 윤쾌병, 김기황 등이 있다.
도야마 간켄은 당시 니혼대의 교수이자 대학 가라데부의 스승이었다. 가라데부에는 한국인 유학생도 있었다. 이중 한 한국인 수련생이 여자 친구와 놀다가 가라데 수련을 빼먹게 되었다. 이에 같이 수련하던 일본인 수련생들은 이 한국인 수련생을 때리고 도장에서 쫓아냈다.
이 한국인 수련생은 윤병인이 권법을 수련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윤병인이 대학 정원에 있는 큰 나무를 때리면서 꾸준히 수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윤병인이 때렸던 나무는 점점 바닥쪽으로 기울어져 갈 정도였다.
이 한국인 수련생은 윤병인에게 가라데부 학생들로부터 자신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당신도 한국인이고 나도 한국인이다. 가라데부원들이 나를 때리지 않도록 도와달라.”
윤병인은 이를 수락했고, 한국인 수련생을 괴롭히려는 가라데부 학생들을 향해 자신의 권법을 가지고 행동에 나섰다. 윤병인은 가라데부 학생들과의 대결에서 능숙하게 그들의 공격을 피해 제압했다. 패배를 인정한 가라데부 학생들은 이 사실을 스승인 도야마 간켄에게 말했다.
다행히 넓은 아량을 가지고 있었던 도야마 간켄은 윤병인을 초대해 자신의 제자들을 물리친 기술들에 대해 말해달라고 요청했다.
윤병인은 만주에서 배운 권법을 도야마 간켄에게 설명했다. 도야마 간켄은 대만에서 7년간 중국 권법을 배운 적이 있었기 때문에 권법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도야마 간켄은 배움을 교류하기로 결정했다. 윤병인은 도야마 간켄에게 권법을 알려줬고, 도야마 간켄은 윤병인에게 슈토칸(修道館) 가라데를 가르쳤다.
나중에 윤병인은 니혼대 가라데부 사범이 되고 도야마 간켄으로부터 가라데 4단을 인정받는다. 당시 도야마 간켄은 가라데 5단이었는데, 이를 볼때 윤병인이 제자 중에서는 최고의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 ▲ 1948년 12월 21일 체신부권법부(창무관의 전신)제1회정기심사회에 참석한 윤병인(사진 아래줄 중앙) 선생. 그 오른쪽에 이남석 선생이 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한 후 한국에서 물러가자 윤병인은 한국으로 돌아온다. 윤병인의 가족은 당시 북한에 있었으나 남한에 정착하기로 결정한다. 윤병인의 형인 윤병두를 제외한 모든 가족은 월남한다. 윤병두는 병역 의무에 따라 북한군에 입대해 1946년부터 1950년까지 복무하게 된다.
윤병인은 서울 청량리 인근에 정착했다. 윤병인에게는 니혼대학 가라데부 시절부터 친했던 2명의 친구가 있었다. 전상섭과 윤쾌병이다. 전상섭은 조선연무관 가라데부의 사범이었다.
당시 조선연무관은 일본 유도의 본산 강도관(講道館)의 조선 대표 지부였다. ‘조용한 아침’이라는 의미의 ‘조선’은 당시 한국의 명칭이었다. 1945년 8월 15일 이후 북한은 ‘조선’을 그들의 나라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다. 한국(남한)은 1945년 8월 15일 38선이 그어지기 전까지 조선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연무관’이라는 것은 ‘무술연구학교’라는 뜻이다.
전상섭은 윤병인을 조선연무관에 초청해 권법과 가라데를 가르치도록 했다. 윤병인은 YMCA에 초청받아 갈 때까지 조선연무관에서 6개월 여간 가르쳤다.
1946년 경 발간된 도야마 간켄의 책에는 윤병인이 조선 YMCA의 책임지도사범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 책에는 윤쾌병이 한국 지도관의 책임 사범으로 표기되어 있다. 윤병인과 윤쾌병은 모두 4단으로 기록되어 있다.
윤병인은 YMCA를 비롯해 많은 곳에서 가르쳤다. 그는 성균관대학교, 경성농업학교 등에서 권법과 가라데를 가르쳤다. 윤병인은 한국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의 경호원으로 임명되기도 했으나 이를 거절했다.
거절한 이유 중 하나는 오른손을 들어 경례해야하는 군대식 경례법 때문이었다. 윤병인은 어렸을 때 입은 화상으로 오른손 손가락이 없었고 이를 부끄러워해 감추기를 원했다.
윤병인은 1949년 임승덕과 결혼했다. 윤병인의 아내는 곧 임신했고 1949년 12월 5일 딸 윤영숙을 낳았다. 불행히도 윤병인에게 딸을 볼 시간은 많지 않았다.
<6.25 전쟁>
1950년 6월 6.25전쟁이 발발했고 한국은 혼란에 빠졌다. 1950년 8월 윤병인의 형 윤병두가 북한 인민군 대위로 나타났다.
윤병두는 윤병인에게 “나는 네 형이니 너는 나와 함께 가야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윤병인은 북한으로 갔다.
1951년 7월 10일 북한과 UN간의 평화협정이 시작됐다. 같은 해 11월 25일 한반도는 38선을 기준으로 UN이 관리하는 남한과 소련이 관리하는 북한으로 나뉘게 됐다. 당시 윤병인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었다.
포로수용소에서 개인 면담을 통해 포로들에게 선택권이 주어졌다. 윤병인은 가족과 함께 남한에서 살기를 원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함께 포로수용소에 있던 인민군 포로들이 윤병인이 남한을 선택하는 것을 막았다.
- ▲ 1981년 환갑잔치에서 두번째 부인 림정숙 여사와 함께 한 윤병인 선생.
<1951년~1966년 알려지지 않은 활동>
1966년 1월부터 1967년 8월까지 윤병인은 북한 정부 체육위원회에 의해 격술(특수전투훈련)을 평양의 모란봉 체육특수부원들에게 지도하게 된다.
이 기간 중에 체육위원회는 윤병인에게 결혼을 권한다. 윤병인은 결혼해서 두 자녀를 얻었다. 딸(1966년 또는 67년생)과 아들 윤태원(1968년생)이다.
1967년 12월 북한 정부 산하의 국제체육회는 “격술은 국제스포츠가 아니다. 정부는 격술 프로그램을 취소하기로 했다”고 통보했다. 윤병인은 함경북도 청진의 시멘트 공장으로 보내졌다.
1969년 또는 1970년에 북한은 전 남한군 장성 출신인 최홍희의 ITF 태권도를 국가 무술로 받아들인다. 윤병인에 의해 훈련받은 격술 지도자들이 북한이 ITF를 받아들이고 활성화 하는데 이용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윤병인은 1983년 4월 3일 폐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시멘트 공장에서 일했다.
- ▲ 윤병인 선생의 사촌들을 만난 김병수 사범.(왼쪽부터 윤병부,김병수,윤병문)
<정보 출처>
- 윤병인 선생에 대한 정보는 2005년 10월 김병수 사범과 윤병인 선생의 조카인 윤대원씨와의 이메일을 통해 수집됐다. 윤병문(윤병인 선생의 사촌, 윤대원씨의 부친)씨와의 지속적인 연락을 통해 2005년 12월 18일 김병수 사범은 윤병인 선생의 가족과 만날 수 있었다.
윤병인 선생의 사촌이자 동갑으로 만주에서 윤 선생과 함께 자란 윤병부씨는 윤병인 선생의 유년 시절부터 1951년까지의 정보를 제공했다.
윤병부씨는 1974년 윤병인 선생이 자신의 친한 친구(선배)인 원일우 박사에게 보낸 편지를 공개했다. 편지가 쓰여질 당시 원일우 박사는 중국 길림성에 있는 연변 병원에서 기술책임자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 편지는 1966년부터 1974년까지의 윤병인 선생의 활동에 대한 요약된 정보를 제공한다.
1993년에 작고한 김기황 선생(미국 워싱턴 거주)은 일제시대 어렸을 때부터 니혼대학과 니혼대학 가라데부까지 윤병인 선생과 함께한 친구다. 김기황 선생은 김병수 사범에게 윤병인 선생의 대학 시절과 니혼대학에서의 훈련에 이르기까지 정보를 수 년간에 걸쳐 알려줬다.
윤병인 선생의 첫째 부인인 임승덕 여사는 경기도 일산에 거주하고 있다. 윤병인 선생과 임승덕 여사의 딸인 윤영숙씨는 인천의 한 병원 내과 의사다.
- 원문 필자 김병수 gmkimsoo@kimsookarate.com
- 원문 출저 http://kimsookarate.com
- 번역 편집 박성진 kaku61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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