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은 1890 년경 <고종>과 <순종> ) 옆에 사진은 <경운궁>앞
지금의 시청광장 인것 같다 . 즉위식을 위해 만든 조형물)
고종황제 ( 高宗皇帝 ) 의 강제퇴위 와 7적 (七賊 )
< 1907 년 (광무 11년) 6월 > " 헤이그 밀사"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과 친일각료 와 경성신문 은 사실을 외곡
시키기에바뻤고 , <일본>의 문책성 책임론에 진땀을 흘린 친일각료 들은 <고종항제>에게 책임을 추궁하여
<1907년 7월 19일>에 강제 퇴위를 시키고 27대 순종( 純宗)황제 (皇帝)를 즉위 시킨후 ,
5일후 ( 7월 24일) 한일신협약( 韓日新協約)을 체결 한다 .
이때의 공로를 세운 7대신을 7적 ( 일곱 도둑) 이라 한다 . 그들은 총리대신 <이완용 > 내무대신 <임선준>
탁지부대신<고영희> 군부대신< 이병무> 법무대신 <조중응> 학부대신 <이재곤>
농상공부 대신 <송병준 >이다 .
순종(純宗) 즉위식 (卽位式)
광무 11년 ( 1907년 7월 20일 ) 오전 8시 경운궁 중화전 에서 양위식 ( 즉위식)이 거행 됐다 .
이날 양위식은 너무나 쓸쓸하고 구슬프게 진행 됐다 . 엄숙하고 장엄하며 성대한 <양위>가 아니라
전통을 깨뜨리는 각본대로 진행된 졸속적인 양위식 이 었다 . 고종황제 가 대례복을 갖춰입고 평어좌 에 앉자
총리대신 <이완용>이 탁자앞 에서 하례의 글을 낭독하고 전통연주가 시작된다 . <고종>은 대례복을 벗고
대원수 정복 으로 갈아 입은후 어좌에 앉을때 연주가 끝난다 . 이어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하례사 낭독이
있은후 외국영사관 총대표 의 하례사 낭독이 이어지고 총리대신 <이완용> 이 <황제>의 어좌앞에
서 북쪽을 바라보며 서자 , 애국가 연주가 울려 퍼진다 . 애국가 연주가 끝나자 , 이완용이 손을 머리에
모아 위로들어 만세삼창 을 하니 문무백관 도 일제히 만세를 외치며 하례를 마쳤다 ,
이어 내관이 <고종황제>를 대신하여 양위조칙을 봉독하고 <순종>을 대리하여 내관이 양위조칙을 받는다 .
지극히 간략한
식을 행했는데 문무백관 들은 일부러 머뭇거리며 입궐하여 겨우 내각대신 과 2 , 3 등 칙임관 (勅任官) 이 보였고 쓸슬한 광경
이 전대미문 (前代未聞)의 기이한 양위식 을 거행했다 . ( 이로써 광무라는 연호에서 융희 로 바뀐다 )
순종(純宗) 은 <고종> 과 < 명성황후> 사이에서 출생한 둘째 아들이다 . 첫째아들 은 항문이 없이 태어나 출생후 5일만에 죽었다 . 순종의 비(妃) 는 순명효 황후( 純明孝皇后) 민(閔)씨다 . 계비(繼妃)는 순정효황후 (純貞孝皇后) 윤(尹)씨 .
순종 의 즉위후 5일만에 <한일신협약>이 체결됨 에 따라 <일본인>의 <대한제국> 괸리임용 을 허용 했으며 , 8월 1일에는
일본의 압력과 친일파 들의 압박으로 < 군대 해산>을 했다 . 12월 에는 <황태자 유학>이란 명목으로 < 영친왕 (이은)>을
볼모 로 일본으로 끌고 갔다 . 1908년 < 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을 인가 하였고 , 일본 과 친일파 들은 국권탈취 공작 을
추진 , 군부 와 법무를 폐지하고 정치조직 을 통감부에 귀속 시켰다 . 1910 년 8월 16일 , < 이토 히로부미> 후임으로 온
데라우치 마사타게 ( 寺內正毅)가 총리대신 <이완용 >에게 비밀리에 합병조약안 을 제시하여 <어전회의>가 개최 됐는데,
이때 병풍뒤에 숨어 <어전회의>진행상황 을 지켜보던 순정효황후 윤씨는 <합병조약>에 날인 할것을 이완용, 송병준,등 친일파 들이 강요할때, 국새 (옥새)를 치마속에 감추고 내놓지 않자 , 백부 윤덕영( 尹德榮) 에게 빼앗겨 별수없이 순종이 날인케 됐다 . 이로인해 국권이 피탈 되었다 . 조선왕조 <27대> 519년 사직이 무너지고 <일본>의 지배하 에 들어 갔다 .
일본 은 순종을 창덕궁(昌德宮)에 머물게 하고 (비원) 이라 불렀으며 , 순종을 이왕 (李王)으로 <비하>시켜 불렀다 .
이 조약이 한일병합 (韓日倂合) 이다 .8개조로된 이 조약은 제 1 조 부터 " 대한제국 의 모든 통치권을 영구히 <일본> 에
양여 할것을 규정 하고 있다 . 일본은 서서히 옥죄며 친일파 를 이용해 아주 쉽게 국권을 찬탈 해 갔다 .
( 순종 즉위식 을 기념하기 위해 , 일본의 황태자가 <숭례문>을 통과 하는 <홍예문>으로 들어서는 것은 <조선왕>에게 절하러 가는 것을 의미 하므로 , 갈수없다 하여 < 숭례문>과 연결된 성벽을 허물고 , 앞에세운 <봉영>이라고 쓴 "아취"문 을 이용
해 허물은 성벽길 을 통해 <경운궁> 으로 들어 갔다 . 이것은 기승을 부렸던 <친일단체 일진회>의 작품이다 . 이후부터 <숭례문 좌우 에 성벽의 흔적이 없어지고 도로가 생겼다 . <홍예문>을 통과하던 <전차>길도 좌우로 갈라 졌다 .)
( 전차)를 이용한 축하 " 퍼레이드 " < 숭례문> 앞 , 경운궁 으로 향하는것 같다 .
( 1907 - 1910 년 경 <순종>의 모습 , 옆의 인물은 유명한 의친왕 이시다 . 항상 <일본>인들의 독살 위험속 에서
기개를 굽히지 않고 , 많은 후손을 남겨 <왕가>의 명맥을 유지 시키신 용감하시고 존경스러우며 자랑스런 어른이시다 . )
대표적 친일단체 일 진 회 ( 一 進 會 )
<러일전쟁> 전에 민영환 의 사랑채 에서 무의도식 하던 송병준 은 <러일전쟁>때 < 일본군 통역> 이 되어 (舊) 독립협회
의 윤시병( 尹始炳) 유학주 (兪鶴柱) 등이 1904 년 8월18일 <유신회 (維新會)>를 조직 하였다가 <일본의 고문(顧問)>
정치로 <대한제국>의 강력한 <친일적 민의 (民意)>를 강화 하기위해 8월 20일 < 일진회 (一進會)>로 고치고 회장 에
윤시병 ,부회장 에 유학주 ,를 추대하여 발족 하였다 . 이들은 4대강령 을 내세워 국정 의 개혁 을 요구 , 단발( 斷髮)과
양복 차림으로 부일 (附日) 의 결심을 나타내고 문명의 개화를 급격히 서둘렀다 . 동학당 (東學黨)의 배반자 <친일세력>
이용구(李容九)의 <진보회 (進步會)> 가 같은 해 12월 26일 에 <통합> 하므로서 <서울지방>에서만 기승을 떨던
<친일세력>이 전국 13개 도시에 널리 확대되어 < 13도 총 회장>에 이용구 , <평의원장>송병준 ( 宋秉畯)이 취임 ,
했다가 , 1905년 11월 에 회장 <이용구> 부회장 <윤시병> 지방총장 <송병준 >평의원장 <홍긍섭 (洪肯燮)> 을
선출하여 <일본인 고문> 모치츠키 류타로 (望龍太郞)와 함께 적극적 인 친일활동 을 전개 했다 .
1905 년 11월 17일 <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기 10일전 부터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김으로
<국가독립>을 유지 하고 복(福)을 누릴수 있다 " . 라고 선언 한후 , 국채보상운동 을 방해 , 훼방하고 .
1907 년 5월 2일에 정부 탄핵문제를 제출하여 " 정부를 맹공격 " 하며 1907 년 7월 18일 < 헤이그 밀사 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군대마져 해산 시켰다 . 이에 분노한 <의병>들은 <일진회>를 토살 (討殺)시키고
그 기관지 인 국민신보 를 습격 , 파괴 하였다 .
1909 년 <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 에게 암살 되자 , <일진회>는 복수라도 하듯 매국행위에 기승 을 부려
국권피탈안을 몇번씩 상주 하였다 . 이에 중추원장 <김윤식>등은 <이용구 , 송병준>등을 처형 하라고 정부에 건의
하였으나 기각되고 1910 년 8월22일 <한일병합> 이 체결 된후 9월26일 < 친일적 임무>를 성공적 으로 완수하고
해체 되어 각기 <일본>을 등에 업고 백성의 피를 빠는 흡혈귀 처럼 개인재산 축적에 혈안이 된후 해방을 맞아 다른얼굴
로 등장하며 , 그 후손들은 현재엔 <친일파>에서 보수라는 덧칠까지 하여 기형적 보수로 태어나 애국자 처럼
종횡무진 활동중 이다 .
( 1908 년 12월, <이용구>의 집에서 찍은 <일진회> 의 자경단 원호대 주구들 . 일본인 과 뒤 섞여 있다 . )
밑에는 통감 ( 이토 히로부미 ( 伊藤博文)>의 자문관 으로 내한 , <일진회> 고문으로 <한일병합>을 주도한 우찌다
( 內田良平) 와 다께다 (武田範之)오른쪽 은 친일괴수 이용구 (李容九) 나중에 손병희 와 대립각 을 세운다
옆에 사진은 서대문 에 있었던 <일진회 > 집회장 .위치로 봐서 서대문 어딧쯤 인지 가늠이 안선다 . 뒤에 보이는 산이
무슨 산 인지 ? 산 모양새 가 금화산 인것 같은데 ...맞는다면 , 천연동 일 것이다 .
( 우리민족 을 수탈하던 동양척식주식회사 을지로 입구에 있었다 , 옆의 건물은 우리민족을 압박하고 나라를 빼앗은 통감부
통감부 는 남산 기슭에 있었다 , )
( 우리민족 의 원흉 < 이토 히로부미>를 중국 하얼빈 역에서 사살한 안중근 의사 ( 安重根 義士 ) 옆에 사진은 갈롱 스런
이토 히로부미 가 한복을 입고 능청을 떨고 , 오른쪽은 을사5적 중 1인 인 이지용 .( 1906 - 1909 )
남산 왜성대 에 있던 통감관사 , 역대통감 들이 이집에서 살았고 1910 년 8월 22일 , <이완용> 과 <데라우찌 >가
조인한 합방조약 도 이집에서 은밀히 이루워 졌다 . <이완용>은 무슨생각 으로 이런 짓을 했을까 ? 데라우찌 <통감>은
부임 20여일 만인 8월 16일 , 데라우찌 , 이완용 , 조중응 (趙重應) 3자회담 자리에서 합병조약 안 과 합병각서 가
수결되었다 , 이틀후 8월18일 각의에 합병조약이 상정되고 4일후인 8월22일 에 조인 , 7일후인 8월29일 엔
나라를 잃도록 만든 장본인 들이다 .
통감 데라우찌 이완용 조중응
황태자 의 일본유학 이란 구실로 볼모 끌려가기전 , 일본 황태자 의 방문으로 찍은 기념사진 . 앞줄 우측 수염난
<이토 히로부미 , 중앙에 키작은 소년이 영친왕 .가운데 콧수염 이 일본 <황태자 >다 .
좌측 두번째 모자안쓴 이완용 .
고종황제 의 붕어 , 가운데 옅모습이 <순종 > 1919 년 1월 22일 . 온백성이 몰려와 통곡을 하였고 , 국장은 3월3일에 거행
됐다 . 그러나 분노한 국민들은 2일전 1919 년 3 월1일 < 기미 독립만세 운동>을 신호로 온국토가 나라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 독립항쟁사 >가 본격적 으로 시작 된다 .
( <친일단체> 일진회 와 싸우다 순직한 구연영 (具 然英)선생 . 전덕기 (全德基)선생과 함께 남대문 안 상동교회를
중심 으로 엪원 청년회 를 조직 , 청년운동 에 전력하고 을사조약 체결후 <일진회>를 각지에서 성토 , 그 죄상을 폭로
하다가 아들 구정서 (具禎書)와 함께 적의 흉탄에 순국 했다 . 옆의사진 은 26세 의 나이로 흉탄에 순국한 <구정서 열사 >
열사는 동대문 교회 전도사 로서 청년운동 을 전개하고 여주 와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키 기도 했다 . 자랑스런
기독교 인 이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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