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음 뒤 블랙 아웃(black out)을 경험하기 쉬운 연말이다. 블랙 아웃이란 과도한 음주 후 종종 나타나는 ‘필름이 끊기는 현상’. 하지만 기억상실증과는 다르다.
블랙 아웃은 알코올이 대뇌의 해마(기억의 임시 저장소)를 마비시켜 뇌의 정보 입력 과정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나타난다. 반면 기억상실증은 뇌의 출력 과정이 고장 난 것이 원인이다.
흔히 블랙 아웃은 “입력시킨 데이터를 저장하지 않고 PC를 끈 상태”로 비유된다. 저장된 정보가 없으니 출력할 정보도 없다. 필름이 끊긴 사람이 무사히 자기 집을 찾아오는 것은 과거 뇌에 저장돼 있던 정보를 출력해 사용하는 것.
블랙 아웃은 누구나 한번쯤 경험할 수 있지만 때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범죄를 저지르거나 큰 사고를 당할 수 있다.
미국 듀크대 연구팀은 2002년 대학생 772명을 대상으로 블랙 아웃 상태에서 경험한 것을 조사했다(중복 응답 가능).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경우가 33%로 가장 많았다. 돈을 함부로 사용(27%)하거나 성적인 문제(25%), 싸움(16%), 기물 파손(16%) 등이 뒤를 이었다. 필름이 끊긴 상태에서 운전을 한 학생도 2.5%에 달했다. 연구팀은 “이런 이상 행동은 알코올이 뇌에 영향을 끼치면서 감정이 조절되지 않은 탓”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뇌는 다른 장기에 비해 혈액 공급량이 많으므로 알코올에 의해 손상을 받기 쉽다.
블랙 아웃은 또 해마의 신경세포 재생을 억제한다. 따라서 이런 일이 반복되면 기억력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간혹 뇌에 영구적인 손상이 와서 알코올성 치매로 발전하기도 한다.
“한번 필름이 끊겼던 사람은 술만 마셨다 하면 자동적으로 필름이 끊긴다”는 속설이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필름이 반복해 끊기는 것은 유전이나 개인 특성 때문이 아니라 잘못된 음주 행태가 고쳐지지 않은 탓이다. 블랙 아웃은 술 마시는 양과 속도에 비례해 발생한다.
한강성심병원 정신과 최인근 교수는 “블랙 아웃을 피하려면 음주량과 음주 속도를 줄여 알코올이 뇌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음주량·속도가 간에서 알코올이 충분히 분해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선 안 된다”고 설명했다.
알코올은 대략 시간당 7~10g의 속도로 간에서 분해된다. 체중 60㎏인 사람이 맥주 1병(500㎖, 알코올 농도 4%)을 마시는 경우 간에서 알코올이 모두 분해(대사)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3시간 가량. 소주 1병(360㎖, 25%)을 마셨다면 모두 분해되는 데 약 13시간이 소요된다.
상습 블랙 아웃 경험자에게 “술을 가급적 천천히 마시라”고 권하는 것은 이래서다. 한번 술을 마신 뒤 다음 술자리를 갖기까지 3~4일 간격을 둔다. 음주 뒤 72시간이 지나야 간이 정상적으로 회복되기 때문이다.
다사랑병원 김석산 원장은 “블랙 아웃은 알코올 의존증의 초기에서 중기로 넘어가는 순간에 잘 나타난다”며 “이런 현상이 6개월에 2회 이상 나타나면 전문의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박태균 식품의약 전문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