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산자료실 ▒

모시장터 군중 경찰관서 습격 완파

천하한량 2008. 3. 11. 20:38
모시장터 군중 경찰관서 습격 완파
호서 3대 시장 마산장이 배경

 

허정균 기자 huhjk@newssc.co.kr

 

 

서천 마산 신장 3·1운동의 배경


1919년 3월 29일 마산면 신장리 장날에 큰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날 오후 1시경 기독교도 송기면 등은 준비한 7천여 매의 태극기를 모여든 군중에게 나누어 주며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수백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장을 누볐다.

이에 일본 경찰은 시위를 주동한 송기면, 고시상 등을 체포하자 2천여명의 군중이 경찰관서를 습격했으며 건물은 기둥만 남고 전파되었다. 시위행렬은 한산에서 경찰과 충돌하여 14명이 투옥되었다.

서천의 3·1운동은 3월 말경으로 늦은 감은 있지만 당시 독립을 염원하는 한국민들의 열정이 드러난 대표적인 독립만세운동이었다. 기독교도들이 중심이 되었으며 모시 거래가 주가 되었던 장날 민중과 결합하여 매우 격렬하게 펼쳐졌으며 이에 따른 탄압도 타 지역에 비해 심하였다. 독립운동을 전개한 인사들은 징역 1년에서 5년형을 선고받았다.

이같은 마산 신장 3·1운동에 대해 향토사학자 유승광 박사는 화양면 와초리에 있었던 한영학교의 김인전 선생과 월남 이상재 선생의 영향을 받은 한산면 종지교회, 그리고 모시 거래가 주종을 이루던 당시 호서지방의 3대 시장이었던 마산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마산 신장 3·1운동 주모자들 가운데 송기면, 임학규, 이근호 등은 당시 중등교육 과정으로 김인전 선생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던 한영학교 출신이다.

또한 당시 나이 60세로 참여하여 징역 1년형을 받은 유성열 장로의 종지교회는 1904년 옥에서 풀려난 월남 선생이 차남 이승인으로 하여금 세우도록 한 교회이다.  


   
   
▲ 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는 유성열 서천문화원장

   
▲ 서림국악원 김호자 원장의 살풀이 공연

   
▲ 해방과 재도약을 상징하는 어메니티크루의 힙합 공연

   
▲ 서천 3·1운동 기념탑에서 열린 기념행사. 순국선열들에 대한 묵념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