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서사 |
제방도로에서 처음 맞이하는 신성리 갈대밭의 웅장함은 가슴까지 상쾌하게 한다.
봉서사는 장승이 먼저 반갑게 맞아준다.
가을의 운치가 가득한 법당 가는 길.
정갈한 모습이 인상적인 봉서사.
금빛 갈대밭의 신명난 춤사위에
내 마음속 환희심 ‘출~렁’
메마름의 시기이다. 땅을 딛고 살며 그 자리에서 겨울을 맞이하는 생명은 몸의 변화로 겨울이 다가왔음을 깨닫는다. 나무는 잎사귀를 땅에 내려놓고 몸은 메마른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라 피부가 당기는 건조함과 함께 마음 한켠 스산함을 느낀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촬영지로 유명한 서천 신성리 갈대밭을 찾았다. 최근 개통한 서천~공주간 고속도로를 이용하면 마음까지 뻥 뚫리는 기분을 누릴 수 있다. 서해안 고속도로 서천 나들목을 이용할 수도 있다. 갈대가 주로 습지에 자라기 때문에 이 백리 서천 해안을 따라가다 보면 쉽게 갈대 군락을 만날 수 있다.
신성리 갈대밭은 서천군과 군산시가 만나는 금강 하구에 펼쳐져 있으며 너비 200m, 길이 1.5km, 면적 33만580㎡(10만여 평)가 넘을 정도로 규모가 크며, 제방도로에 올라서면 드넓은 갈대밭이 눈 아래로 내려다보인다. 최근에 설치된 나무로 만든 관람데크가 갈대밭의 진입을 한결 쉽게 하고 그 끝에서 금강의 물줄기를 만나게 해준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고 하고 어느 철학자는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다. 이런 말들은 갈대가 사람의 어떠한 습성을 닮아서 이기도 하지만, 바람의 일렁이는 갈대밭의 장관은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물결처럼 멀리서부터 이는 서걱 거리는 소리에 눈을 감고 소리를 쫓아도 좋고, 어른 키보다 웃자란 갈대 사이의 석양을 보는 즐거움도 좋다.
차를 몰아 10여 분 달리면 봉서사가 있다. 마곡사 말사로 주차장 앞의 여러 장승들이 먼저 맞이해 준다. 여기서 법당으로 향하는 짧은 진입로에 쌓인 단풍이 멋스럽다. 작지만 짜임새 있는 가람의 배치도 좋다.
현재의 도량의 모습은 근래 불사에 의한 것으로 고풍스러운 멋이 아쉬우나, 법당에 모셔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소조삼존불의 조성시기로 미루어 보면, 조선중기 이후에는 나름의 규모를 갖춘 가람임을 알 수 있다.
서천=신재호 기자 air501@ibulgyo.com
[불교신문 2578호/ 11월28일자] 2009-11-25 오후 2:13:19 / 송고 |
봉서사 전경 |
건지산 봉서사 (乾芝山 鳳棲寺)
봉서사는 서천군 한산면 호암리 195번지에 건지산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마곡사의 말사로 속해 있다.
1) 역사
봉서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먼저 <서천군지>(1989년)의 내용이 주목된다. 이 자료에는 고려말 기산면 영모리에 있던 영모암(永慕庵)을 1682년(숙종 8) 4월 이곳으로 옮겨 지은 것이 지금의 봉서사라는 창건설을 전하고 있다. 하지만 봉서사가 곧 영모암을 옮겨 지은 것이라고 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단정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특히 1899년 이후 편찬된 <충청도읍지> 한산군조에는 영모암과 봉서사가 함께 소개되어 있으며, 1929년에 편찬된 <서천군지>에도 두 사찰이 나란히 언급되어 있어 이 무렵 두 사찰은 분명 공존하고 있었다는 점이 확인되기도 한다. 영모암은 지금 이 지역에 남아 있지 않은 사찰이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 ‘한산군’ 불우조의 “영모암은 건지산에 있으며 이색의 화상이 있다”라는 내용으로 보아 적어도 16세기 초반 무렵까지 건지산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고려말 대학자인 이색과 관련이 있는 사찰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이후 중간 시기에 폐사로 변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19세기말부터 20세기 중반 무렵까지는 분명 존재하고 있던 사찰이었다. 영모암과 봉서사의 관계는 앞으로 더 검토해 보아야 하겠지만 현 상태에서 봉서사가 영모암을 옮겨 지은 것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한편 <범우고>에는 봉서암이라는 암자가 이 지역에 있었다는 기록이 실려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적어도 18세기 중후반의 존재사실은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지난 1994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34호로 지정된 소조삼존불상의 조성시기로 미루어 보아도 조선중기 이후에는 나름대로 가람의 규모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후 <태고사사법>에 마곡사의 말사로 속해 있는 것으로 보아 일제 강점기 시절에도 사세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2) 연혁 ------------------------------------------------------------------- 고려말 기산면 영모리에 영모암(永慕庵) 위치 ------------------------------------------------------------------- 1682년(숙종 8) 4월 현재의 위치에서 봉서사로 창건설 ------------------------------------------------------------------- 1954년 소조삼존불상 현 사찰로 이동 ------------------------------------------------------------------- 1962년 극락전 후불탱화 조성 ------------------------------------------------------------------- 1994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34호로 소조삼존불상 지정 -------------------------------------------------------------------
3) 문서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 ‘한산군’ 불우조 <범우고>에는 봉서암 <태고사사법>에 마곡사의 말사 <서천군지>(1989년, 1929년) <충청도읍지> 한산군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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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서사는 잘 다듬어지고 깔끔한 비구니 사찰이다. 이 곳은 한말 한산군에서 배출한 유명한 독립운동가이자 애국자인 월남 이상재 선생과 인연이 있는 곳이다. 이상재 선생은 소년시절에 이곳에서 수학을 하였기 때문이다. 구불구불한 시골길을 따라 농촌의 풍광이 인상적인 곳. 절집을 찾아가는 길이 즐거운 이유는 도시의 먼지나 세속적인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있기에 그러하다. 혼잡한 도로와 교통처럼 엉키고 혼란한 생각을 잊고자 절집을 찾아나설 때, 그리 오랜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그리 험난한 길을 가지 않아도 만날 수 있는 곳에 봉서사가 있다. 봉서사에 도착한 순간, 갑자기 마음의 눈이 열리고 복잡한 머릿속이 맑아지며 “아 정말 잘왔다.”하는 그런 느낌이 드는 곳이다. 반갑게 맞아주시는 주지스님의 환한 말소리와 그윽한 미소에 더욱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좀더 오래 머물면 스님이 내어주시는 한잔의 차를 마시며 마음의 때까지 깨끗이 씻어낼 것 같다. 아늑하고 조용한 봉서사는 이 지역 주민들이 즐겨 찾으며 부처님의 말씀과 함께 하고 있다. 여느 시골 절집처럼 열성적인 신도가 많지 않지만 오다가는 발길 따라 마음 편히 들르고, 부처님의 오묘한 법을 듣기 위함이다. 그렇게 절집을 찾는 이들에게 마음의 안정을 줄 수 있을만큼 봉서사는 정갈하고 깔끔하고 잘 다듬어져 오늘도 이들을 반갑고 맞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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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oreatemple.net/kore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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