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의 무법자' 주폭
만취해서 마을 돌면서 욕하고 부수고 때리고…
문 열린 집 들어가 남의 머리카락 자르고
동사무소 민원대에 죽은 쥐 올려 놓기도
경찰이 올해 초부터 '주폭(酒暴)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주폭은 술에 취해 상습적으로 남을 폭행하거나 업무를 방해하는 주취폭력자의 줄인 말. 예전엔 '술 취했다'는 이유로 묵인하거나 가볍게 처벌했지만 지금은 통하지 않는다. 법원도 '주폭'에 대해선 대부분 구속영장을 발부하고 있다. 그런데 주폭이란 단어를 처음 만들어 이번 전쟁을 시작한 곳은 충청북도 지방경찰청이었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해도 해도 너무한 동네 주폭
충북 청원군의 한 농촌에 사는 이모(52)씨. 일손 모자라 노는 땅이 많아도 그는 직업이 없다. 하루 종일 만취 상태에서 이웃에 행패 부리는 게 그의 '일'이다.
이 씨는 아침마다 동네 수퍼에 들른다. 소주 2병을 냉장고에서 꺼내 가게 앞 테이블에서 혼자 술판을 벌인다. 취기가 오르면 행인에게 욕설을 하고 시비를 건다. 눈 마주치면 따라가서 멱살부터 잡기에 언제부터인가 그를 쳐다보는 사람은 없다. "술 더 갖고 오라"고 소리치다 수퍼 주인이 "나도 좀 살자"고 애원하면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선다. 술값을 준 적도 없고 달라고 한 적도 없다.
이 번엔 마을 한 바퀴 돌 차례다. 그는 다방·미용실·식당 등 보이는 곳 아무 데나 불쑥 들어가 욕설을 내뱉는다. 주인이 나가달라고 하거나 인상 쓰는 손님이 보이면 바로 테이블 뒤엎고 행패가 시작된다. '가슴 크다'며 지나가는 여자의 옷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은 적도 있다. 이웃들이 집단 '왕따'하려는 기미가 보이면 논에 나가 모내기용 모판 비닐을 찢어버리는 등 그는 마을의 공포 대상이었다. 사람만 괴롭힌 것도 아니다. 비틀거리는 자신을 보고 짖는다고 이웃집 개를 삽으로 패 죽인 일도 있다.
이 씨는 얼마 전 길에서 자다 한밤중에 119에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구급차 타고 병원 응급실에 가서 링거 주사를 맞고 술이 깨면 다시 마을로 와 패악질을 되풀이했다. 벌써 수년째 일이지만 신고해도 소용이 없다. '소줏값 3000원 안 낸 죄' '욕설을 한 죄' '테이블 엎은 죄' 등 한건씩 따져보면 큰 죄가 아니다. 게다가 신고하면 보복할 게 뻔하니 이웃들은 그저 술버릇으로 이해하고 넘어간다.
- ▲ 일러스트 =박성훈 기자 ps@chosun.com
오모씨는 청주 중심가에서 활동하는 여자 주폭이다. 폭행 등 '가벼운' 전과(前科) 39개를 갖고 있다. 멀쩡할 땐 공원 후미진 곳에서 성매매를 하고, 술에 취하면 주로 재래시장 주변을 배회한다.
콘돔으로 머리를 묶고 다니는 오씨는 물건을 내던지거나 부수는 게 '취미'라고 한다. 아무에게나 욕설을 하다 시비가 붙으면 좌판에 진열된 고등어, 오징어를 마구 집어던져 상대를 다치게 하고 상인들에게 경제적 피해를 준다.
오씨가 구속될 때 적용된 범죄 사실은 22개였는데, 그 중엔 문 열린 집에 들어가 가위로 남의 머리카락과 속옷을 자른 혐의도 포함되어 있다. 시장 상인들 사이에 "오씨 때문에 못살겠다"는 민원이 쌓여 이번에 구속된 경우다.
주 로 '낮술'에 취했던 정모(47)씨는 청주 흥덕구 일대에선 천적과 같은 존재다. 집 주변 약국과 병원, 은행, 동사무소는 물론 교회와 재활센터까지 그를 두려워했다. 특히 그에게서 원색적인 욕설을 듣지 않은 여성이 드물 정도라고 한다. 눈이 풀린 상태로 병원이나 약국에 나타나 여의사나 간호사 등을 희롱했고, 진료를 거부하면 퍼질러 앉아 30분 이상 노래를 불러 업무를 못 보게 했다. 진료비 1000원을 달라고 하면 그의 입에선 바로 "쪽팔리게, ×××아. 눈 안 깔아"라는 욕설이 튀어나왔다. 여자만 근무하는 곳에선 웃통 벗기가 그의 단골 메뉴였고, 올해 초엔 동사무소 민원대에 죽은 쥐를 올려놓고 여직원들을 희롱했다.
주 말엔 교회가 피해를 입었다. 지난 3월엔 예배 중에 큰 소리로 가요를 부르다 목사가 제지하자 욕을 퍼붓는 등 소란을 피웠다. 정씨는 다른 사람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오히려 즐기는 것 같았다는 게 주변의 반응. 실제로 병원 간호사나 동사무소 직원들은 "정씨가 어떤 땐 '내가 와서 스트레스받지'라고 놀린다"며 "다른 사람이 싫어하는 것을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것 같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지난 2년간 정씨의 주변 인물을 통해 확인한 범죄 사실만 49가지였으며 이를 근거로 정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한다.
◆주폭은 구속이다
충 북경찰청이 작년 10월부터 최근까지 구속한 지역 주폭은 모두 94명. 97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는데 단 3명만 기각되고 피의자 대부분의 혐의가 구체적으로 입증됐다는 것이다. 청주뿐 아니라 영동·옥천·괴산(각 5명)과 음성(4명), 단양(3명), 진천(2명) 등 시골 주폭도 이번에 대거 구속되었다. 충북 보은의 한 농촌에선 술만 마셨다 하면 노인들을 두들겨 패는 등 '마을의 제왕'으로 군림해오던 30대 남자가 구속돼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경찰청은 올해 초 충북청의 사례를 들어 전국 경찰청에 주폭 척결을 지시했다. 지난 7월까지 전국에서 494명이 구속됐는데, 인구 150만명인 충북에서 구속된 주폭 수가 전국 두 번째였다. 전남청의 경우 주폭 44명을 검거해 전원 구속영장이 발부되는 '진기록'을 남겼다.
충북청은 이를 바탕으로 한국생산성본부가 주관하는 국가생산성대상에 응모했고 현재 수상이 유력하다. 그동안 많은 국민들이 주폭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고도 수사 기관은 처벌 수단이 마땅치 않아 '경범'으로 다뤄왔으나, 작은 범죄를 모두 찾아내 큰 범죄임을 입증하는 이번 수사 기법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후문이다.
김용판 충북청장도 '주폭'이란 용어에 대해 특허를 출원한 상태. 김 청장은 "국민들에게 주폭의 폐해를 널리 알리고자 상표권을 신청했다"며 "그릇된 음주 문화를 끝까지 바로 잡아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이해해달라"고 했다. '조폭 마누라'로는 살아도 '주폭 마누라'로는 살 수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충북청은 도내 기업, 병원, 대학과도 잇따라 업무 협약을 맺고 '주폭 척결'이라는 로고를 제품 포장에 새겨넣고, 대학 축제 때 건전한 음주문화 정착을 위해 함께 노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키워드] 주폭 척결|건전한 음주 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