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페인자료 ▒

구직포기한 스페인 젊은이들, 낮엔 시위 밤엔 노숙

천하한량 2012. 9. 28. 14:51

스페인 정부는 27일 공무원 임금동결과 소비세 인상 등을 골자로 내년도 긴축 예산안을 발표했다. 또 내년도 재정적자를 400억 유로(58조원) 줄이겠다고 발표했다. 산타마리아 부총리는 사회복지 예산을 집중적으로 줄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스페인 국민들은 이미 한계상황에 왔다며 정부의 긴축 정책에 강하게 저항하고 있다.

스페인 남동부 무르시아 출신의 세르히오(25)는 앞서 26일 마드리드국회의사당 주변에서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1만여명의 시위대는 이틀째 정부의 긴축예산안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의회를 포위하라'라는 구호가 적힌 세르히오의 가방에는 커다란 침낭이 들어 있었다. 그는 "여름엔 공원에서 잤는데 날씨가 추워져 걱정"이라고 했다.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한 그는 일자리를 찾아 두 달 전 마드리드로 왔다. "대학을 나와도 지방에서는 식당 종업원으로 취직하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하지만 마드리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청년실업률이 50%인 스페인에서 이런 젊은이들은 어디서나 만날 수 있다.

↑ [조선일보]이성훈 특파원

그 는 이날 낮에 음식점 할인 쿠폰 전단을 거리에서 돌린 후 시위대에 합세했다. 자신이 나눠준 쿠폰을 가진 사람이 음식점에 오면 손님 1인당 20센트를 받는다. 하루 벌이는 20유로(3만원)를 넘기 어렵다. 세르히오가 나온 지방 국립대의 1년 등록금은 6000유로(860만원). 하지만 그는 700유로(100만원)만 냈고, 나머지는 모두 지방정부가 부담했다. 스페인은 세금으로 세르히오 같은 학생을 공부시켰지만, 정작 졸업한 그들을 받아 줄 일자리는 만들지 못한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의 교육 복지였던 셈이다. 그의 고향 무르시아는 적자에 허덕이다 지난 7월 중앙정부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마드리드의 지하철역 디에고 드 레옹 근처에 있는 적십자사의 무료 식료품 배급소. 오후 6시가 지나자 10여명이 장바구니를 들고 줄을 섰다. 두 아이의 엄마인 에스터르 모리노(42)씨도 그 속에 있었다. 30분쯤 지나 문이 열리자 그는 파스타 면과 밀가루 한 봉지, 계란을 받고, 이름이 적힌 카드에 도장을 찍었다. 그는 "이곳에서 음식을 받아가는 것이 요즘 유일한 쇼핑"이라고 말했다.

모 리노씨는 지난해 초까지 법률회사 비서로 일했다. 하지만 경제 위기로 일감이 줄어든 회사가 인력을 감축하면서 회사를 나와야 했다. 현재 그의 유일한 수입은 한 달 510유로(73만원)의 실업수당이다. 스페인 정부가 복지수당 축소를 공언하면서 당장 내년부터 450유로(65만원)로 줄어든다. 실업수당 수급 기한이 끝나는 내년 5월부터는 이마저도 받을 수 없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4위의 경제 대국인 스페인은 2000년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국내총생산(GDP) 대비 공공부채 비율이 40% 초반으로 스웨덴보다 재정상황이 더 건전했다. 하지만 싼 이자로 돈을 빌려 부동산 붐을 일으키고, 공짜 복지의 세례에 흠뻑 젖으며 침몰했다. 지금은 의료와 교육, 주거 등 기본적인 생활기반이 무너지며 중산층이 붕괴하고 있다.

최근 동부 카탈루냐의 의사들이 빈 사무실을 빌려 수술 등 의료행위를 한 사실이 밝혀졌다. 의사들의 임금이 최근 30% 줄어들자, 이 수입을 보전하기 위해 불법 의료행위를 한 것이다. 이런 불법 의료 서비스라도 받을 수 있는 건 그나마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다. 의사들마저 구조조정의 대상이 되면서, 일반 환자들은 간단한 수술을 받기 위해서도 몇 달씩 기다려야 한다. 허울만 무료 의료이지, 병원 문턱을 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27일 밤 스페인 국민들은 또다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스페인은 당분간 분노한 민심 위에서 불안한 항해를 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