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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C 국제원유 달러결제 포기 논쟁

천하한량 2007. 11. 19. 18:46
17∼18일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열린 석유수출국기구(OPEC) 정상회의의 화두는 단연 사상 유례없는 달러화의 약세였다.

OPEC 13개 회원국 경제의 근간이 석유 수입이며 그간 달러화는 의심할 나위 없이 국제 유가의 표준이었으며 가치의 절대 기준이었던 탓에 달러화 약세가 초미의 관심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오일 달러’라는 단어가 산유국 경제력의 대명사 격이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원유 달러거래 포기할 때” = 기록적인 고유가로 산유국이 축적한 달러 자산은 천문학적이다.

올해 OPEC 회원국이 벌어들인 ‘오일 달러’는 고유가를 타고 6천580억달러(사우디 2천770억달러)로 10년 전보다 5배 증가했다.

산유국은 이를 종자돈으로 미국과 유럽의 블루칩을 매입하고 건설, 사회기반시설, 관광 등 국내 경제 기반 구축에 재투자했다.

하지만 달러화 약세라는 장애물을 만나면서 고유가의 열매가 달지만은 않았다.

달러화는 올해 들어 주요 통화바스켓 대비 16%가 떨어졌고 2000년 OPEC 정상회의에 비해 44%나 급락했다.

이란 정부는 이런 점을 지적하며 “고유가라고 하지만 올해 평균 국제유가는 배럴당 63달러인데 이를 유로로 따지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오히려 더 하락했다”고 주장했다.

오일 달러가 주 수입원인 산유국에 달러화 약세는 국제시장에서 구매력을 떨어뜨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유럽 등 미국 외 지역과 교역에서 수입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문제를 일으킨다.

달러 연동 고정환율제를 시행하는 걸프지역 산유국은 달러가 10% 하락하면 구매력이 5% 감소한다는 통계도 있다.

OPEC 회원국이 달러 약세에 대한 우려를 공식 표명하고 원유의 달러거래를 복수통화바스켓으로 이동하는 이슈는 이번 정상회의에 앞서 열린 장관급 회의에서도 큰 논쟁거리였다.

실수로 방영된 장관급 회의에서 사우디 재무장관 사우드 알-파이잘 왕자가 “달러화 약세에 대한 우려가 정상회의 선언문에 포함되면 달러는 ‘붕괴할지도 모른다’”고 말한 것.

파이잘 왕자가 나중에 이 발언을 수습하려고 했지만 향후 OPEC의 최대 현안은 ‘국제 유가의 달러화 결제를 유지하느냐’라는 문제인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미국과 관계 얽힌 정치적 사안 = 국제 유가를 달러화로 매기고 거래하는 현행 방식을 포기하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인 논쟁으로 그치지 않는다는데 사안의 복잡성이 있다.

이번 OPEC 정상회의에서 달러화 약세 문제를 적극 들고 나왔던 국가가 이란,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등 이른바 ‘반미 전선’이었기 때문이다.

국제 원유시장에서 가치가 떨어진 달러화 거래를 재고해야 한다는 이들의 주장의 논리는 누가 봐도 충분하다.

라파엘 코리아 에콰도르 대통령은 18일 “(달러화 거래를 지속할 때) 지금과 같은 재화를 사려면 우리는 더 많은 원유를 팔아야 한다”며 “OPEC은 ‘강한 통화’로 원유를 판매할 필요가 있다”며 달러화 거래 폐지의 선봉에 나섰다.

이란 등 반(反)서방 국가가 정상회의에 앞서 주장한 달러화 약세에 대한 OPEC의 입장 표명은 이 선언문에 명시되지 않았지만 “일부 정상의 제안을 포함해 OPEC 회원국간 경제적 협력을 증진하는 방법을 연구할 것”이라고 간단히 언급됐다.

하지만 골람 호세인 노자리 이란 석유장관은 18일 기자들에게 “(OPEC 회원국) 재정 장관들이 이 문제(달러화 약세)를 더 연구하고 이에 동의한 것은 훌륭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반미 국가들이 달러화 약세에 따른 충격에서 자국 경제를 보호한다는 점을 명분 삼아 국제 경제의 한 축인 원유 시장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약화하겠다는 정치적 의도를 간접적으로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원유 거래를 달러화 이외의 다른 기축통화로 한다면 이들이 원유 수출로 얻는 막대한 수입도 다른 통화로 서서히 전환될 것이며 이는 곧 산유국에 대한 미국 정부의 영향력 축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과점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원유 시장에서 달러 의존도를 낮춘다면 핵 프로그램 추진 등 다른 정치적 사안까지 전쟁을 빼면 유일한 미국의 카드인 경제 제재에서 어느 정도 ‘독립성’을 확보할 수 있다.

이란이 지난해 3월 원유 결제 대금을 유로화로 요구했고 베네수엘라도 2001년에 이어 지난해 12월 원유의 유로화 결제 방침을 내비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이란의 국영 원유회사는 “이미 원유 수출대금의 57%를 유로화로 받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른바 반미 전선 국가는 자신의 정치적 의도를 분명히 드러내지 않고도 명분이나 논리 모두를 갖춘 지금이 군사적으로 압박하는 미국 정부의 약점을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은 셈이다.

◇걸프지역 달러화 정책 관심 = 사우디 등 걸프지역 산유 부국은 그간 안정된 가격의 원유거래로 ‘예측 가능한 경제’를 유지하려고 달러 고정환율제를 고수해 왔다.

하지만 이들 국가 모두 달러화 약세와 유로화 강세에 따른 기록적인 인플레이션 압력을 받고 있어 달러 고정환율제 고수에 대한 비판 여론이 비등하는 상황이다.

쿠웨이트가 지난 5월 달러 고정환율제를 포기하고 복수 통화바스켓제를 도입하고 달러 약세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이런 비판 여론이 힘을 얻고 있다.

국내 인플레이션이 두자릿수인 카타르와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이 이르면 내년 중반께 쿠웨이트의 뒤를 따를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걸프 지역 국가가 달러 고정환율제를 포기하고 복수 통화바스켓을 도입한다면 국제 유가 시장에서 달러화의 입지는 큰 위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2010년을 목표로 하는 걸프지역 통화 단일화와 미국 정부와의 정치적 이해타산 때문에 이들 정부가 섣불리 달러 고정환율제를 포기할 수 있을 지는 미지수다.

따라서 사우디를 위시한 친미 세력이 달러화 약세의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어느 정도 달러 의존도를 낮추자는 공격 논리를 방어를 할 수 있을 지가 향후 관전 포인트다.

또 원유 수입국이 과연 달러화 대신 가치가 높아진 유로화 등 다른 기축통화 결제에 순순히 따라 줄 것인지도 지켜봐야 할 부분이다.