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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품 못벗어난 재벌家딸 기업가정신 '실종'

천하한량 2011. 9. 5. 14:57

제빵·명품수입 등 그룹 특수관계 이용해 손쉬운 돈벌이

자영업·중소기업 영역침범.."재벌 정당성 스스로 해쳐"

(서울=연합뉴스) 기획취재팀 = 재벌가 딸들이 활발하게 경영에 나서고는 있으나 혁신과 도전의 기업가 정신은 찾아볼 수 없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사업상 위험을 무릅쓰고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 국내 경제의 활력을 불어넣기보다 그룹과 특수관계를 이용해 안정적으로 수익을 얻거나 로열티를 주고 외국의 고가·명품 브랜드를 국내에 들여오는 '손쉽고 우아한' 사업에만 발을 내민다는 것이다.

미국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는 '기업가'를 새로운 생산방법과 상품을 개발하는 기술혁신을 통해 창조적 파괴에 앞장서는 사람으로 봤다.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경제 5단체가 지난해 10월 연 '기업가 정신 주간' 행사에선 기업가 정신을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제약과 위험을 극복하고 기회를 포착해 혁신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가부장적인 관습 때문에 재벌가 딸들이 그룹의 주력사업을 상속하지 않는 현실과 만일 사업이 실패해도 든든한 집안 배경이 '안전망'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고려해볼 때 이들이 더 모험적이고 도전적인 기업가 정신을 발휘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얼마전부터 재벌가 딸들 간의 '빵 전쟁'이 관심을 끌고 있다.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장녀 부진(호텔신라 사장)씨와 롯데그룹 신영자 사장의 차녀 장선윤씨, 신세계그룹 이명희 회장의 딸 정유경씨가 제빵 사업에 잇따라 진출하면서다.

장선윤씨는 블리스라는 빵·와인 유통사를 차려 지난달 말 롯데백화점 영등포점에 '포숑'이라는 이름으로 첫 지점을 냈다. 블리스는 롯데백화점 12곳으로 지점망을 넓히기 위해 이달 초 내부 장식 공사를 마쳤다.

정유경씨는 조선호텔에서 물적 분리한 조선호텔베이커리의 지분 40%를 보유하고 있다. 조선호텔베이커리는 이마트, 신세계백화점 등 계열 유통사에 매장을 내고 빵과 피자를 판다.

이를 두고 경제평론가로도 유명한 '시골의사' 박경철씨는 트위터에 "재벌가 딸들이 특수관계에 있는 호텔과 마트에서 독점 사업으로 돈을 번다면 사업기회 유용이자, 주주에 대한 배임"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부진 사장은 홈플러스(81%)와 호텔신라(19%)가 합작한 아티제브랑제리 사업에 간여하는데 이곳에서 만든 빵은 홈플러스에 납품된다. 지난해 이 회사의 매출 966억원 중 937억원이 홈플러스와 거래에서 발생했다.

삼성가의 딸이 대표로 있는 회사가 대형마트와 손잡고 빵 사업에 가세하자 골목의 중소 빵집이 고사한다는 논란이 일었다.

재벌가 딸의 대학 전공이 주로 디자인 분야인 탓인지 해외 명품 사업은 이들의 활약이 두드러지는 분야다.

이건희 회장의 차녀 서현씨가 부사장으로 있는 제일모직은 해외 고급 패션브랜드 수입에 앞장서고 있다. 이세이미야케(일본), 10 꼬르소꼬모(이탈리아), 토리버치(미국), 꼼데가르송(프랑스), 띠어리(미국), 발렉스트라(이탈리아) 등이 제일모직에서 수입한 브랜드다.

제일모직은 2008년부터 외국 브랜드 수입사업을 본격화했다.

신세계그룹의 딸 정유경씨가 대표인 신세계인터내셔널도 조르지오 아르마니(이탈리아), 알렉산더왕(미국), 코치(미국), 센존(미국), 돌체앤가바나(이탈리아), 3.1필립림(미국) 등 해외 명품 수입사업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다.

범 삼성가의 사촌 간인 이들 딸이 서울 청담동에 경쟁적으로 수입 명품 매장을 내면서 '청담동 대전'이라는 말이 생기기도 했다.

루이뷔통을 공항면세점에 서로 유치하려고 이부진 사장과 롯데면세점 신영자 사장이 치열하게 겨룬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롯데가의 딸 장선윤씨가 시작한 포숑도 프랑스에서 수입한 고가의 제빵 브랜드다.

박경철씨는 "가령 삼성가의 딸들이 기업가로서 제대로 인정받으려면 무슨 명품 옷을 입었는지에 대한 보도가 아니라 그들이 경영하는 기업이 '여성 인력을 많이 고용한다', '모성보호 정책의 모범이다'라는 기사가 나와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재벌가 딸들이 해외 명품을 앞다퉈 수입하는 대신 자체 브랜드를 세계적으로 키운다면 비로소 여성 기업가로서 검증될 것"이라며 "이는 아직 부족한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가족 품'을 벗어나지 않고 수익이 보장된 사업을 영위하는 경우도 많다.

이서현씨가 부사장인 광고회사 제일기획은 작년 매출의 51.7%가 삼성전자 등 삼성그룹 계열사에서 나왔다.

이노션은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장녀 성이씨가 지분 40%를 가진 회사인데 현대차, 기아차, 현대모비스 등 그룹 계열사의 국내외 광고·행사 대행이 작년 매출의 47.7%를 차지했다.

이노션이 지난해 현대·기아차의 실적 호조와 맞물려 매출이 69.5%나 급증한 것은 이런 안정적인 사업 구조 때문이다.

현대캐피탈의 상용차 할부금융·리스 부문을 떼서 세운 현대커머셜은 정몽구 회장의 차녀 명이씨가 33.34%의 지분을 갖고 있다.

애초 이 회사의 주주였던 기아차와 위아의 지분을 오너의 딸에게 매각한 것이다.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 채이배 회계사는 보고서를 통해 "지분관계를 볼 때 현대자동차는 현대커머셜을 100% 자회사로 설립할 수 있었지만 안정적인 수입이 예상되는 사업기회를 근거 없이 그 가족에게 넘긴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한진그룹의 대한항공 기내지 광고와 면세품 인터넷 판매를 대행하는 싸이버스카이는 조양호 회장의 딸인 현아씨와 조에밀리리(한국명 조현민)씨가 각각 33.33%의 지분이 있다.

대한항공과 사업 연관성이 높아 '망할 염려'가 없는 회사인데 이런 자회사라면 대한항공이 지분을 보유하는 것이 대한항공 주주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신영자 사장과 세 딸이 지배주주인 시네마통상은 서울·수도권을 제외한 전국 롯데시네마 극장의 매점 사업권을 독점한다.

'조선호텔베이커리-이마트', '블리스-롯데백화점'의 특수관계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김상조 한성대 무역학과 교수는 "재벌에 대한 평가는 양면성이 있지만 1∼2세대는 적어도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 일자리를 만들고 국부를 늘린 긍정적 측면이 있다"며 "그러나 3∼4세로 넘어오면서 이런 위험을 감수하는 기업가 정신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선대가 진출했던 제조업이 레드오션이 됐다고 판단한 재벌 3∼4세가 초기 투자금의 부담이 크지 않고 계열사의 지원을 통해 높은 수익을 올리는 서비스업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많은 재벌가 딸들이) 계열사의 기회를 유용하거나 지원성 거래를 통해 안전하게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사업에만 관심을 갖고 있다"며 "빵 사업 같은 자영업과 중소기업의 영역까지 침범하는 것은 그렇지 않아도 편법상속이라는 비난을 받는 재벌의 정당성을 스스로 해치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비판에 대한 반론도 없는 건 아니다.

자유기업원 김정호 원장은 "회사 기회유용이나 배임 문제는 해당 회사의 주주면 몰라도 외부에서 언급할 사안은 아니다"라며 "영업기밀유지나 거래의 안정성 측면에서 보면 가족 간 사업이 꼭 나쁜 것이라고만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김 원장은 "자체 브랜드를 개발해 세계적으로 성장시키는 게 기업가 정신을 실현하는 최선의 길이지만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며 "삼성전자도 수십년이 걸려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한 만큼 재벌 딸들의 경영활동과 성과는 좀 더 지켜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 영상있음 >

hska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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